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전과 붙퇴전을 거듭하며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Dhp.67)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법구경 ‘어리석은 자의 품’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행한 뒤에 후회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회상하는 순간에 후회스럽고 비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미래에 비참한 운명의 상태의 태어남을 가져오므로, 그 결과가 고통스러운 행위는 훌륭한 것이 아니고 칭찬할만한 것도 아니고 유익한 것도 아니다.”(DhpA.II.45)라 합니다.
행한 다음에 후회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도 눈물 흘릴 정도라면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행한 뒤에는 후회하지 않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결과를 초래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영입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입니다. 지금 여기서 과거를 회상 했을 때 “현세가 기쁨의 감동으로 환희하고 만족의 감동으로 행복한 체험뿐만 아니라 미래에서의 삶에서도 기쁨과 만족이 생겨난다.” (DhpA.II.45)고 했습니다.
종종 행한 다음에 후회할 경우가 많습니다. 실수일 경우도 있지만 알면서도 행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도둑질이 나쁘다고 알면서도 도둑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둑질이 습관화 된 자는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그것이 나쁜 행위 인줄 스스로 알아도 물건만 보면 손이 먼저 갑니다. 음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음주행위가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술병에 손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 역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오계를 금하는 것들이 안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뻔히 알면서 행합니다. 행하고 나서 후회합니다. 그것도 눈물 흘릴 정도로 후회 했다면, 예를 들어 살인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여섯 번 퇴전과 불퇴전을
행한 다음 후회하면 퇴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 된 심정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화를 내면 그것으로 단절 될 수 있습니다. 관계가 복구되려면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는 수행승이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을 때 절망할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고디까의 경’을 보면 자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행승 고디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섯 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어떨까?”(S4.23)
고디까 존자는 여섯 번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습니다. 일곱 번째에 이르렀을 때 자결을 생각했습니다. 고디까 존자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얻었지만 현실로 돌아 왔을 때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와 같은 퇴전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디까의 육체적인 상태가 마음에 의한 해탈에 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라 했습니다. 선정에 들어 명경지수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었지만 육체적 질병이 있다면 고통과 괴로움에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자결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디까존자는 일곱 번째로 마음에 의한 해탈(cetovimutti)에 이르렀을 때 자결했습니다.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을 얻은 상태였으므로 그 마음에 의한 해탈을 얻은 상태에서 죽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로 마음에 의한 해탈상태에 진입하자 마자 칼로 목을 그은 것입니다.
자살하지 말라고 했지만
부처님은 자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자결에 대해서는 막지 않았습니다. 또 계행이 청정하고 삶이 청정한 자가 육체적 질병에 따른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막지 않았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찬나의 경’에 따르면, 찬나는 “나의 고통스런 느낌은 극심하여 증가하기만 하고 감퇴하지 않으며, 감퇴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증가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나는 칼로 자결하겠습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S35.87)라 했습니다.
계행이 청정하고 허물 없이 산 자가 질병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에 빠졌을 때 암묵적으로 자결은 허용되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왜냐하면 싸리뿟따여, 한 몸을 내려놓고 다른 몸을 받는다면 나는 그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승 찬나나는 그렇지 않다. 수행승 찬나는 허물이 없도록 칼로 자결했다.”(S35.87)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고디까(S4.23), 찬나(S35.87), 박깔리(S22.87) 모두 칼로 목을 그어 자결했습니다. 또한 공통적으로 자결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고디까에 대해서는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확인해 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찬나에 대해서는 “수행승 찬나는 허물이 없도록 칼로 자결했다.”(S35.87)라 했습니다. 박깔리에 대해서는 “훌륭한 아들 박깔리는 시설된 의식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22.87)라 했습니다. 이처럼 한번의 실행에 두 가지 성취가 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 합니다.
자살 미수에 그친 경우
부처님 제자 중에는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을 때 자결을 생각했습니다. 자결을 실행한 경우도 있지만 미수에 그친 경우도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쌉빠디싸 장로는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Thag.407)라며 삭도를 목의 정맥에 대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해졌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ag.410)
쌉빠디싸 장로는 출가한지 25년이나 되었어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된 고디까 존자가 여섯 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을 얻은 것과 대조됩니다. 게송에 따르면 “심일경성을 얻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으로 괴로워하며 팔을 움켜잡고 울면서 정사를 박차고 나왔다.”(Thag.40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쌉빠디싸 장로는 자결하고자 했습니다. 선정에 들 수도 없고 도저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을것 같아서 “목숨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랴?”(Thag.407)라며 죽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죽고 싶어 한 것은 “학습계율을 포기하고, 어떻게 나와 같은 자가 죽을 수 있을까?”(Thag.407)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계율을 포기한다는 것은 패배를 뜻합니다. 속세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일종의 죽음과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계율을 버리고 속세로 돌아 간다는 것은 고귀한 계율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계율을 버리고 속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저열한 곳에 태어나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속세로 돌아 가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한 것입니다.
쌉빠디싸 장로는 삭도를 자신의 목에 대었습니다.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 후에 ‘계행은 병들지 않았는지’라고 성찰하다가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은 청정한 계행을 보고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의 마음에서 몸이 경안해지고 몸의 경안에서 자양없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삼매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통찰을 통해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ThagA.II.173)라고 주석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석에서는 “목에 칼을 대어 상처가 생겨나자 생겨난 고통을 진정시키면서 통찰을 통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 (ThagA.II.173)라고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쌉빠디싸 장로는 출가한지 25년 동안 단 한번도 심일경성(citta ekagga)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선정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해 수행에 진척이 없자 자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계행은 청정했습니다. 목에 시퍼런 칼을 대는 순간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yonisomanasikāra)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마음의 해탈의 길로 간 것입니다.
올가미에 목을 매었으나
테리가타에서도 자결장면이 나옵니다. 이번에는 목을 매는 장면입니다. 씨하 장로니는 “비참하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나는 목매는 것이 낫겠다.”(Thig.80)라 했습니다. 씨하 장로니는 출가하여 칠년 동안 헤매었습니다. 감각적 욕망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목을 매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내가 수행자의 삶을 살 수 없다면, 비속한 세속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백번 천번 이 숲속에서 목을 매어 죽는 것이 낫겠다.”(ThigA.78)라 한 것입니다.
씨하 장로니의 자살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이는 “단단히 밧줄을 엮어서 나뭇가지에 묶고 목에 올가미를 걸었는데, 그때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Thig.81)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올가미에 목을 거는 순간 출세간적인 통찰의 길과 차제적인 길을 통해서 일체의 번뇌로부터 나의 마음은 해탈되었다.”(ThigA.78)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sāmayika cetovimutti)
고디까 존자는 여섯 번이나 퇴전과 불퇴전을 반복했습니다. 일곱 번째 마음의 의한 해탈을 이루었을 때 칼로 목을 그어 자결했습니다. 그 순간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었습니다. 여기서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sāmayika cetovimutti)을 이룬 자는 질병으로 인하여 퇴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시적 해탈은 어떤 것일까?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라도 현실에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마음의 해탈을이룬 자라 볼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자라 볼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이룬 자가 현실에서 괴로움을 겪는다면 이는 ‘퇴전(退轉: parihāna)’이라 볼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퇴전의 원리에 대한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에게 결박의 조건이 되는 악하고 불건전하고 기억과 의도가 남고 속박의 조건이 되는 상태가 일어나는데, 수행승들이여, 만약 그것을 환대하여 버리지 않고 제거하지 않고 끝내지 않고 없애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나는 착하고 건전한 것에서 퇴전한다.’라고 알아야 한다.”(S35.96)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서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자살미수 사건으로 그친 쌉빠디싸 장로와 씨하 장로니는 퇴전에 따른 자살미수사건에 해당될 것입니다.
고디까 존자는 마음의 해탈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이나 퇴전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육체적 질병에 따른 고통이라 했습니다. 일곱 번째 마음의 해탈을 얻었을 때 마침내 칼로 목을 그어 자결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디까의 자결에 대하여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S4.23)라 했습니다. 법구경에서는 “계행을 갖추고 방일을 여의고 올바른 지혜로 해탈한 그러한 님들의 길을 악마는 결코 발견하지 못한다.”(Dhp.57)라 했습니다.
고디까 존자가 자결했을 때, 고디까 존자는 마음의 해탈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여섯 번 퇴전 한 것은 육체적 고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 했지만 흔들림 있는 마음의 해탈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시적 마음의 해탈은 집중에서 나오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말합니다. 본삼매에 들어 있는 순간에만 억압된 오염원들로부터 해탈하기 때문에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 합니다. 일시적 마음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씰라의 경’에서“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에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에 가는 자가 아니다.”(A6.44)라고 한 것에서 확인됩니다.
퇴전과 불퇴전의 삶에서
행한 다음에 후회하면 퇴전하는 삶입니다. 심기일전에서 다시 불퇴전의 삶을 살아갑니다. 퇴전의 원리는 감각적 욕망에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감각기부터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발생합니다. 시각으로 매혹적인 형상을 보았을 때 “그에게 결박의 조건이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기억과 의도가 일어난다.”(S35.95)라고 했습니다. 이를 제거하면 불퇴전이 되고 휘말리면 퇴전하는 삶이 됩니다.
수행승들에게 퇴전이 일어나면 속세로 돌아 갈 것입니다. 이는 학습계율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이 죄를 지으면 패배자가 되어 속세로 되돌아 갑니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속세로 돌아간다는 것은 악처에 떨어지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것입니다. 계행을 못지켜 속세로 돌아 가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한 수행승에 대한 이야기가 테라가타의 쌉빠디싸 장로이고, 테리가타의 씨하 장로니였습니다.
일반재가자들에게도 일상에서 퇴전과 붙퇴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계를 잘 지키면 불퇴전의 삶이 되지만, 오계를 어기는 삶은 퇴전의 삶이 됩니다. 오로지 퇴전의 삶만 있다면 퇴락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계는 학습계율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으면 참회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다시 계를 받아 지녀서 배우고 학습하면 불퇴전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2018-09-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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