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부처님 말씀조차 믿을 수 없다고? 깔라마의 경 오해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8. 4. 14. 12:06


부처님 말씀조차 믿을 수 없다고? 깔라마의 경 오해하기

 

 

대략난감 불자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교에 대하여, 가르침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제각각 한마디씩 합니다. 초심자는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난감합니다.

 

불교에 수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테라와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마하야나의 가르침도 있고, 바즈라야나, 선불교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각각 서로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 부정으로 관찰하라고 말하지만 어떤 불교전통에서는 상, , , 정이라 합니다. 정 반대의 개념을 놓고 불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대략난감할 것입니다.

 

진리는 다 똑 같은 것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부처님 가르침은 다 똑 같은 것이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만 다를 뿐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2011년 조계종 화쟁위에서 추진한 바 있는 아쇼카선언문 초안에 따르면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이다.”라 하여 기독교나 불교나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기존 사상이나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만일 근본에 있어서 똑같은 것인데 표현만 다를 뿐이라면 굳이 힘들게 산중에 있는 절로 갈 것이 아니라 동네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헤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니까야를 읽으면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또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럴 듯한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 버립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월 첫 번째 니까야강독모임

 

니까야강독 4월 첫번째 모임이 삼송역 부근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서 열렸습니다. 언제나 변함 없이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법우님들과 함께 했습니다. 새로 오신 분도 있었습니다. 글로서 강독모임을 알리고 있지만 아직 인연이 되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10명 내외의 적은 숫자이지만 늦은 밤까지 조용한 장소에서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모두에게 커다란 인연이라 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부처님 당시에 께싸뿟따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케사리아 수투파가 있는 곳이라 여겨집니다. 그때 당시 가장 번영하였던 베살리 북서쪽 부근으로 꾸시나가르 가는 길목입니다. 이곳을 부처님이 방문했습니다.

 

께싸뿟따 마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다녀 갔었습니다. 이른바 육사외도들입니다. 외도의 스승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이 진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혼란만을 줄 뿐이었습니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을 촌장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촌장은 세존이시여, 이곳 께싸뿟따를 방문한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의 가르침만을 설명하고 계몽할 뿐,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욕하고 경멸하고 코웃음치는 것이었습니다.”(A3.65)라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초기불교를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오로지 경전에만 의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나 청정도론 같은 논서를 일체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해석한 것만이 바른 것이라 하며 세계최초라 합니다. 그러면서 기존 논서를 모두 엉터리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나의 이론이나 사상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비판해야 합니다. 문제점이나 모순점,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한 사례를 들었을 때 비로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이나 사상체계를 받아 들일 것입니다. 논장을 비판하는 자들 대부분 이런 방식을 사용합니다.

 

논장을 비판하는 자들은 십이연기에서 명색을 정신-물질이 아닌 이름-형태로 봅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으로 정립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논서들에서 볼 수 있는 재생연결식이나 삼세양중인과가 엉터리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발견한 것이 부처님이 진정으로 말씀 한 것이라고 각종 강연이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주장합니다. 과연 이런 견해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이런 견해에 초심자들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사상의 혼란기에

 

부처님 당시에도 사상의 혼란기가 있었습니다. 깔라마의 경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사태를 예견했음인지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Iti kho kālāmā yanta avocumha.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깔라마들이여, 당신들이 미심쩍어하고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것은 미심쩍은 일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은 부처님 당시 수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 MN.I.484)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장님인 자들이 코끼를 만지고 나서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 머리를 만진 자는 물항아리 같다고 하는데, 외도들 역시 마찬가지일것입니다. 어떤 외도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가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외도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정반대로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체계를 말했을 때 사람들은 햇갈려 할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라며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 열 가지

 

께싸뿟따 마을 사람들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끄달려서는 안될 것들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1) 전통(anussavena):

베다 성전의 전통에 의해

2) 전승(paramparāya):

여러 세대에 걸쳐 스승들을 통해 전승되어 온 온전한 전통에 의해

3) 소문(itikirāya):

들려오는 소문에 의해

4) 성전권위(藏經具足, piakasampadānena):

공인된 문헌상의 전통이 그러하므로

5) 논리(takkahetu):

추측에 의해

6) 추론(nayahetu):

공인된 도리(공리)가 그러하므로

7)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

가르침에 들어 있는 논거의 타당성에 의해

8)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가르침과 개인적 견해들 간의 일치에 따라

9) 유능한 형상(bhabbarūpatāya):

스승의 권능에 미루어보아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10)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samao no garū):

스승의 인품과 평판에 대한 존경심에서

 

 

외도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위와 같은 열 가지 범주에 들어 가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분류방법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그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잣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깔라마인들에 말한 열가지는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전통이라는 것도 시대가 지나면

 

첫번째 항을 보면 전통(anussavena)’이 있습니다.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으면 우선 믿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전통이라는 것도 시대가 지나면 비판받아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전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맞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때 삼강오륜은 그 시절에는 맞았지만 남녀평등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명제가 옳은 것에 한해서만

 

다섯번째 항을 보면 논리(takkahetu)’가 있습니다. 누군가 논리와 논거를 들어 설명하면 믿게 되어 있습니다. 수학방정식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명제가 옳은 것에 한해서만 가능합니다.”라 했습니다. 명제가 잘못되면 당연히 논리도 잘못된 것입니다.

 

실험도구를 사용하는 한

 

일곱번째 항에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ena)’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적 이론과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과학적 증거를 들어 말하면 곧이 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발견사실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밝혀진 것은 100% 올바른 관찰이라 볼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과학적 사실은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관찰되는데 실험도구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실험도구와 21세기 실험도구는 다릅니다. 따라서 결과도 다르게 나올 것입니다. 물질을 관찰하는 과학적 검증이 시대에 따라 뒤집어 지는 사례는 빈번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진리를 판별하려 합니다.

 

견해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여덟번째항에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yā)’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속적 철학이나 사회과학이론 같은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이즘(ism)으로 표현되는 주의(主義)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 민주주의를 말하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말하면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문학적 진리도 헛점이 있습니다.

 

관념론에서는 생각을 기본으로 하여 물질이 파생된 것이라고 보고, 반면에 물질론에 기반을 두면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 봅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학적 이론이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세속철학이나 사회과학적 이론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번 견해에 함몰되면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견해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가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습니다.

 

외도사상을 버려야 할 네 가지 이유

 

깔라마의 경은 꽤 긴 길이의 경입니다. 페이지로 따지면 10페이지 달합니다. 부처님과 깔라마인들과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고 반복문구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사외도와 같은 세속철학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진치 삼독을 오계와 연계하여 설명합니다. 외도들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탐욕과 성냄과 분노가 여전히 있어서 오계를 어기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삼독과 오계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삼독심제거는 무한계율에 속하는 것이고, 오계는 한정계율에 속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삼독을 오계와 엮어서 열 가지 끄달림에 대하여 버려야 할 이유를 네 가가지로 설명합니다.

 

ime dhammā akusalā, ime dhammā sāvajjā, ime dhammā viññūgarahit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ahitāya dukkhāya sa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pajaheyyāthā'ti iti yanta vutta idameta paicca vutta.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A3.65)

 

 

이것이 외도사상을 버려야 할 네 가지 이유입니다. 1) ‘악하고 불건전한 것 (akusalā)’이기 때문이고, 2) 양심 있는 자들에게 비난 받는 것(sāvajjā)’이기 때문이고, 3) ‘이익 되지 않은 것(viññūgarahitā)’이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4) ‘고통(dukkhā)’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그의 삶의 태도는 어떨까? 그 사람이 본래 착한 성품일지라도 업과 업의 과보, 그리고 내세와 윤회를 부정한다면 도덕적 삶을 살기 힘들 것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오계를 어기게 될 것입니다. 탐욕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다보면 번뇌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막행막식하며 즐기는 삶을 살지만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현세에서도 고통 받고, 더구나 내세에서는 악처에 떨어져 고통 받기 때문에 두 세계에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지 않은 그는 결국 악하고 불건전한 것 (akusalā)’비난 받는 것(sāvajjā)’이익 되지 않은 것(viññūgarahitā)’ ‘고통(dukkh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안을 제시하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의 특징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만을 이야기 했다면 염세주의자로 내몰렸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가르침도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길이다.”라 하여 네 가지 진리를 설함으로써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굴러 온 것입니다.

 

깔라마경에서도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것도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에게도 해당되는 대안입니다. 부처님은 사무량심을 설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말씀 하십니다.

 

 

“1) 만약 다른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있다면, ‘나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희망이 그가 얻는 첫 번째 안식입니다.

2) 만약 다른 세상이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없다면, ‘나는 세상에 현세에원한을 여의고 폭펵을 여의고 고뇌없이 행복하게 수호한다.’는 그것이 그가 얻는 두 번째 안식입니다.

3) 만약 악한 자가 악을 행하더라도 내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악을 행하지 않는 나에게 고통이 닥치겠는가?’라는 그것이 그가 얻는 세 번째 안식입니다.

4) 만약 악한 자가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나는 양자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그것이 그가 얻는 네 번째 안식입니다.”(A3.65)

 

 

이것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한을 여읜 마음, 폭력을 여읜 마음, 오염을 여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사유와 같은 말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S45.8)라는 가르침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항을 보면 단멸론자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정사유를 하면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설령 그가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는 단멸론자라 하더라도 그가 원한과 폭력과 오염을 여읜 청정한 마음을 가졌다면 악처에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단멸론자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그래도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이 안식을 줍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원한을 여의는 삶을 살면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세 번째 항은 인내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가했을 때 이에 일체 대응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부처님도 모욕을 많이 당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바라문의 욕설과 음식의 비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악꼬싸까의 경(S7.2)’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추악한 말로 비난하고 모욕을 주었을 때 부처님은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지거리하는 자에게 다시 욕지거리한다면, 바라문이여,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S7.2)

 

 

여기 한손에 숯불덩어리를 들고 있고 또 한손에는 똥을 들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나를 해코지 하고 모욕주려고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한쪽 손은 숯불로 타들어 갈 것이고, 또 한쪽 손은 똥냄새로 진동할 것입니다. 그가 차린 밥상을 받지 않으면 그 밥상은 그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S7.3)이라 하여 맞대응하면 이전투구하듯이 똑 같은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분노의 극복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제석천상윳따에서 꾸짖을 가치 없는 자를 꾸짖지 말라.”(S11.24)라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분노가 그대를 이기게 하지 말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S11.25)라 하여 상대방의 분노에 대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많은 모욕을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했지만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가 있어서 나에게 악을 행하더라도 내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악을 행하지 않는 나에게 고통이 닥치겠는가?” (A3.65)라며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맞은 사람이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다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조차 믿을 수 없다고?

 

어떤 자들은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후대에 문자화 되면서 편집되거나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특히 내세와 윤회를 부정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 앞에 명백히 드러난 것만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 만을 말씀 하셨을 뿐이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현세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업과 업의 작용에 따른 내세와 윤회의 가르침도 펼쳤습니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은 오늘날 빠알리니까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문자로 기록된 경전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설한 가르침은 제자들이 기억하고 외워서 오늘날 문자화 되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합송으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어느 한사람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날에는 문자화 되어 있어서 경전만 열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구전으로만 전승되었을 때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아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합송했을 때 오류는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 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해서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A4.180)

 

 

이와 같은 부처님 말씀은 깔라마의 경에서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A3.65)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스승이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여 곧이 곧대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스승의 말이라 해도 부처님 가르침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모든 것에 대하여 무상, , 무아, 부정으로 말했음에도 스승이 상, , , 정으로 완전히 반대로 말한다면 경과 율에 대조하여 어긋나면 그것을 물리쳐야 한다.” (A3.65)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까지 부정하면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즉각 알 수 있는 것

 

오늘날 깔라마의 경은 회의론자들에게 부처님 가르침과 경전을 왜곡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깔라마의 경을 잘못 이해하여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모순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 하여 법귀의와 자귀의를 말씀 하시면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해야 할 것은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구전으로 전승된 시기에 해당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관찰하는 수행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여래가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식별하기 위해 여래를 잘 관찰해야 한다.(M4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찰’은 스승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 맞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라고 하여 다 믿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행위와 견주어 보면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각적으로 검증가능합니다.”라 했습니다. 이는 깃발의 경에서 세존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훌륭하게 설해진 가르침이고, 현세에 유익한 가르침이고, 시간을 뛰어넘는 가르침이고,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고, 궁극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남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라 한 것에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의 말은 진실하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는 자입니다. 깨달은 자의 말은 진실합니다. 이는 금강경에서도 확인됩니다. 금강경에서  여래시진어자(如來是眞語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래라는 것은 진실된 말을 하는 사람이며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은 자의 말은 모두 진실만을 말하는 자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진실되지 않다는 말도 됩니다.

 

오로지 부처님만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승이라 부처님 말을 전한다고 해도 깨달은 자가 아니라면 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온갖 사상이 난무합니다. 가르침 아닌 것들도 매우 많습니다. 스승이라 하여 모두 믿을 것이 못됩니다. 스승이 말한 것이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기 보다 빠알리니까야에 근거하는 것인지 먼저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니까야(經藏)와 위나야(律藏)에 일치한다면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면 됩니다. 여기에 아비담마(論藏)에 근거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승의 삶의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며, 오계를 지키며, 사무량심으로 살아 간다면 진리의 말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종적으로 자기자신이 의지처

 

깔라마의 경을 잘못 해석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부처님 말씀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든가,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부처님 말씀은 아니다라고 깔라마의 경을 들어 말한다면 그는 불교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류나 의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면 전달자일 것입니다. 담마를 전달하는 자의 말에 오류가 없는지 경전을 대조하며 확인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오계를 지키며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자기자신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 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불교인들이 삼보에 귀의하여 피난처로 삼습니다. 또 불교인들은 가르침과 자기자신에 의지할 뿐 다른 것을 의지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자기자신이 의지처가 됩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도 자신이 하는 것이고, (magga)과 경지(phala)를 계발하여 성취하는 것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도와 과를 이룬 성자가 되었을 때 자기가 자기의 수호자가 되는 됩니다.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었을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가 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삼보에 귀의하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것 부터 시작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의지처로 합니다.

 

 

 

2018-04-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