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빨리 알려 주어야
삼월 첫 번째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얼마나 알까? 거의 대부분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불교인이라 하더라도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것도 부처님의 원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는 초기경전 판매량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부니까야를 완역하고 쿳다까니까야의 일부 경전, 그리고 율장을 번역한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경전 하나가 출간 되었을 때 일년에 판매 되는 권수가 이삼백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정신적 성장을 위한 투자에는 매우 인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사 보지 않으면 가르침인지 알 수 없어서 가르침에 대한 무지로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숙명론, 존우론, 무인론 등 이른바 삼종외도설입니다. 니까야 강독 3월 첫 번째 모임에서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2)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로부터 설명을 들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 무작설(無作說: akiriyā-diṭṭhi)
부처님은 삼종외도설에 대하여 매우 혐오스런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A3.135)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최악일까?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에 대하여“머리털로 만든 옷은 추위 속에서 춥고 더위 속에서 덥고, 추하고 냄새가 나고 거친 감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A3.135)라 했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무시하는 견해가 매우 혐오스런 것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삼종외도설에 대하여 “현자에 의해서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A3.62)고 했습니다.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에 위배 되는 숙명론, 존우론, 무인론은 무작설(無作說: akiriyā-diṭṭhi)로서 보편적인 가르침이 아님을 말합니다.
무작설은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책임질 수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탓이라거나, 신의 뜻 이라거나,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계를 지킬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네 가지 가르침
삼종외도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아비지까교도들의 칠요소설에 따르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다.”(S24.52) 괴변을 늘어 놓습니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행위와 행위에 대한 과보의 가르침입니다.
행위와 행위에 대한 과보, 즉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은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에 대하여 “내가 설한 이러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고 했습니다. 업의 가르침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도 논박할 수 없고 누구도 비난 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하여 네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1) 여섯 가지 세계, 2) 여섯 가지 접촉감역, 3) 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 4) 네 가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가르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명백한 것입니다.
다뚜(dhātu)는 요소인가 세계인가?
논박할 수 없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여섯 가지 세계(chadātu)’가 있습니다. 그것은 땅, 물, 불, 바람, 공간, 의식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계’라 했습니다. 반면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서는 ‘요소’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다뚜(dhātu)에 대한 번역의 차이입니다.
빠알리어 다뚜의 사전적 의미는 ‘elements’입니다. 요소임에 틀림 없습니다. 더구나 ‘the ultimate constituents of a whole’라 하여 전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것이라 합니다. 마치 원자를 칭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뚜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라 하듯이 하나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각자 고유한영역이 있음을 말입니다.
우리 몸은 지, 수, 화, 풍 사대와 파생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 수, 화, 풍이라 하여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소라는 말은 근본물질을 뜻하는 원소라는 말로 오해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땅의 요소라기 보다 땅의 세계라는 식으로 사용합니다.
지수화풍 사대에 대하여 ‘성품’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경행할 때 지수화풍 사대를 느끼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대는 몸에 있는 흙의 성분으로 단단함과 그 강도를 나타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 발바닥 감촉으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느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화대는 불의 성품입니다. 몸에서 따뜻함이나 차가움 등으로 화대의 성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풍대는 몸에 있는 바람의 성품입니다. 몸의 움직임, 에너지를 비롯하여 호흡할 때 들숨과 날숨도 풍대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수대는 물의 본성입니다. 이는 흐름과 유동성을 가집니다. 눈물이나 땀 등 축축하고 습기가 있는 것은 물의 성품입니다. 세포가 응집되어 있는 것도 우리 몸 안의 물의 성품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에 대한 것입니다. 오온의 범주 안에서 모든 것을 설했습니다. 지, 수, 화, 풍이라는 사대 역시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 수, 화, 풍, 공간, 의식에 대하여 원자로 오해 받기 쉬운 요소로 보는 것 보다 각자 성품이 있음을 뜻하는 세계로 번역한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몸과 안에서 발생한다
부처님의 비난 받을 수 없는 가르침 중에 ‘여섯 접촉의 감역(cha passayatana)’이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접촉감역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는 ‘아야따나(ayatana)’라 해서 하나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고유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시각의 경우 시각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섯 가지 접촉 감역은 명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이 세상 어느 철학자나 사상가도 여섯 가지 접촉감역을 말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여섯 접촉감역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러한 것들이 여섯 가지 접촉감역이 있다.’라 했을 때 어느 누구도 논박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어느 누구도 허튼소리 못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일체의 경(S35.23)’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S35:23)
부처님이 시각과 형상 등 여섯 감역을 설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라 했을 때 허튼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에게 ‘그렇다면 이것 말고 다른 일체가 있습니까?’라며 역질문을 했을 때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온이었습니다. 오온을 떠나 우주의 생성과 기원 등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온의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오로지 오온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만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외도들은 오온을 떠나 외부에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여섯 가지 감역이 일체입니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면 세상이 생겨나고 우주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청각과 소리를 대상으로 청각의식이 생겨났을 때 시각의식은 사라지기 때문에 세상이 소멸하고 우주가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몸과 안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섯감역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일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 신통이다
오염되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의 하나가 ‘열여덟 가지 정신적 탐구(aṭṭha rasa manopavicāra)’입니다. 마치 십이처에 이어 십팔계를 연상하게 하지만, 십팔계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 등 여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쾌락과 불쾌, 그리고 평정에 대하여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여섯 가지 대상과 부딪쳤을 때 쾌, 불쾌, 평정이 일어나는데 모두 열여덟 가지가 됩니다. 이와 같은 쾌, 불쾌, 평정은 마치 느낌에서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유사합니다. 모두 대상과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호불호(好不好)가 뚜렸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라 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어’라 합니다. 그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중립적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각으로 형상을 접했을 때 쾌락과 불쾌가 일어날 수 있고 중립인 평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호불호와 쾌불쾌(快不快)로 모든 것을 대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쾌와 불쾌에서 벗어나는 것도 일종의 신통이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통이라 하면 기적 같은 재주를 말합니다. 그런데 쾌불쾌서 벗어나는 것도 신통이라 합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에 따른 것입니다.
“여읨이 이루어지지 때문에 신통이고,
변화하기 때문에 신변이다.
거룩한 길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통이고,
변화하기 때문에 신변이다.”(Vism.12.20)
어린 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거참, 신통하네!’라 합니다. 아이가 공부하는 모습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을 때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통의 의미는 단지신변변화를 뜻하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신통에 대하여 광의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중에 날아 다니는등 신변변화를 보이는 열 가지 신통뿐만 아니라 아이가 공부하는 모습도 신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통에 대하여 ‘네 번째 선정(四禪定)’으로 설명합니다.
네 번째 선정을 들면 ‘평정에 의한 새김이 청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우뻬카사띠빠리숫딩(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 합니다. 한자어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합니다. 호흡 마저 사라져서 지극히 맑고 청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바로 이런 상태가 신통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자재’를 얻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신통변화에 다가간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신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물위를 걸어 다니거나 하늘을 나는 등 신변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신통변화로 봅니다. 이와 같은 신통변화에 대하여 ‘곧바른 앎’이라 합니다.
아이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누구든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청정하고 순수한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대상에 집중하여 명상을 하는 것도 일종의 신통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더 이상 쾌와 불쾌, 호와 불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호불호(好不好) 쾌불쾌(快不快)에서 벗어나는 것도 신통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불쾌를 피하지 않으면 윤회가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정해진 것도 신통입니다. 지혜로워졌을 때 신통이 생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 괴로움의 진리라 했을까?
마지막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비난 받지 않는 것은 ‘네 가지 진리(cattāri ariyasacca: 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사성제는 왜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가르친다.”(A3.61)
부처님은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사성제를 설명했습니다. 느낌은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말합니다. 호불호, 쾌불쾌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느끼는 자의 관점이란 단순하게 경험하는 자가 아니라 ‘아는 자’를 말합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사성제를 알면 쾌불쾌, 호불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괴롭게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세상을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라 했습니다. 그래야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이 즐겁다’라 합니다. 그래서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이 즐거운 것이라면 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라 했을 때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즐거움을 설한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설한 이유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은 즐거운 것이라 설했다면 ‘이것은 즐거움이다.’ ‘이것은 즐거움의 발생이다.’ ‘이것은 즐거움의 궁극이다.’ ‘이것은 즐거움의 궁극에 이르는 길이다.’라 하여 ‘즐거움의 진리’를 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 언표로 설명하면 전부 다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반면에 부정적 언표로 설명하면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을 키워드로 설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도 괴로움에 대하여 설한 사성제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빨리 알려 주어야
어떤 큰 스님이 대중들에게 “당신들은 왜 삽니까?”라며 질문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즐겁다고 말하는 자는 일시적 행복을 말하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은 불만족과 괴로움의 시기이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만 괴롭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나를 찾습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괴로움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인생을 즐겨라. 나중에 후회한다.’라고 알려 준다면 잘못 인도하는 것이 됩니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시절이 가장 괴롭습니다.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괴로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빨리 알려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괴로운 인생입니다. 이렇게 인생이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한 해법도 함께 설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오로지 괴로움에 대해서만 설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입니다. 또 오늘날까지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의 작용한 설한 작론자(kiriyavādin)로서 무책임한 무작설(akiriyā-diṭṭhi)을 비판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비난 받을 수 없고 논박될 수 없는 명백하고 자명한 가르침입니다.
2018-03-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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