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거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8. 9. 19. 12:17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거나

 

 

네 가지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Acinteyyasutta)’(A4.77)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부처님들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선정자들의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대한 사변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

 

 





부처님은 네 가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들의 경계(buddhavisayo), 선정의 경계(jhānavisayo), 행위의 과보(kammavipāko), 세상에 대한 사변(lokacintā)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부처님들의 경계(buddhavisayo)에 대하여

 

범부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첫 번째는 부처님들의 경계(buddhavisayo)’입니다. 부처님들의 경계(佛境界)는 부처님의 힘과 지혜의 정도를 말합니다. 일체지자 (sabbaññū)로서의 부처님의 지혜와 덕성에 대해서는 부처님들 외에는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물며 범부가 알리 없을 것입니다.

 

우다나에 따르면 빠세나디왕은 외도의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님과 거룩한 길에 들어선 가운데 어떤 쪽입니까?”(Ud.60)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 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국에서 나는 화환과 향수와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Ud.64, S3.11, A4.192)

 

 

깨달은 자만이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욕계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는 욕망을 극복한 자를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왕처럼 감각적 욕망을 즐기며 사는 자에게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라 한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모두 발아래로 세상이 보입니다. 산 밑에 있는 자는 다 볼 수 없습니다. 바둑에서 고수는 수를 순식간에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수는 몇 시간을 주어도 읽지 못합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자는 모든 것을 한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부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깨달은 자인지 판단 됩니다. 그가 여전히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


부처님의 경계는 일체지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알라바까의 경’(S10.12)에 따르면 아챠 알라바까는 부처님에게 수행자여,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그대가 내게 대답을 못하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지겠소.” (S10.12)라고 협박하듯이 말합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의 지혜와 견줄만한 자가 없습니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야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벗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내 마음을 산란케 하고 내 심장을 찢고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질만한 자를 아직 보지 못했소. 친구여, 그대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S10.12)

 

 

이 구절은 숫따니빠따 알라바까의 경’(Sn1.8)과도 병행합니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라바까에게 그대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유는 주석에 따르면 벽지불이나 상수제자나 큰 제자들은 갖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일체지자인 부처님들만이 무엇이나 물어 보시오.”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부가 부처님들의 경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경계를 알려고 한다면, 이는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럽게 될 것이라 합니다.

 

선정의 경계(jhānavisayo)에 대하여

 

범부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두 번째는 선정의 경계(jhānavisayo)’입니다. 범부는 선정의 경계도 알 수 없습니다. 교학승도 수행승의 선정의 경지를 알 수 없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 따르면 교만한 교학승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에 대하여 ‘우리는 선정에 든다. 우리는 선정에 든다.’라고 선정에 들고 명상에 든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라며 비난하고 헐뜯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정체험을 해보지 않는 자는 선정의 맛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범부들은선정체험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는 율장 비구계에서 승단추방죄법 제4조인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의 가르침(Uttarimanussadhammasikhāpada)’(Vin.III.87)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율장비구계에 따르면 네 가지 선정을 포함하여 사향사과 등을 성취한 것처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사칭하는 것은 이득을 위해서입니다.

 

부처님 당시 기근이 들어 탁발해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일단의 수행승들이 재가신자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선정에 들지 않았음에도 선정에 들었다고 말하고, 도와 과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재가신자들은 아낀 음식을 내 놓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이 알게 되자 이렇게 훈계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적절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찌 그대들은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재가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남은 상태를 성취한 것이라고 찬탄할 수 있단 말인가?” (Vin.III.87)

 

 

깨달음을 사칭한 수행승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범부들은 그 경지에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의 말만 믿고 아끼던 음식을 내 놓았습니다. 이런 사례는 오늘날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가 선정에 들었다.’거나 내가 수다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인간을 뛰어넘는 것을 사칭하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칭하는 자는 최상의 도둑

 

인간을 뛰어넘는 것(uttarimanussadhamma)을 사칭하는 것은 승단추방죄에 해당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도둑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율장 승단추방죄를 보면 오계 중에서 거짓말 대신 인간을 뛰어넘는 것을 사칭하는 것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승단추방죄법을 보면 제1조가 성접교섭에 대한 학습계율이고, 2조가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에 대한 학습계율이고, 3조가 인체살해에 대한 학습계율이고, 마지막으로 제4조는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입니다. 여기서 승단추방죄법 제1조는 불사음에 대한 것이고, 2조는 불투도에 대한 것이고, 3조는 불살생에 대한 것이고, 4조가 불망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제4조를 보면 불망어라 하지 않고 인간을 뛰어넘는 것에 대하여 사칭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칭이라는 말은 거짓말을 뜻합니다. 동시에 도둑질도 됩니다. 율장비구계에서 부처님은 제4조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했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큰 도둑이다.” (Vin.III.90)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사칭하는 죄는 오계에서 불망어죄와 불투도죄를 동시에 어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칭하여 이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 즉 선정 등의 상태를 범부들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알려고 한다면 그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미쳐 버리거나 곤혹에 빠질 것이라 했습니다.

 

행위의 과보(kammavipāko)에 대하여

 

범부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세 번째는 행위의 과보(kammavipāko)’입니다. 범부들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알 수 없는 것은 업이 언제 익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위를 했을 때 과보가 즉각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무르 익어야 과보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금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행위를 했을 때 과보가 현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다음생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먼 미래 생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은 행위는 조건이 맞아야 과보로 나타납니다. 이를 업이숙(業異熟: kammavipāka)이라 합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는 익어야 나타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발생입니다.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도 괴로움을 겪을 만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즐거움도 조건이 맞아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생에 저질렀던 악행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이유

 

업과 업보의 법칙에 따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언젠가 과보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업보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도 지은 업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과거 전생에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업보가 어떤 조건을 만나 어떻게 익어 과보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을 보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stn.574)라 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자신이 지은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지은 업으로 인해 태어날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 죽음에 정복당해 전율하는 뭇삶들을 보십시오.”(stn.587)라 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지은 업으로 살아 갑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업과 업의 과보가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끝을 통찰해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웁니다.”(stn.587)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모르는 자는업과 업이 작용하는 법칙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범부가 업과 업보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려 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변(lokacintā)에 대하여

 

범부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네 번째는 세상에 대한 사변(lokacintā)’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변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누가 달과 해를 만들었는가?’라든가 누가 망고나 참깨나 야자를 만들었는가?’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의문이나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S12.35)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S12.35)라 했습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수행승이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하거나 수행승이여, ‘존재와 존재하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른 것이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다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S12.35)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철학에 호기심 많은 부처님의 제자 말룽끼야뿟따가 세상은 영원한가?’ (M63) 등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을 때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식으로 질문했다면 이는 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도 없이 끊임 없이 논쟁만 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다 보면

 

상윳따니까야에 ‘세속철학의 경(S12.48)’이 있습니다. 세속철학을 신봉하는 바라문이 “모든 것은 존재합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첫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S12.48)이라 하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답을 듣지 못한 바라문은 이번에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며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S12.48)라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질문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에도, 네 번째 질문 “모든 것은 다양합니까?”에도 세속철학이라 하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철학이라는 말은 로까야띠까(lokāyatika)를 번역한 말입니다. 빠알리어 로까야따(lokāyata)는 한역으로 ‘순세파(順世派)’라 합니다. 순세(lokāyata)라는 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주론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로까야따라는 말은 “세상을 논의의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대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보잘 것 없는 삿된 견해일 뿐이다.(SA.ii.76)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등 10가지 사변적 견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로까야따(順世派)의 견해입니다. 이와 같은 10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철학은 논의의 대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세속철학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로까야따(세상이치)라 불리는 것은 [이 이론을 따르면] 세상은 미래의 이로움을 위해서 노력도 하지 않게 되고 향상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중생들은 공덕을 지을 마음조차 내지 못하기에 노력은 까마득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SAT.ii.76)라 했습니다.

 

복주석에 따르면 로까야따는 유물론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유물론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합니다. 결국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다 보면 허무주의적 견해로 귀결되어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사변을 한다면 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미쳐 버리거나 곤혹스러워 할 것이라 했습니다.

 

생각으로 알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종종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또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이 나래를 펴면 허공에 집을 짓습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6)에서는 희론(papañca)이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망상입니다.

 

망상은 사유를 토대로 일어납니다. 사유가 확장된 것이 망상입니다. 이와 같은 망상이 다름 아닌 네 가지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들의 경계를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 선정의 경계를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 행위의 과보를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 세상에 대한 사변을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 네 가지를 단지 생각으로 알려고 한다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에 빠질 것이라 합니다.

 

 

2018-09-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