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소녀였을 때, 신들의 제왕 경배를 받은 쑤바 깜마라디따 장로니
지난 주 고향에서 사촌들을 만났습니다. 손위 사촌은 주식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취직이 되지 않자 소일거리로 주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온갖 감각적 욕망이 투영된 장으로 그 위험성을 알기에 그만 둘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 모증권회사 공매도가 보도 되었습니다. 그들끼리 에스엔에스로 소통한 문자를 보니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한 느낌입니다. 돈에 눈이 먼 자들이 유령주식을 팔고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발각되어서 감옥 2년 살아도 이익이 50억이라면 해볼만한 장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증권회사 직원들은 순간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오로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에 매몰된 것입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돈은 온데 간데 없고 지은 업으로 인한 괴로움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금세공사의 딸
현자들은 감각적 욕망의 위험을 알았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감각적 욕망의 위험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테리가타 이십련시집에 실려 있는 ‘쑤바 깜마라디따 장로니의 게송(Subhākammāradhītutherīgāthā)’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전에 가르침을 들을 때
나는 깨끗한 옷을 입은 소녀였다.
방일하지 않은 나에게
진리에 대한 꿰뚫음이 생겨났다.”(Thig.338)
쑤바 깜마라디따 장로니가 출가하기 전의 일을 회상하며 지은 시입니다. 소녀 시절에 이미 ‘진리에 대한 꿰뚫음이 생겨났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로 시작되는 사성제를 말합니다. 그런 장로니는 이미 전생에서부터 선업공덕을 닦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그녀는 이전의 부처님들 아래에서 덕성을 닦았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이러저러한 생에서 해탈을 위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를 심고 해탈의 자량을 키우면서, 좋은 곳을 윤회하다가 궁극적인 앎이 성숙하자,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라자가하 시의 금세공사의 딸로 태어났다.”(ThigA.215)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미모를 갖추어 아름다웠기 때문에 ‘쑤바(Subhā)’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점차 성년이 되어 부처님이 라자가하 시로 들어 가실 때에 청정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 가서 예경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녀의 정신능력이 성숙한 것을 알고서는 네 가지 진리(四聖諦)를 포함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흐름에 든 경지가 되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불쾌를
그녀는 재가생활에서 위험을 보았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사는 재가의 잘못을 보고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출가했습니다. 그년 보다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친척들이 가끔 찾아와서 환속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이나 재산을 가지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누리는 생활이 최상으로 여겼습니다.
수행녀는 친척들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녀는 재가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위험을 설명하면서 ‘예전에 소녀였을 때’라는 스물 네 편의 시를 지어 그들에게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강력한 불쾌를 느끼고
개체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보고
오로지 나는 멀리 여읨만을 원했다.” (Thig.339)
장로니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에서 강한 불쾌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세속에서 일반사람들이 하는 말과 정반대입니다. 대체로 세상사람들은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을 말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감각적 욕망의 대상이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 지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을 즐거운 것이라 여겨 집착하지만 그것들이 소멸될 때에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강력한 불쾌를 느낀다.”(Thig.339)라고 했습니다.
오욕락은 세상사람들이 원하고, 사랑스러워 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꿰뚫은 제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인간들 뿐만 아니라 천신들에 대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해서 강하게 극도로 불쾌감과 혐오감을 얻었다.”(ThigA.224)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금과 은을 지녀서는 안된다
“친지의 무리와 하인들과 일꾼들과
부유한 마을들과 밭들,
기쁘고 즐길 만 한 것들을 버리고,
적지 않은 재산을 버리고 나는 출가했다.” (Thig.340)
“이처럼 잘 설해진 올바른 가르침에
믿음으로 멀리 여읨을 이루어
금이나 은을 버렸는데.
그것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나에게 옳은 일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Thig.341)
“은이나 금은
깨달음이나 적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수행자에게 적당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귀한 재물이 아니다.” (Thig.342)
장로니는 금과 은을 지녀서는 안됨을 말합니다. 금과 은은 오늘날로 말하면 돈입니다. 한마디로 돈을 받지도 말고 지녀서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율장에 따르면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금과 은은 받아서는 안됩니다.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이미 보석과 황금을 버렸고 금과 은을 떠났습니다.”(Vin.II.294)라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금과 은을 지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재물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섯 가지 고귀한 재물로서 “1)믿음의 재물, 2) 계행의 재물, 3) 배움의 재물, 4) 보시의 재물, 5) 지혜의 재물”(A3.47)을 말합니다. 이런 재물은 얼마든지 많이 가져도 좋습니다. 이 중에서 지혜의 재물에 대한 것을 보면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어 고귀한 꿰뚫음으로 올바로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지혜를 지닌다. 수행승들이여, 지혜의 재물이란 이와 같다.” (A3.47)라 했습니다.
재물의 감옥에 갇혀
“그것은 탐욕이고, 광기이고,
우치이고, 티끌의 증장이다.
의혹이고, 커다란 곤경이다.
거기에는 견고가 없고 확립이 없다.” (Thig.343)
그것에 탐닉하고, 방일하여,
마음이 오염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며
널리 싸움을 일삼는다.” (Thig.344)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탐닉하는 자에게는
살해, 포박, 처벌, 상실, 슬픔, 비탄과 같은
많은 불행이 보인다.” (Thig.345)
세속적 재물에 대한 위험을 말한 것입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광기라했는데 이는 미친짓임을 말합니다. 더구나 곤경이라 했는데, 이는 “획득한 자에게는 의혹을 야기시키고, 사람의 보호 등 때문에 커다란 곤경인 것이다.”(ThigA.225)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재산을 많이 소유함으로 인하여 더 고통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재산을 모으는 것도 어렵지만 지켜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훔쳐 갈 까 봐 담을 높이고 경계를 강화한다면 스스로 재물의 감옥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가족간에 분쟁의 씨앗이 되기 쉽습니다. 게송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며 널리 싸움을 일삼는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 ‘괴로움의 다발에 대한 작은 경’에서 “어머니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어머니와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아버지와 싸우고, 형제가 형제와 싸우고, 형제가 자매와 싸우고, 자매가 형제와 싸우고, 동료와 동료가 싸운다.”(M1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족간에 재산다툼이 일어나면 형제자매간은 물론 부모와 자식간에도 싸웁니다. 그것도 피터지게 싸웁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그리하여 그들은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봅니다.” (M14)라 했습니다. 재산다툼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그런 재산은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은 항상 “살해, 포박, 처벌, 상실, 슬픔, 비탄과 같은 많은 불행이 보인다.” (Thig.345)라고 했습니다. 불행해지고 싶거든 감각적 욕망을 즐기면 될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보고
“친지들이여, 그대들은 왜 나를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일으키도록 충동하는가?
내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두려움을 보고 출가한 것은 그대들도 안다.” (Thig.346)
“금화나 황금으로
번뇌가 파괴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들은
적이고, 살인자이고, 원수이고,
밧줄로 포박하는 자이다.” (Thig.347)
“친지들이여, 그대들은 적들처럼
왜 나를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뜨리는가?
내가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출가한 것을 그대들은 알고 있다.” (Thig.348)
게송에서 “금화나 황금으로 번뇌가 파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재산을 많이 가지면 행복은 저절로 오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출가의 경’에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의 재난을 보고 출가한 것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감각적 욕망의 재난의 위험성도 커집니다. 결국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데 이를 “적이고, 살인자이고, 원수이고, 밧줄로 포박하는 자이다.” (Thig.347)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익을 가져 오지 않는 것으로 자애가 없기 때문에 적이고, 죽음의 원인으로 칼을 들어 살해하는 자이기 때문에 살인자이고, 불행을 가져오는 적대적 행위로 인해서 원수이고, 탐욕 등의 밧줄로 포박하는 자이다.”(ThigA.226)라 했습니다.
불의 다발과 같은 괴로움
“남겨진 음식,
이삭줍기, 그리고 분소의
그것이 나에게 알맞고
출가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Thig.349)
“위대한 선인들은 천상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렸다.
안온의 상태 가운데 해탈하였으니,
그들은 동요 없는 지복을 성취했다.” (Thig.350)
“피난처가 없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만나지 않기를 나는 바라니,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적이며 살인자이니,
불의 다발과 같은 괴로움이다.” (Thig.35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불의 다발과 같은 괴로움’이라 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불더미의 비유에 대한 경(A7.72)’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수행승에 대하여 “부드럽고 아름다운 수족을 지닌 왕족이나 소녀나 바라문의 소녀나 장자의 소녀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보다, 저 연소하고 작열하는 불꽃 튀는 커다란 불더미를 포옹하여 곁에 앉거나 곁에 눕는 것이 더 낫다.” (A7.72)라 했습니다. 왜 그런가? 이는 “그 때문에 그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지만, 그러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는 않는다.” (A7.7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여
“이러한 탐욕은 장애로 가득하고
공포로 가득하고 고뇌로 가득하고
형극으로 가득하고
아주 위험스런 것으로 크나큰 우치의 원인이다.” (Thig.352)
“감각적 쾌락의 욕망들은
공포스런 공격과 같고
뱀의 머리와 같으나,
어리석고 눈먼 일반사람들은 그것들을 즐긴다.” (Thig.353)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라는
진흙탕에 사로잡혔으니,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무지하다.
삶과 죽음의 끝을 그들은 곧바로 알지 못한다.” (Thig.354)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 합니다. 또 크나큰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이런 위험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오욕락을 즐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중생에 대하여 진흙탕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대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것 감각적 욕망이나 마음껏 누리고 죽자.’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삶과 죽음의 끝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이라 합니다.
테리가타 127번 게송에 “오고 가는 것의 길을 그대는 알지 못하니, 그 뭇삶이 어디서 왔는지, 그대는 ‘나의 아들’이라고 울부짓는다.”(Thig.127)라 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중생들은 여기로 온 길도 모르고 가는 길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면 현세에서도 괴롭고,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내세에서도 괴로울 것이라는 것을 현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 행복이여, 오! 행복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 때문에
나쁜 존재의 길로 나아가며
자신의 질병을 가져다주는 길로
사람들은 다양하게 걸어간다.” (Thig.355)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적의를 낳는 것, 고뇌를 주는 것,
오염시키는 것, 세속의 미끼,
결박시키는 것, 죽음의 속박이다.” (Thig.356)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광기를 일으키고, 속이고,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으로
뭇삶을 오염시키기 위해
악마가 펴놓은 그물이다.” (Thig.357)
어떤 이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말합니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즐기고, 귀가 있어서 소리를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코와 혀가 있어서 맛을 즐기는 것과 같고, 몸이 있어서 감촉을 즐길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를 말합니다.
갈애는 아무리 마셔도 갈증나는 것과 같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갈증이 생겨 더 큰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이런 이유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때문에 나쁜 존재의 길로 나아가며”라 했는데, 여기서 나쁜 존재의 길(duggatigamana)’은 지옥 등과 같은 악처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오욕락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속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이 왜 속이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오, 행복이여, 오! 행복이여.”라고 점점 말함으로써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복론은 광기이고 마음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욕락의 행복론을 주장하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중생을 “악마가 펴놓은 그물이다. (khipaṃ mārena oḍḍitaṃ)” (Thig.357)라 했습니다.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끝없는 위험이고, 고통은 많고, 해독은 크고,
쾌미는 적을 뿐, 갈등을 만들고,
밝은 덕성을 해치는 것이다.” (Thig.358)
“감각적 쾌락으로 원인으로
그처럼 내가 불운을 겪고 나서
항상 나는 열반을 기뻐했으니,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리.” (Thig.359)
“청량한 상태를 바라는 자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전장을 건넜으니,
그 결박이 부수어진 가운데
나는 방일하지 않고 지내리라.” (Thig.360)
장로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렸습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했습니다. 마침내 열반을 성취했을 때 이미 저언덕으로 건너 갔습니다. 다시는 이 언덕으로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리.” (Thig.359)라 한 것입니다. 그곳이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의 세계, 즉 욕계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외아들을 출가시켰습니다. 유산을 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라훌라를 출가시킴으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유산을 물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 이상 최고의 유산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린 라훌라에게 “세속에 돌아가지 말라.”(Stn.339)라 했습니다. 다시는 욕망의 세계에 발을 딛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빚이 없는 자유민
“슬픔도 없고, 티끌도 없이
안온한, 여덟 가지 고귀한 길,
위대한 선인께서 건너간
곧바른 그 길을 따르리라.” (Thig.361)
“진리에 입각해 있는
이 황금세공사의 딸 ‘쑤바’를 보라.
부동(不動)을 성취하여
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있다.” (Thig.362)
금세공사의 딸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한지 여드레째가 되는 날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장로니가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보여 주며 “이 빚이 없는 자유민, 감각능력을 닦은 수행녀는 일체의 멍에를 풀어버리고 해야 할 일을 다 해마치고 번뇌를 여의었다.” (Thig.364)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아라한이 된 장로니에 대하여 ‘빚이 없는 자유민(Sāyaṃ bhujissā anaṇā)’ 이라 했습니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 등의 빚이 없어 빚 없는 자이고 노예의 상태와 같은 오염을 버렸기 때문에 자유민이다.”(ThigA.228)라 합니다.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대자유인입니다.
정법만나기 좋은 시기는
장로니 쑤바 깜마라디따는 출가한지 8일만에 거룩한 님,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전 생에서 선업공덕을 쌓고 수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서 깨닫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선업공덕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이러저러한 생에서 해탈을 위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를 심고 해탈의 자량을 키우면서, 좋은 곳을 윤회하다가 궁극적인 앎이 성숙한다.” (ThigA.215)라는 게송의 인연담에서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생에 걸쳐서 공덕을 쌓고 수행을 해야만 그 과보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정법만나기 좋은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청정한 삶을 사는데 단 하나의 올바른 시간, 올바른 시기가 있다.” (A8.29)라고 말씀 하시면서 열 가지 덕행을 갖추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시기라 합니다. 이와 아울러 “그리고 이 사람이 중앙지역에 태어나 지혜를 갖추어 둔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아 잘 설해진 것과 잘못 설해진 것을 구분할 줄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청정한 삶을 사는데 단 하나 올바른 시간, 올바른 시기이다.”(A8.29)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장로니 쑤바 깜마라디따는 좋은 시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경배를 받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여성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장로니는 소녀시절이었을 때 부처님을 만나 뵙고 출가하여 여드레만에 거룩한 님,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인간은 물론 신들로부터도 공경의 대상이 됩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아라한의 다섯 가지 공덕에 대한 설명 중에서 “지혜의 칼로 윤회의 바퀴살들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의 주인을 아라한이라 부른다.”(Vism.7.22)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서 아라한은 최상의 공양을 받을만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천신들도 예경의 대상입니다. 그래서일까 24연 게송에서 가장 마지막에 제석천이 예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석천은 세 가지 감각적 쾌락의 존재 가운데서 중생의 주인이고 주재자입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번뇌가 다한 세상의 주인 장로니에게 다음과 같이 경배합니다.
“생류의 주님인 제석천은
천신들의 무리와 함께
초월적인 힘으로 다가와서
황금세공사의 딸, 쑤바에게 예경했다.”(Thig.365)
2018-07-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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