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역동적인 종교, 전사(戰士)와 같은 수행자
오랜만에 강독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진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얀마로 집중수행 떠난 2주간 동안 한번 빠졌습니다. 한달에 두 번 모임이 있으므로 한번 빠지면 한달 만에 나가게 됩니다. 한달 만에 참석하니 매우 오래 만에 나간 것 것처럼 느껴집니다.
2월 들어 두 번째 강독모임이 1월 25일 전재성선생의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서 열렸습니다. 새해에도 언제나 변함 없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강독모임이 만 2년째에 접어 듦에 따라 이제 얼굴이 익어 만나면 매우 반갑습니다.
전사와 같은 수행자
이번 강독모임에서는 ‘수행자와 용감한 전사는 같다’라는 주제의 경입니다. 강독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 ‘셋 모아 엮음’의 마지막 경이기도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전사의 경(Yodhasutta)’(A3.131)이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먼저 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자를 전사로 비유했습니다. 세 가지 고리를 갖춘 전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왕에게 가치가 있고, 왕에게 시중들기에 알맞고, 왕의 수족이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전사와 같은 수행자는 어떤 조건이어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고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에 위없는 복밭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도 멀리 활을 쏘고, 번개처럼 맞추고, 강력한 대상을 쳐부수어야 한다.”(A3.131)
수행승을 전사로 비유한 것은 초기경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것입니다. 수행승을 전사중에서도 궁사로 비유했습니다. 궁사는 활을 멀리 쏜다고 했습니다. 멀리 쏠 뿐만 아니라 과녁을 정확하게 맞춘다고 했습니다. 화살에 맞은 적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사에 비유된 수행승은 어떤 것이 대상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온과 사성제와 무명으로 설명했습니다. 멀리 쏘는 것에 대해서는 오온을 지혜롭게 관찰하는 것으로, 번개처럼 맞추는 것에 대해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강력한 대상을 쳐부수는 것에 대해서는 무명을 타파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전사(戰士)출신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만 설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때로 적군을 쳐부수는 용맹한 전사의 이미지로서의 수행승입니다. 그래서 활을 잘 쏘는 궁사가 등장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태자로 있을 때 용맹한 전사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싯다르타는 전사출신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야소다라왕비와 결혼하게 된 것도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활을 잘 쏜 왕자가 부마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고 합니다. 무술경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무술 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전반적인 교육을 잘 받은 상태였습니다.
불교는 승리의 종교
흔히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무엇보다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비와 연민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전사처럼 용감하게 살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승리자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라이죄가 있습니다. 이를 단두죄라 합니다. 머리가 잘릴 정도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승단에서 추방됩니다. 살, 도, 음, 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이라는 말의 어원은 ‘빠라지까(pārājika)’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빠라지까는 다름 아닌 패배자라는 뜻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못해서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자를 말합니다.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사처럼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불교가 타종교에 밀리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자애와 연민만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도 불교라고 했습니다. 마치 전사처럼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적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진정한 승리자이다.”(Dhp.103)라 했습니다.
불교는 승리의 종교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을 승리자라 했습니다. 숫따니빠따 ‘담미까의 경’에서 재가신자 담미까는 부처님에게 “에라바나라고 부르는 코끼리 왕은 당신이 승리자임을 듣고 당신께로 왔었습니다.”(Stn.379)라 했습니다.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에서는 “최상의 승리자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고”(Stn.698)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에서는 사명외도 우빠까에게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서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M26.45)라 하여 스스로 승리자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
승리자로서 부처님은 수행승이 전사처럼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전사의 경을 설한 것이라 봅니다. 승리 해야 할 대상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자신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승리자로서 수행승의 첫 번째 조건은 오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마치 궁사가 활을 멀리 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수행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어 지혜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오온 중에 물질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한다.”(A3.131)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반복구문에서 물질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 모두 해당됩니다. 반복구문을 보면 시간과 공간이 모두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뜻하는 빠알리어 삽바(sabba)로 알 수 있습니다.
반복구문에서 “내적이든 외적이든(ajjhattaṃ vā bahiddhā)”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재성선생은 가장 일반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적인 것은 자신의 오온을 말하고 외적인 것은 타인의 오온을 말합니다. 이는 빠알리어 어원과도 관련 있습니다. 내부를 뜻하는 빠알리어 ‘ajjhatta’는 영어로 ‘personal; connected with the self’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외부를 뜻하는 ‘bahiddhā’는 영어로 ‘outside; outer’의 뜻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함을 말합니다.
외적인 것에 대하여 타인의 오온이 아닌 외부의 모든 대상 즉, 타인의 오온을 포함하여 산천초목산하대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확장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외부의 모든 대상으로까지 확장시킨다면 범위가 너무 넒어집니다. 마치 대승에서 법계연기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내적이든 외적이든’ 이라는 말은 자신의 오온과 타인의 오온을 지칭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반복구문에서 “거칠든 미세하든(olārikaṃ vā sukhumaṃ)”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삼계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 거칠은 세계는 욕계를 말하고, 미세한 세계는 색계와 무색계를 말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반복구문 중에 “저열하든 탁월하든(hīnaṃ vā paṇītaṃ)”라는 말 역시 삼계를 지칭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삼계의 중생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반복구문은 오온 중에서 물질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벗어나 다른 것에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번역서의 말미에 있는 세상도표를 보라고 했습니다.
세상도표를 보면 형성조건에 따라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위로는 비상비비상처천까지 33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오온을 관찰하여 그것이 ‘나의 것(渴愛)이 아니고, 내것(自慢)이 아니고, 나의 자아(見解)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활을 멀리 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
승리자로서 수행승의 두 번째 조건은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이는 전사가 활을 멀리 쏘아서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과녁은 다름 아닌 사성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수행승이 번개처럼 맞추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수행승이 번개처럼 맞춘다.”(A3.131)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M28)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결국 사성제를 펼쳐 놓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전사가 화살을 과녁에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승은 사성제를 타겟으로 해야 합니다.
전재성선생은 괴로움을 제대로 알면 나머지 것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제대로 관통하면 나머지 것은 따라서 관통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가밤빠띠의 경’에 따르면 “벗들이여, 저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벗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라 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 자는 나머지 세 개를 다 볼 것입니다. 사성제중에서 어느 하나만 제대로 알면 마치 번개처럼 빠르게 나머지 것도 알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괴로움에 대하여 뼈져리게 알고 있다면 그에게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명을 타파하는 것
승리자로서 수행승의 세 번째 조건은 무명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활을 쏘아 정확하게 과녁에 맞추었을 때 대상은 박살이 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수행승이 강력한 대상을 쳐부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강력한 무명의 다발을 쳐부순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수행승이 강력한 대상을 쳐부순다.”(A3.131)
부처님은 무명에 대하여 단순히 무명이라 하지 않고 ‘무명의 다발(avijjākkhandha)’이라 했습니다. 다발이라는 말은 ‘칸다(khandha)’를 번역한 말입니다. 칸다에 대하여 ‘무더기’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런데 다발이라는 말은 마치 근육이 뭉쳐진 것과 같은 모습이 연상됩니다. 또 실타래에서 풀려 나온 실이 얽히고 설켜서 꼬인 다발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한가지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해결불능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무명의 다발(mahantaṃ avijjākkhandha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무명의 다발은 정확하게 조준된 화살로 인하여 부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의 화살일 것입니다.
무명과 무지에 대하여
무명은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엇을 모르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 했습니다. 무지에 무지가 거듭된 것입니다. 이를 중중무지(重重無知) 또는 중층무지(重層無知)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 합니다.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 했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아는 자는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무지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말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라 합니다.
무명과 무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입니다. 전재성선생은 “무지의 무지이기 때문에 무명입니다.”라 했습니다. 무지가 거듭된 것이 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흑 같은 무명이라 합니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무명과 번뇌
모든 괴로움은 무명에서 시작됩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이 선두에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명이 있음으로 인하여 세상이 있습니다. 무명이 없다면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무명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 답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가 생겨남으로 무명이 생겨나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무명이 소멸합니다.”(M9.67)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의 원인인 번뇌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초기경전에 답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번뇌가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번뇌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발생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소멸이고, 어떠한 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까? 벗들이여, 세 가지 번뇌가 있는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 존재에 의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입니다.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합니다.”(M9.71)라 되어 있습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 존재에 의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라 합니다. 무명도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이 생겨나므로 번뇌가 생겨나고 무명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합니다.”라 합니다. 무명이 번뇌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번뇌는 무명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합니다. 무명과 번뇌가 서로 맞물려 돌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픔의 화살은 뽑아 버려야
화살과 관련하여 전재성선생은 “우주가 굽어져 있기 때문에 화살을 쏘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우주가 굽어졌다는 것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말합니다. 눈, 귀, 코 등 감각기관으로 인식하는 세상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쏜 화살에 맞는 것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화살에 맞은 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자를 두고 독이 묻은 슬픔의 화살에 맞아 스스로 괴로워하는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이라고 한다.”(A5.48)라 했습니다.
슬픔의 화살은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 무명을 타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명은 번뇌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번뇌는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무명과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뽑아야 할까? 초기경전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인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모든 번뇌의 경’(M2)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번뇌가 발생되는 요인에 대하여 일곱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핵심은 유신견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유신견은 이런 것입니다. 이 몸도 나의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뾰로지 하나만 나도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모욕당했다는 생각했을 때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느낌을 자기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한 절대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면 화살을 쏘아도 자신에게 돌아 옵니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것은 갈애(taṇhā)에 대한 것이고, 내것은 자만(mana)에 대한 것이고, 자아는 견해(diṭṭhi)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유신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갈애의 화살, 자만의 화살, 견해의 화살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오온이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여기면 화살은 멀리 날아가서 과녁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그 과녁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고 부수어지는 것은 무명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을 관찰하고, 사성제를 이해하고, 무명을 부수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고리를 갖추면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에 위없는 복밭이다.”라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을 타파한 성자를 말합니다
깨뜨리고, 부수고, 베어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은 통쾌합니다.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깨뜨리고, 부수고, 베어 버리는 것이 마치 전사나 무사를 보는 듯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맛지마니까야에서 ‘병아리부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 자는 자신이 구축한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M16)라 했습니다.
법구경에 부처님의 오도송이 있습니다. 게송을 보면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라고 되어 있습니다. 윤회의 원인은 갈애에 있습니다. 마치 성난 코끼리가 나무로 만든 집을 마구 부수어 버리듯이, 갈애로 인하여 자신이 구축한 한세계를 남김 없이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때로 무사(武士)같기도 합니다. 마치 무사가 진검승부에서 상대방을 단칼에 베어 버리듯이, 수행승은 얽히고 설켜 난마와 같은 번뇌의 다발을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림을 말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에서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야 한다.”(Vism.1.7)라고 계정혜 삼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매우 역동적인 종교
불교가 지혜와 자비를 추구하는 종교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자애와 연민의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붙퇴전의 마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전사나 무사의 비유로 나타납니다. 특히 부처님에 대하여 사자의 비유를 든 것이 많은데 이는 지혜와 함께 강력한 힘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개는 곤봉으로 때리면 사람을 향하지 않고 곤봉을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다릅니다. 이에 대하여 “여래들은 행동이 사자와 같다.” (Vism.16.63) 라 합니다. 사자는 화살이 날아오면 그 화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수를 향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는 멸성제에서 결과를 중요시하지 않고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문구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자처럼, 전사처럼, 무사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무명과 번뇌를 깨뜨리고, 부수고, 베어 버린 것입니다. 전재성선생은 불교가 자비만 강조한 종교는 아니라고 하면서 불교는 매우 역동적인 종교라 했습니다.
2019-01-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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