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8. 2. 24. 11:13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고

 

 

배우는 것도 축복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님을 섬기고, 존경할 만한 님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59)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Sn.2.4)’에 실려 있는 게송입니다. 부처님이 쌉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타타삔디까 승원에 계실 때 하늘사람의 질문에 답한 첫 번째 게송입니다.

 

하늘사람은 하늘 나라 사람들과 인간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축복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로 시작되는 축복의 경을 설했습니다. 그 중에 세 번째 게송은 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1) 라 했습니다. 배우는 즐거움에 대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습니다. 논어에서도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하여,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로 회자 되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Khantī ca sovacassatā samaānañca dassana, Kālena dhammasākacchā eta magalamuttama.)”(Stn.265) 라 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은 행복이라는 말 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행복이 지금 여기서 즐거운 상태에 대한 의미가 강하지만, 축복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까지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식장이나 개업식에서 축하합니다.”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Stn.269)일것입니다. 현재의 성공뿐만 아니라 미래의 번영을 나타내는 말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망갈라숫따(magalasutta)’를 행복경이 아닌 축복경이라고 번역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망갈라는 말은 ‘auspicious; royal; lucky’의 뜻으로 길상(吉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2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 모임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수행자를 만나 가르침을 배우고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 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아니 행복을 넘어 축복입니다. 지금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성공과 번영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 모임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2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소위 삼종외도(三種外道)에 관한 경에 대하여 논의했습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 이교도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경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titthasutta, A3.61)’에 해당됩니다. 세 가지 이교도의 가르침, 즉 숙명론, 존우론, 무인론에 대하여 무작설(akiriya)’이라 하여 비판한 가르침입니다.

 

삼종외도(三種外道)에 대하여

 

무작설은 업과 업보를 부정한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거짓으로 들어나고 성립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인간의 행위를 무력하게 만들고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무작설은 오늘날 고등종교에도 교묘하게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경에서는 존우론(尊祐論)’으로 나타납니다. 존우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본다.”(A3.61)

 

 

삼종외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느낌이 등장합니다. 느낌에는 세 가지 느낌이 있는데 주로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괴롭다고 느낄 때 이런 고통과 불행이 어디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외도의 스승에 따르면 모든 것이 전생탓이라 하여 숙명론을 말하는 자가 있고, 모든 것은 절대자에 따른 것이라 하고, 또 모든 것은 원인없이 조건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 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책임 회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즐겁고 행복하면 하느님을 찬양하고, 지금 내가 괴롭고 힘들면 하느님의 뜻이다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느낌에 대하여 절대자 탓으로 돌리는 것을 존우화작설(issaranimmānahetuvāda)’이라 합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리는 것이 숙명론입니다. 숙작인설(pubbekatahetuvāda)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괴롭고 힘든 것에 대하여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린다면 우리들은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행위를 하던 전생의 업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A3.61)등으로 설명됩니다. 오계를 어겨도 전생 탓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계를 어기는 것에 있어서 삼종외도 모두 공통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존우화작설을 신봉하는 자라면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아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고” (A3.61)라 할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목사가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을 끌어 안고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인론자(ahetuvāda)를 말합니다. 무인론자에 따르면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그 원인이 없고 그 조건이 없을 것이고,..”(A3.61)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원인 없이 우연하게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인과도 갖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 술을 많이 마시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술 마시는 것을 즐기다 보니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전생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전생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업이 현생에 작용한 것으로 보는 숙작인설입니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고 책임회피이고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숙명론, 존우론, 무인론으로 돌리는 것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게을러서 생겨난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불교에 침투한 삼종외도

 

숙명론, 존우론, 무인론 소위 삼종외도설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깊숙히 침투해 있습니다. 특히 불교에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불교인이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렸을 때 이는 숙작인설에 해당됩니다. 어느 불교인이 변치 않은 참나가 있어서 우리의 모든 행위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을 존우론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죽으면 돌아간다라 하여 사대로 흩어지는 것을 주장 했을 때 유물론적 무인론이 될 수 있습니다.

 

삼종외도설은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결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낳는다는 이른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삼종외도에 대하여 무작설(無作說: akiriya)’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작설에 빠지는 것은 현실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즐거워도 무작설이 매력 있지만 현실이 불만족스러웠을 때,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현실이 불행할 때 삼종외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점집에 가서 점을 보고서 전생탓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시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불행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마음의 위안을 가져 보지만 그때뿐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면한 괴로움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이는 경의 말미에 부처님이 사성제(四聖諦)를 설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괴로움이든지 접촉으로부터

 

지금 괴롭고 불행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전생탓이라 할 수 있고 누구는 신의 섭리라 하고, 또 누군가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분석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여섯 가지 세계부터 설명했습니다.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접촉으로부터 괴로움이 발생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괴로움이든지 접촉으로 발생됩니다.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접촉 영역에서 발생합니다. 전생때문이라거나 절대자 탓이라나 우연히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상과 소리 등 여섯 가지 대상과 부딪쳤을 때 느낌이 발생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전생이나 절대자나 우연이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고 자신 있게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사성제로 귀결됩니다. 이는 사리뿟따존자가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M28)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교도의 삼종외도를 부수기 위한 여섯 감역의 가르침 역시 사성제로 귀결됩니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시험 볼 때 문제를 풀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지금 괴롭다고 하여 점집을 찾거나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선 나에게 당면한 괴로움이 무엇인지 괴로움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성제의 가장 첫 번째 진리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ida dukkhanti)’라고 분명히 아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면 그 다음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자는 문제를 푸는 일만 남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괴로움은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삼종외도설을 설명하면서 모든 괴로움은 접촉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했습니다. 접촉 없이는 괴로움이 발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접촉의 근원은 결국 이전에 지은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를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 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라 합니다.

 

업자정정견은  “착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사람이 업을 지으면, 어떠한 업을 짓든 간에, 그는 그 상속자이다.(Thag.144)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고, 또“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종외도에서는 업과 업의 과보를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배수진을 치듯이 번역에 임했습니다

 

수행자를 만나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부처님도 칭찬 하신 일로서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eta magalamuttama)”라 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Stn.269)라 했습니다. 니까야 강독모임에 참여 하여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 하는 것도 더 없는 축복일 것입니다.

 

전재성박사는 강독시간에 지난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오로지 번역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고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정교수가 되어 신분이 보장되고 정년이 보장 되어 안락한 삶을 살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수 십 권에 달하는 번역서를 내놓지 못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홍제동 자택에서 새벽에 일어나 고양에 있는 서고에 5시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저녁 8시까지 오로지 번역에 매진 하는데 주말도 없고 명절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하여 독일유학 시절 거지성자로 잘 알려져 있는 페터 노이야를 만나 9년 동안 같이 살게 된 것이 큰 원동력이었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가 독일 유학시절 만난 거지성자는 그때 당시 쾰른대학교 구내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속에서도 숲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페터 노이야르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늘 생각한 것은 부처님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이후 45년 동안 길에서 살며 길을 설하셨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정진하듯이 번역에 임했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70년대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바 있습니다. 이후에 늘 감시의 대상이 되어 도저히 한국에 살 수가 없어서 마치 도피하듯이 시작된 것이 독일유학생활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거지성자 페터 노이야르를 만나면서 인생이 180도 바뀌어 빠알리경전에 올인 하는 계기가 돠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지난 20년 동안 삶에 대하여 배수진을 치듯이 번역에 임했습니다.”라 했습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 설 수 없는 절박감으로 번역했고 그 때 마다 페터 노이야르와 부처님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고

 

작년 2월부터 니까야 강독모임이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 저녁에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번역일에 바쁨에도 매월 두 차례 강독모임을 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제까지 이룬 것에 대한 회향(廻向)’이라 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 함께 하는 것을 회향이라 합니다. 이런 회향에는 중생회향, 보리회향, 실제회향이라는 3종의 회향이 있는데 각자 자기가 지은 선근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는 보살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는 만큼 알려 주고 능력껏 지도하는 것도 훌륭한 회향이라고 봅니다.

 

회향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이득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재성박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부니까야를 완역했고, 쿳다까니까야 중의 상당수를 번역했고, 율장을 네 권 번역했고, 최근에는 청정도론을 완역 했는데 이런 공덕을 아낌 없이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 강독모임을 계속하는 이유라 봅니다. 또한 삼송역 부근에 널직한 서고가 있어서 모임을 갖기에 좋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매월 두 차례 열리는 강독모임 시간에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옵니다. 자주 얼굴 보다 보니 이제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담마를 듣도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고씽가 법문의 큰 경(M32)’에서 사리뿟따존자는 살라꽃이 만개한 고씽가 숲에서 아난다에게 어떤 수행승들이 이 고씽가 숲을 밝힐 수 있습니까?”(M32)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 세상에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쌓아나가는 수행승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도 착하고, 중간도 착하고, 끝도 착하고,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추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청정한 삶을 설하는 그러한 가르침들을 많이 배우고 기억하고 언어로써 습득하고 정신으로 탐구하고 견해로써 통찰했습니다. 그는 잠재적인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부대중에게 원활하고 유창한 언어로써 가르침을 말합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러한 수행승이 이 고씽가쌀라 숲을 밝힐 수 있습니다.(M32)

 


2018-02-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