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팔만사천법문이 정법, 니까야강독모임 양평정혜사 송년모임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2. 30. 12:07

 

팔만사천법문이 정법, 니까야강독모임 양평정혜사 송년모임

 

 

지공거사를 아십니까?

 

지공거사라는 말 아십니까?”전재성선생이 한 말입니다. 니까야강독 정혜사 모임에서 한 말입니다. 지공거사? 대체 뭔 말일까? 모두들 고개를 갸웃뚱하는데 지하철공짜승차거사를 뜻하는 말이라 합니다. 65세가 된 자에게 국가에서 부여하는 특혜입니다.

 

지공거사가 되면 정식으로 노인이 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를 축하해야 할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노인이 되면 지하철무임승차뿐만 아니라 KTX탑승권도 30% 혜택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부산에 사는 사촌형님은 서울에 올 때 고속버스를 타지 않고 KTX를 탄다고 했습니다. 가격은 똑 같은데 시간이 절약 되기 때문입니다.

 

남양주 정혜사에서 송년모임을

 

2018년 한해도 이틀 남은 12 29일 전재성선생의 니까야 강독모임 멤버들이 남양주 정혜사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 모였으므로 일종의 송년회라 볼 수 있습니다.

 

매달 두 번 강독모임이 열립니다. 이제까지 별도로 모여 보지 못했습니다. 별도의 장소에서 식사나 차담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경기도 고양에 있는 전재성선생의 삼송테크노밸리서고에서 7시에 모여 9시에 끝나는데, 각자 갈 길이 멀어서인지 끝나자마자 집에 가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월 두 번째 강독모임이 열리는 금요일 저녁대신에 토요일 오전에 날을 잡아 니까야강독멤버 중의 하나인 도현스님이 주지로 있는 남양주 정혜사에서 송년모임을 갖기로 한 것입니다.

 

송년모임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강독모임 3년 동안 가장 오래 참석 했고 또한 전모임을 개근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인원파악에 나섰습니다. 음식준비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강독모임의 선덕님과 협의하여 음식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점심을 밖에 나가서 사먹는 것 보다는 각자 반찬을 준비해 와서 정혜사에서 먹기로 했습니다. 정혜사에서는 밥과 국, 김치만 제공하면 됩니다. 반찬은 몇 사람이 준비 하기로 했습니다. 케이크와 떡을 준비하는 담당도 정해졌습니다.


다음으로 선물준비하기입니다. 각자 만원 안팍의 선물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어느 것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집에 있는 것 가져 와도 됩니다. 다음으로 3분 스피치 시간입니다.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강독모임과의 인연, 각오 등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3분 스피치가 끝나면 한군데 모아진 선물중에서 하나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날 참석자는 전재성선생과 도현스님을 포함하여 모두 16명이었습니다.

 

세상을 가르는 팔당대교

 

모임은 10시 반부터 시작됩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습니다. 팔당까지 가는 전철과 버스를 활용하려 했으나 매서운 추위와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승용차로 이동했습니다. 안양에서 불과 40여분만에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도중에 팔당대교를 건넜습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팔당대교는 세상을 가르는 듯합니다. 팔당대교 서쪽은 끝없이 펼쳐지는 아파트단지이고, 팔당대교 동쪽은 험준한 협곡이 전개됩니다. 마치 일주문이 성과 속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팔당대교를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풍광이 펼쳐집니다.

 



 

다산공원이 있는 곳에

 

팔당대교에서 정혜사까지는 약 8키로 가량됩니다. 편도 1차로 밖에 되지 않는 옛날 경춘가도입니다. 정혜사는 구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다산관련 유적지와 공원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지역입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은 커다란 호수를 연상케 합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정혜사 근처 마을에 사는 강독모임 멤버중의 하나인 장법우님은 정혜사와 근처 다산공원이 있는 풍광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다산의 5대 조부께서 낙향하기로 결심하고 어디가 좋을까 배를 타고 한강을 둘러보다가 점지한 곳이지요. 얼마전 드라마 밥 잘 사주는 누나에 나온 정해인이라는 군요. 다산의 6대손이라는 군요.”라고 카톡방에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정혜사에 약속시간 30분전에 도착했습니다. 선덕님과 선운, 선목님이 먼저 도착해서 준비작업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전재성선생과는 오래전부터 봉사활동을 했고 이번에 앙굿따라니까야합본교정작업과 청정도론교정작업을 함께 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성전에 이름이 올라가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펜션처럼 보이는 법당

 

정혜사는 옛경춘가도인 구도로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조계종 소속은 아닙니다. 입간판을 보면 행복한 힐링캠프 정혜사라 쓰여 있습니다. 이런 정혜사는 김열권법사의 집중수행장소이기도 합니다. 마침 문수전에서는 김열권법사의 주도로 일주일예정의 위빠사나 집중수행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문수전 바로 옆에 법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절의 이미지와는 다릅니다.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절은 팔작지붕이나 맞배지붕형식이어야 한다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혜사의 모든 법당은 네모난 모양입니다. 마치 펜션건물처럼 보입니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먼저 온 법우님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엄청난 무게의 탁자를 디귿()자로 배치 했습니다. 각자 준비해 온 과일과 과자, 떡을 자리에 놓았습니다. 정혜사에서 준비한 과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차를 끓였습니다. 도현스님이 준비한 귀한 보이차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모두 16명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기소개와 함께 3분 가량 말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어느 법우님은 이번 생에서 반드시와 도와 과를 이루겠다고 했습니다. 최소한 예류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 했습니다.

 

목숨걸고 공부했고, 체험에 입각해서 번역했다

 

각자 자기소개시간이 끝나고 전재성선생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재성선생은 약 한시간 반 가량 자신의 살아 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를 스마트폰에 키워드 메모해 두었습니다. 메모와 기억을 되살려 구성해 보았습니다.

 

전재성 선생은 목숨걸고 공부했습니다.”라 했습니다. 체험에 입각해서 번역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는 불행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말입니다. 가혹했던 70년대 유신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 되었는데 이를 두고 한말입니다. 그때 당시 대불련의장을 맡았다고 합니다.

 




전재성선생의 불행은 네 살 때 화상을 입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전재성 선생의 젊은 날의 일대기라 볼 수 있는 자서전 성격의 거지성자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끊임 없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 그후 10년 가량 고통속에서 보낸 것을 말합니다. 그때 당시 대불련 의장이 되면 자동적으로 엮여 들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전재성선생이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82년의 일입니다. 더 이상 한국에서 살 수 없어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이라 볼 수 있습니다. 늘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고 사건이 터지면 잡혀 들어가는 생활이 10년간 반복되다 보니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런 기간을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민중불교론이라는 글의 영향도 있었다고 합니다.

 

민중불교론에 대하여

 

한국불교에 있어서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이 있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전재성선생의 민중불교론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이 글은 학생 때 쓴 것이라 합니다. 그때 당시 황석영, 고은 등이 있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모임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이 단체는 독일 민주화운동 단체의 지원을 받았는데 그때 당시 강원룡목사 등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지원 이유는 양극화를 조정해 보기 위한 것인데 이를 중간집단운동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의식화 하는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전재성선생은 민중불교론을 크리스천아카데미의 대화지에 기고했습니다. 불교관련 매체에서는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집필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감옥에서 더욱 더 느꼈다고 했습니다. 감옥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불쌍해 보인 것도 집필 이유중의 하나라 합니다.

 

민중불교론은 필화가 되었습니다. 대화지가 일주일 후에 폐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로 인하여 엮여 들어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이글이 이렇게 올가맬줄 몰랐다라 했습니다. 학생운동하다 붙잡힌 사람들이 민중불교론을 보았다고 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학생들이 글을 읽고 데모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늘 감시대상이었고 툭하면 불려 갔기 때문에 도저히 한국에서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두 사건

 

전재성선생은 수행이야기도 재미나게 했습니다. 강독시간에 여러 번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은 것은 요가난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재성선생은 빠라마한사 요가난다와의 만남에 대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사건이라 했습니다.

 

전재성선생은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특별한 인연이 두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사람은 독일유학 시절에 거지성자의 주인공 페터 노이야르를 만난 것이고 또 한사람은 책으로 만난 것이긴 하지만 인도 힌두성자인 빠라마한사 요가난다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바뀝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젊은 시절 이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길이 완전히 바뀌어졌다고 했습니다. 특히 페터 노이야르에 대해서는 , 내가 한국에 가면 번역해야겠구나!”라는 마음이 들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페터 노이야르는 나이가 약 45세 가량 되었는데 쾰른대 숲에서 노숙하며 거지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안내한 도서관에서 빠알리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된 것을 보았는데 이제까지 접한 불교와 너무 다른 것이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니까야 번역을 평생 원력으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빠라마한사 요가난다와의 만남은 그의 수행법을 따르는 사람들과 만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소개 받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유학가기전에 조계사 다니면서 약 2년 동안 요가난다의 책을 기본으로 하여 수행했다고 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공중결가부좌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과학의 시대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데 이와 같은 신비적인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함을 책에서는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 인줄 알았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후에는 운동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힌두교의 바탕을 알아야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힌두교의 전통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힌두교라는 말은 인도의 종교를 말하는데 이는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도 포괄하는 말입니다. 그런 힌두교는 매우 경건한 종교라 했습니다. 신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경건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가난다의 가르침을 보면 불교에서 볼 수 있는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수행이 모두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수행을 하여 마음이 청정해졌을 때 공중결가부좌하는 모습의 스승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정신으로 만든 몸으로도 설명이 가능함을 말합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불교는 힌두교와 비교하여 논리적이고 사유적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깊은 종교성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불교가 인도의 전통종교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힌두교의 바탕을 알아야 불교도 알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를 재해석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부처님당시에 바라문들은 대규모동물희생제를 지내는 등 바라문교의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서 상세하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라문을 새롭게 규정하여 그 근원적 의미에서 거룩한 자라 했습니다. 옛날의 바라문들은 청정한 삶 (brahmacariya)을 살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바라문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학생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 바라문품을 보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고 부른다.”라는 후렴구가 나옵니다.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바라문의 삶이 아라한의 삶과 다름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태생과 가문 때문에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고 번뇌가 부수어진 거룩한 님,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Dhp.420)등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힌두교를 바로 알면 불교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선생은 유학가기 전에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적 전환을 이루게 한 인도의 종교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정법(正法)의 기준은 무엇인가

 

전재성선생의 힌두교이야기 도중에 질문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전통과 유사하지 않느냐며 정법(正法)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만사천법문이 정법이라 했습니다. 정법은 니까야에서 잘 설해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대승경전이 모두 정법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을 보면 니까야에서 언급된 내용이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전재성선생은 정법에 대하여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했습니다. 이 세상이 괴로운 곳이라고 아는 자에게는 이 세상이 늘 변화 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삼법인을 설명하면서 사실 중요한 구절은 외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해야 함을 말합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괴로움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영향을 받고 가장 많이 공감한 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 실려 있는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나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게 모두 해당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전재성선생은 괴로움에 처했을 때 늘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그 사람의 업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식의 불행이라도 이와 같이 생각하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실제로 괴로움이 많이 사라졌고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라고 했습니다.

 

세 시간 걸려 기쁨으로 참석하고

 

전재성선생의 약 한 시간 반에 걸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어서 도현스님의 이야기로 오전 모임을 마무리 했습니다. 도현스님에 따르면 전재성선생과의 인연은 27년 되었다고 합니다. 상도동 시절에는 금강경 강연했다고 합니다. 도현스님은 비구니 스님으로 전재성선생의 후원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도현스님은 니까야강독모임에 빠지지 않습니다. 정혜사가 있는 남양주에서 서고가 있는 고양시 삼송역까지는 먼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모임 세 시간 전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도착하면 기진맥진하여 힘이 다 빠지지만 그럼에도 강독모임에 기쁨으로 참석한다고 했습니다.

 

강독모임 38차례 열린 것에 대하여 후기를 작성했습니다. 2년 동안 빠짐 없이 모임에 참석한 결과물입니다. 이를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 책을 만들었습니다. 문방구에 의뢰한 것입니다. 도현스님에게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드는 김에 더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요청이 들어와 50권을 제작했습니다. 그 중의 한권을 도현스님에게 드렸습니다.

 

책의 형태로 만든 것은 도현스님이 프린트물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책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도현스님도 이날 책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함께 식사를 해야 식구

 

점심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정보다 많이 늦어져서 오후 1시 넘어서 시작되었습니다. 준비해온 반찬도 있지만 정혜사에서 준비한 반찬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굴무침이 맛 있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해야 식구라 합니다. 매번 강독모임이 열릴 때마다 집에 가기 바빴는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담소를 하며 식사를 하니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이런 모임을 자주 갖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특히 강변을 거닐며 산책할 때 아름다운 풍광을 보자 더욱더 의견이 많았습니다.

 

봄과 가을 두 번은 정혜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가 두물머리라 합니다. 수종사 찻집에서 바라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광에 대하여 어느 외국인은 알프스 못지 않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수량도 풍부해서 마치 바다처럼 넓습니다. 점심공양후에 두물머리가 있는 다산공원 산책에 나섰습니다. 도현스님이 안내했습니다.

 

 


 

영하의 날씨에 약 두 시간 걸었습니다. 모두 방한복을 입고 단단히 추위에 대비 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열기에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산책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며 걷다 보니 급속도로 친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봄과 가을에 두 번은 정혜사에서 강독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전재성선생은 이날 모임에서 책을 선물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월폴라 라훌라의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What the Buddha Taught and Noble Eightfold Path)’입니다. 이 책은 전재성선생이 학생 때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를 대폭 보완하여 개정판을 발행한 것은 2002년의 일입니다. 서울대학교 교재로도 활용되고 있는 이 책은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라 합니다. 원문번역보다 두 배 두꺼운 것은 근거가 되는 경을 삽입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 했는지 가장 쉽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모임은 다섯 시 가까이 되어서 끝났습니다. 예정시간 보다 두 시간 늦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불만은 없습니다. 좋은 이야기 듣고 즐겁게 식사하고 유쾌하게 산책했기 때문입니다. 혹한의 날씨 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따뜻했습니다. 마무리는 자애경(Sn1.8) 독송과 사홍서원으로 했습니다.

 

 

2018 12 30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