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사람처럼 귀 먼 사람처럼
마음이 심란할 때 아무 경전이나 펼쳐봅니다. 틀림없이 마음을 정화시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경전을 열어 보아도 가르침은 한결같습니다. 가르침이 의지처이고 귀의처이고 피난처입니다.
많은 일을 하지 말라
테라가타를 펼쳤습니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마하 깟짜야나 존자의 팔련시집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하지 말라.
사람들을 멀리하고, 애쓰지 말라.
맛에 탐닉하여 번거로우면,
안락을 가져오는 의취를 놓친다.”(Thag.494)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처소를 수리하는 일 등 수행자의 삶을 사는 것과 거리가 먼 일에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사람들을 멀리하고, 애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무리와 사귀면 착하고 건전한 일이 줄어들고 악하고 불건전한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사람을 피하고,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구절을 보면 맛에 탐닉하면 번거롭다고 했습니다. 맛에 탐닉하여 맛에 대한 갈애에 사로잡힌 수행승은 필수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 속인과 교류하기 위해 애쓴다면, 행복과 불행으로 인하여 해야 할 일이 생겨나서 번거롭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구절에서 의취(attha)는 멈춤과 통찰과 길과 경지의 열반의 안락을 가져 오는 계행을 말합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있습니다. 출가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세속 사람들이나 하는 일을 해야 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도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가 하면 사람을 사귀는데 열중이라면 출가의 목적은 더욱 더 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 했습니다.
세속적 정견이란?
“가정에서 예배와 공양을 받지만,
그것을 ‘진흙수렁’이라고 알아야 한다.
날카로운 화살은 뽑기 어렵고,
공경 받는 것은 악인이 버리기 어렵다.” (Thag.495)
“죽어야만 하는 자의 악한 업은
타자에 의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
뭇삶은 업의 친척이기 때문이다.” (Thag.496)
부처님의 업자성정견(kammassakatādiṭṭhi)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AN.III.75)라는 견해를 말하는데 이를 세속적 정견이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는
“타인의 말에 의해서 도둑이 아니고
타인의 말에 의해서 성자가 아니다.
자신에 대하여 아는 대로
그대로 하늘사람들도 그것을 안다.” (Thag.497)
숫따니빠따 바셋타의 경에 따르면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된다.”(Stn.651)라고 했습니다. 그가 도둑질 하면 도둑이라 부를 것입니다. 그가 성자인 것은 말해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청정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 때문에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자신에 대하여 아는 대로’라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자신이 청정한지 청정하지 않은지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는 나 자신이 잘 알지 타인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한점 티끌도 없이 청정해졌을 때 스스로 알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됩니다.
현자들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이 그것을 알면,
그 때문에 그들의 싸움이 그친다.” (Thag.498)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늙고 병들고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허송세월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현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 잘못과 잘못이 아닌 것의 업보, 신체의 부정, 형성의 무상을 모릅니다. 그래서 범부라는 뜻에서 ‘다른 사람들(pare)’이라 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이 최상
“지혜가 있는 자라면
재산을 잃어도 산다.
지혜를 얻지 못하면,
재산이 있어도 살지 못한다.” (Thag.499)
재산을 잃어도 지혜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지혜가 있는 자는 이러저러한 정신적 만족을 통해서 만족하게 살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소욕지족의 삶을 살면 재산이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이 세상에서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다. 진실이 맛 중의 맛이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Stn.182)라 하여 지혜로운 삶이 최상임을 말합니다. 이런 지혜는 찰성재(七聖財)중의 하나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칠성재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다네”(A7.6)라 했습니다. 지혜야말로 최상의 재산임을 말합니다.
눈 먼 사람처럼 귀 먼 사람처럼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Thag.499)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 (Thag.501)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불신풍조를 조장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눈 있는 자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 보일 때에 눈 먼 자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해야 하고, 귀 있는 자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 들릴 때에 귀먹은 자가 못 들은 것처럼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때로 장님이나 벙어리처럼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말에 밝은 자라도 말해서는 안 될 것에 벙어리처럼 되어야 하고, 힘센 자라도 안 될 일에 대해서는 허약한 자, 무능한 자처럼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힘이 세 지면
사람들은 힘이 세 지면 이를 과시하고자 합니다. 폭력배가 주먹이 근질근질한 것과 같습니다. 부자가 되면 그 힘으로 명예를 성취하고자 하고 권력을 넘보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치면 파국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기 많이 아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이곳저곳에서 참견하며 잘난 체합니다. 그러나 화를 당하면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신체가 건강하면 건강을 믿고 무절제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건강을 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힘만 믿고 힘으로 다스리려 한다면 악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내하면 선업을 짓게 됩니다. 힘이 있어도 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가 힘이 있다면 얼마나 힘이 있고, 그가 아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더 힘 있고 더 많이 아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금 힘있고 조금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조금 힘있는 것을 행사하려 한다거나, 조금 아는 것을 아는 채 하려 한다면 불선업을 짓게 됩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결국 죽음의 침상(matasāyika)에 눕게 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힘이 있어 힘으로 산 사람, 눈이 있어 눈으로 산 사람, 귀가 있어 귀로 산 사람은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또 다시 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힘이 세도 허약한 자처럼, 밝은 눈이 있어도 장님처럼, 밝은 귀가 있어도 벙어리처럼, 부자이어도 가난한 자처럼, 많이 알아도 바보처럼 사는 자는 완전한 적멸에 들 것입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눈 먼 것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귀로 벙어리처럼 보이고,
날카로운 지혜로 무디게 보이고,
날카로운 의취로 멍청하게 보이니,
생각건대, 적멸이 옳으니, 사려깊게 휴식을 취하리.”(SV.370)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자신을 드러내야 하리.
현자는 참모임 가운데 있어도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리.” (Thag.582)
2018-07-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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