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타인의 얼굴이나 입만 쳐다 보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9. 25. 11:28

 

타인의 얼굴이나 입만 쳐다 보는 사람



빠알리니까야를 알게 된 것은

 

빠알리니까야를 알게 된 것은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행운입니다. 한국명상원에서 묘원법사로부터 매주 토요일 법문을 들은 것이 시발점입니다. 2008년 끝자락 부터 2009년까지 50회 이상 일년을 다녔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십이연기(paticcasamuppada)’를 교재로 하여 매주 조금씩 진도를 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법문이 끝나면 경행과 좌선을 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인터뷰시간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시작 된 법문은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2005년 블로그를 만들고 2006년부터 글을 쓴 이래 무엇이든지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록합니다. 여행기 기록이 가장 쉽습니다. 2008년도 한국명상원에 처음 나갔을 때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한국위빠사나선원이라 했습니다. 첫날 나간 소감문을 [빠사나 수행기1] 나도 수행을 있을까’(2008-12-28)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나고 나니 세월이 10년 흘러갔습니다. 그때 당시 마지막 문단에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거나 머리로 이해 하려는 것과 수행과는 다를 것이다. 나에게도 인터뷰 하는 사람처럼 특별한 체험을 느낄 수 있을지 또는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 이었던 가를 느낄 날이 올 수 있을까.”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특별한 체험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2006년 이래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글쓰기는 생활화 되어서 글쓰기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구업(口業)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멈출 수 없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무언가 해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 하면서 얻어진 것이 많습니다.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흔히 말하는 팔만사천법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빠알리니까야를 펼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마력이라 여겨집니다.

 

인드라의 기둥에 대하여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들은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했습니다. 체계적이어서 서로 맞물려 돌아감을 말합니다. 이는 니까야를 읽어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같은 이야기로라도 더 상세하게 설명된 니까야가 있는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숫따니빠따에 보배의 경’(Sn.2.1)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Yathindakhīlo pahavisito siyā        야틴다키-로 빠타윙시또 시야-
Catubbhi v
ātehi asampakampiyo,          짜뚭비 와-떼히 아삼빠깜삐요
Tath
ūpama sappurisa vadāmi           따투-빠망 삽뿌리상 와다-
Yo ariyasacc
āni avecca passati,         요 아리야삿짜-니 아웻짜 빳사띠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마치 단단한 기둥이 땅위에 서 있으면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거룩한 진리를 보는 참사람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합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Stn.229)

 

 

보배경은 늘 애송하는 게송입니다. 특히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이미우이음악을 들으며 갑니다. 빠알리어로도 모두 외운 바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기도 한 이 경은 우리말로 보배의 경또는 한역으로 보석경(寶石經)’이라 합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고귀한 승가를 보석으로 알아 이를 찬탄하고 예경하는 삼보예찬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체계적이라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7 56번 주제 진리의 모음을 보다가 유사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보배의 경여덟 번째 게송에 실려 있는 단단한 기둥(indakhīlo)’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 인드라의 기둥의 경’(S56.39)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쇠기둥이나 인드라의 기둥은 뿌리가 깊고 잘 매몰되어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동쪽에서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쳐도 움직이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서쪽에서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쳐도 움직이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북쪽에서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쳐도 움직이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남쪽에서 커다란 비바람이 몰아쳐도 움직이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인드라의 기둥은 뿌리가 깊고 잘 묻혀 있기 때문이니다.”(S56.39)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사성제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가벼운 솜이나 면화는 바람을 받는 평평한 땅 위에 두면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날리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날릴 것입니다. 북풍과 남풍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가볍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기둥은 바람에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를 경에서는 쇠기둥이나 인드라의 기둥이라 했습니다.

 

쇠기둥이나 인드라의 기둥은 빠알리어 ‘ayokhīlo vā indakhīlo’를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ayokhīlo‘iron stake’의 뜻으로 쇠기둥이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indakhīlo’라는 말인데 이를 전재성박사는 인드라의 기둥이라 번역했습니다.

 

인드라의 기둥이라는 뜻의 인다킬라(indakhīla)는 영어로는 ‘A threshold, a large slab of stone let into the ground at the entrance of a house; a pillar in front of a city gate’로 설명됩니다. 집 입구에 있는 문턱이나 성문 앞에 있는 석주를 뜻합니다. 아마 말을 매우 두기 위한 용도일지 모릅니다.

 

이처럼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석주에 대하여 indakhīlo라 했는데 이는 보배의 경에서 언급되어 있는 ‘Yathindakhīlo’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서로 연계 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는 것은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음이 틀림 없음을 확인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에서 설명된 것이 다른 경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설명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석주를 뜻하는 인다킬라(indakhīla)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배경에서는 인다킬라에 대하여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거룩한 진리를 보는 참사람은 이와 같다.”(Stn.229)라 했습니다. 이 구절은 정확하게 상윳따니까야 인드라 기둥의 경’(S56.39)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시스터메틱 하지 않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을까? 사성제에 대하여 인드라의 기둥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자들이라도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면, 그들은 이 존자는 틀림없이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의 얼굴을 쳐다 보지 않는다.”(S56.39)

 

 

핵심구절은 이 존자는 틀림없이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aya nuna bhava jāna jānāti passa passatī)”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알고 봄에 대한 것은 한역으로 지()와 견()에 대한 것입니다. 경에서는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라 했는데 이는 ‘jāna jānāti passa passatī를 번역한 것입니다. 대상을 제대로 알면 제대로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제대로 알고 제대로 보는 것에 대하여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것(yathābhūta pajānanti)’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입니다. 경에서는 바람에 휘날리는 면화와 바람에 영향받지 않는 인드라의 기둥을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로 시작 되는 사성제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바람부는 대로 날라가는 사람같습니다. 외도의 스승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 했을 때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이 존자는 틀림없이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의 얼굴을 본다.”(S56.39)라 한 것입니다.

 

타인의 얼굴이나 입만 쳐다 보는 사람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의 눈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에 따라 흔들립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면 또 옳은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가벼운 면화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자신의 눈으로 알고 본다고 해도 그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눈이 없는 자는 타인의 얼굴이나 입만 쳐다 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은 이 존자는 틀림없이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의 얼굴을 본다.”(S56.39)라 한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 하신 가르침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거룩한 진리이다.’라 했을 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생, , , 사의 가르침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라고 오취온이 괴로움이라 했을 때 부정할 자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문앞에 서 있는 석주처럼 단단한 것입니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대입 해 보면 틀림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로서 부처님이 설한 네 가지에 대하여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지혜의 눈이 열린 자에게 부처님은 그들은 이 존자는 틀림없이 알아서 알고, 보아서 본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의 얼굴을 쳐다 보지 않는다.”(S56.39)라 한 것입니다.

 

 

2018-09-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