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선행도 없이 늙어 죽음이 닥치면
기분파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하고 기분이 나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쓰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글쓰기는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쓰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은 대로 씁니다. 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향상(向上)과 성장(成長)을 위한 모임
살다보면 갖가지 모임 한 두 개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임에는 적극적인 참여파가 소극적인 참여자도 있습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참여하기도 하고 불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판단 되면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멀리 합니다.
배움을 위한 모임이든 친목을 위한 모임이든 여가를 위한 모임이든 어떤 모임이든 간에 ‘향상(向上)’과 ‘성장(成長)’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 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 해야 합니다. 배움의 단계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끌어 가는 단계라면 태도를 달리 해야 합니다. 설령 배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비(慈悲)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모임 중에 니까야강독모임이 있습니다. 벌써 일년 되었습니다. 작년 2월 11일 처음 강독모임이 시작 되었습니다. 어제 2월 9일 니까야강독모임이 열렸으므로 1주년이 된 것입니다.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 저녁 7시에 삼송역 부근 삼송테크노밸리 전재성박사 서고에서 열리는 니까야강독모임입니다.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습니다.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한 두 번 나오다 그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생업에 바빠서 거리가 멀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인연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구면이 되어 반갑습니다. 한번이라도 나온 님들을 위하여 단체카톡방도 만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나올 수 없지만 들은 것을 요약하여 올리면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선행도 없이 늙어 죽음이 닥치면
2월 첫번째 강독모임에서는 ‘선행도 없이 늙어 죽음이 닥치면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제목의 경을 독송했습니다. 각주를 보니 ‘AN.I.155’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1권 155페이지라는 뜻입니다. 찾아 보니 ‘바라문의 경1(A3.51)’입니다.
부처님이 사밧티 시의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나이가 든 바라문들이 찾아 왔는데 나이가 120세라 합니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하듯이 “존자, 고따마여, 저희들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해 향년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입니다.”(A3.51)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요즘 100세 시대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주변에 90세 이상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조만간 120세 시대가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래 산다고 축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EBS 다큐에서 ‘백세 쇼크’라는 프로를 보았는데 장수가 축복이라기 보다는 재앙이 더 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건강하게 장수하면 축복일지 모르지만 노화로 인한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죽지 못해서 사는 100세 시대는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선행도 없이 늙어 죽음이 닥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장수축원을 하는 이유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숨만 쉬고 있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오래 산다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Dhp.109)라며 장수축원을 해줍니다. 이 말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라는 축원입니다.
장수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그래서일까 최대의 축원은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 (ciraṃ jīva, dighamāyuṃ pālehī)” (A5.58)라며 장수축원을 해줍니다. 그런데 장수축원을 해주는 진정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오래 사는 동안에 공덕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보시자에게 “장수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건강하기를!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라고 축원하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숨이 늘어나면, 목숨과 비례해서 다른 특징들도 개선된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로 오십년의 삶을 산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스물 다섯에 어떤 위험이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면, 그 위험이 그의 예경하는 습관 때문에 줄어 들 수 있었을 것이고 생의 끝까지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다른 특징들도 목숨의 증가에 따라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오십 년의 삶으로 한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찾아온 위험에 의해서 위협받았다면, 위험 없이 지속되는 그러한 목숨의 연장은 없었을 것이다.”(DhpA.II.239, 전재성님역)
법구경 109번 게송 “āyu vaṇṇo sukhaṃ balaṃ”(Dhp.109)과 관련된 주석을 번역한 것입니다. 오래 산다는 것이 단지 수명연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래 산다는 것이 즐기기만 하는 삶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공덕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아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숨이 늘어나면, 목숨과 비례해서 다른 특징들도 개선된다.”라고 했습니다.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은 죽을 때가 되자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바라문들은 오늘날 유일신 종교와 같은 브라만교를 믿었습니다. 브라만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하여 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Brahma)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것이 최고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말년에 부처님을 찾은 것은 “저희들은 선행을 하지 못했고, 두려움에서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A3.5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늙은 바라문들은 브라만교의 교리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이십 세가 된 늙은 바라문들은 “저희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이익과 행복이 있도록, 존자 고따마여, 저희들에게 충고하여 주십시오. 존자 고따마여, 저희들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A3.51)라며 배움을 청했습니다. 바라문들은 이교도이기 때문에 ‘세존이시여(Bhagava)’ 하지 않고 부처님의 성을 불러 ‘고따마(Gotama)’라 한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Taggha tumhe brāhmaṇā jiṇṇā vuddhā mahallakā addhagatā vayo anuppattā vīsaṃ vassasatikā jātiyā. Te cattha akatakalyāṇā akatakusalā akatabhīruttāṇā. Upaniyyati kho ayaṃ brāhmaṇā loko jarāya vyādhinā maraṇena, evaṃ upaniyyamāne kho brāhmaṇā loke jarāya vyādhinā maraṇena, yo idha kāyena saṃyamo, vācāya saṃyamo, manasā saṃyamo, taṃ tassa petassa tāṇañca lenañca dīpañca saraṇañca parāyaṇañcā'ti.
“바라문들이여, 실로 그대들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해 향년 백이십 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 선행을 하지 못했고,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지 못했고, 두려움에서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이끌어집니다. 바라문들이여, 이 세상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이끌어지더라도 어떤 사람이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죽은 뒤의 구원이고 동굴이고 섬이고 피난이고 피안입니다.”(A3.51)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죽음을 두려 하는 듯 합니다. 이는 살아 오면서 ‘선행을 하지 못한 것(akatakalyāṇā)’,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지 못한 것(akatakusalā)’, ‘두려움에서 피할 곳을 마련하지 못한 것(akatabhīruttāṇā)’ 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 하여 감각을 즐기기만 하며 살다가 늙어 버린 자와 같습니다. 오래 오래 살았지만 즐기며 사는 것 외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을 때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 것입니다.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은 죽음을 앞두고 부처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그것은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tāṇa)에 이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섬(島)이 열반의 뜻일까?
유일신교에서는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유일신을 믿으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유일신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백이십 세 된 바라문들도 하느님(Brahma)를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년에 부처님을 찾아 온 것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나를 믿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신체의 제어, 언어의 제어, 정신의 제어(kāyena saṃyamo, vācāya saṃyamo, manasā saṃyamo)’를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어라는 말은 빠알리어 ‘saṃyamo’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Restraint, self control’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자제’로 번역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하더라도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제어하면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구원은 다름 아닌 동굴(lena), 섬(dīpa), 피난(saraṇa), 피안(parāyaṇa)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nibbana)입니다.
상윳따니까야 ‘무위의 모음(S43)’에 따르면 동굴, 섬, 피난, 피안을 열반으로묘사했습니다. 섬(dīpa: 島)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S43.40)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동굴(lena, S43.41), 피난(saraṇa, S43.43)), 피안(parāyaṇa, S43.44)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섬이 왜 열반의 뜻인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입니다. 바다는 평온한 듯 보이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면 거센 파도에 난파 되어 버립니다. 또 바다에는 상어 등 목숨을 위협하는 요인이 많아 안전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윤회의 바다에 비유합니다. 생사가 거듭되는 소용돌이와 폭류의 윤회의 바다를 말합니다.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입니다. 마찬가지로 윤회가 끝나는 열반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섬(dīpa: 島)은 열반과 동의어입니다.
윤회의 바다에서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atta)과 가르침(Dhamma)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어서 그 창조주를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그리고 가르침을 실천함에 따라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구 구원은 동굴(lena), 섬(dīpa), 피난(saraṇa), 피안(parāyaṇa) 등으로 표현된 열반입니다.
미세한 제어에 대하여
불교적 구원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즉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제어 하는데 있어서 거친 것이 있고 미세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친 것은 불살생 등 십선행에 대한 것입니다. 미세한 것으로는 호흡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십선행 등 거친 것을 제어하면 선업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미세한 것을 제어하면 열반이라는 구원에 이릅니다. 미세한 제어에 대하여 ‘까마부의 경(S41.6)’에 따르면, 신체적 형성의 소멸은 호흡이 소멸하는 것을 말하고, 언어적 형성의 소멸은 사유와 숙고가 소멸하는 것을 말하고, 정신적 형성의 소멸은 지각(想)과 느낌(受)의 소멸을 말합니다.
신체의 제어, 언어의 제어, 정신의 제어 중에 가장 먼저 언어적 형성의 소멸이 일어납니다. 사유와 숙고가 소멸되므로 ‘初禪定’입니다. 다음으로 신체적 형성의 소멸이 일어나는 데 이는 호흡의 소멸을 말하며 ‘四禪定’에서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정신적 형성의 소멸이 일어나는데 이는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는 것으로 ‘상수멸정(想受滅定)’에서 일어납니다. 지각(想)과 느낌(受)이 소멸되었을 때 이를 ‘상수멸(想受滅)’이라 합니다. 상수멸은 때로 열반과 동의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공덕을 쌓으면”
부처님이 백이십 세 바라문들에게 “신체를 제어하고, 언어를 제어하고, 정신을 제어하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죽은 뒤의 구원이고 동굴이고 섬이고 피난이고 피안입니다.”(A3.51)라 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친 것을 제어하는 것으로서 불살생 등 열 가지 십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미세한 것으로 호흡과 사유숙고와 지각느낌을 제어하는 것으로 상수멸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백이십 세가 되어 죽음이 가까운 바라문들에게 두 가지 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친 제어이고 또 하나는 미세한 제어입니다. 그런데 경의 후반에 실려 있는 게송을 보면 거친 제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에게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 했습니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ṇā.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i.
“사람의 생애는 짧은 수명에 이끌려지고,
늙어가야만 하는 자에게 구원은 없네.
죽음의 그 두려움을 잘 관찰하여
행복을 실어 나르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
Yodha kāyena saññamo
vācāya uda cetasā,
Taṃ tassa petassa sukhāya hoti yaṃ
jīvamāno pakaroti puññanti.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제어하여
살아있는 동안에 공덕을 쌓으면
그것이 죽은 뒤에 행복이 되리.”(A3.51)
부처님은 공덕(puññā)을 강조했습니다.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에게 미세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것을 제어 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 보다는 지금 살아 있을 때만이라도 보시와 지계 등의 선업공덕을 지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매우 타당합니다.
부처님은 초심자들에게 처음부터 사성제,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초심자들에게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등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가르침부터 설했습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합니다.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먼저 공덕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시와 지계입니다. 실천방항목으로서는 십선행입니다. 이렇게 공덕을 쌓으면 “죽은 뒤에 행복이 되리”라 했는데 하늘나라 등 선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창조주나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에게 의지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경에서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청정한 행위를 하면 구원에 이를 것이라 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 합니다. 백이십 세가 된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서 안식처를 얻었습니다.
배움의 열망으로 가득 찬
날씨가 풀려서일까 서고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수십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지만 그래도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집이 먼 사람들입니다. 멀리 대전에서 KTX타고 일부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울 외곽 도시에서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달에 두 번 일년 동안 진행된 니까야강독모임입니다. 자주 보는 사람들은 낯이 익어 만나면 반갑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자들의 모임이기도 하고 동시에 후원자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도현스님이 참석자들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화선지 위에 그린 그림과 글씨입니다. 통칙스님이 그린 것이라 합니다.
통칙(洞則)스님은 판화로 그림을 그리는 스님이라 합니다. 판화작품은 그림에 어울리는 글도 함께 합니다. 연꽃그림과 함께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라 되어 있습니다.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으면 좋을 듯 합니다. 서로 다른 그림을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예상보다 많이 참석해서 못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배움으로 가득 찬 자들의 모임입니다.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거침 없이 달려 오는 것은 무언가 건질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너무 이르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부르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들에게 있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칩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자들에게 기분이나 날씨 등 외적 내적 요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치를 아는 자들에게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2018-02-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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