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진통이 왜 신통에 속할까? 곧바른 앎(아빈냐)에 대하여
“신통은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곧바른 앎이 신통입니다.” 이 말은 11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들은 말입니다. 전재성선생은 곧바로 알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곧바른 앎은 일반적 경험과 다른 것으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선정에서 가능한 일이라 했습니다. 11월 두 번째 니까야 강독모임 주제는 여섯 가지 신통에 대한 것입니다.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11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은 일주일 연기되어서 열렸습니다. 본래 11월 넷째주인 23일에 열려야 하지만 전재성원장 개인일정으로 인하여 일주일 후인 30일 열렸습니다. 늘 그렇듯이 모임 장소는 전재성선생 서고입니다. 고양시 삼송역부근 삼송테크밸리 서고입니다.
일찍 출발했습니다. 도착하니 50분전입니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법우들이 있었습니다. 선덕, 선목, 선화 법우입니다. 마침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쓸고 닦고 정리하는 등 분주했습니다. 진공청소기 담당을 자처 했습니다. 너른 바닥 이곳저곳 먼지를 빨아 들였습니다.
청소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단지 공부만 하는 수강생의 입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것입니다. 사실 세 분의 법우는 전재성원장과 함께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 왔습니다. 지금은 회향하고 없지만 김광하선생이 주도한 봉사단체 ‘작은손길’ 멤버들이기 때문입니다. 을지로 굴다리 노숙자봉사, 독거노인 반찬봉사, 탈북청소년 봉사 등을 오랫동안 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날도 자발적으로 쓸고 닦고 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모임의 참가자들은 수강생들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원자들입니다. 또 교정을 하는 편집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번 청정도론 출간에 교정작업에 참여 함으로 인하여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세 분의 법우 이름이 청정도론 머리말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봉사정신이 발휘된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순위 7위에
새롭게 출간된 청정도론 소식을 들었습니다. 출간된지 이제 4주 가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서적관련 베스트셀러 순위 7위에 랭크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신차효과’로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자동차가 출시되었을 때 관심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은 불교계에서는 일종의 스테디셀러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간된 청정도론의 경우 수만권이 팔려서 불서로서는 베스트셀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책이라 봅니다. 그런데 14년 후에 새로운 번역서가 등장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원장이 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청정도론-비쑷디막가’입니다.
한권으로 된 통합본은 1530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종이가 얇고 미끈한 고급지를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석이 풍부합니다. 빠알리원문과 함께 경전문구도 소개 되 있어서 주석만 읽어도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이 이전 번역과 차별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쉽게 번역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재성선생의 청정도론은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읽기만 해도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쉬운 문체입니다. 또한 전문술어 역시 차별화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본물질을 뜻하는 깔라빠(kalāpa)에 대하여 ‘극미취’라 번역했고, 흔히 속행이라 번역되어 있는 자바나(javana)에 대하여 ‘통각’으로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간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한권으로 되어 있어서 좋고, 종이 질도 좋고, 주석도 좋고, 모든 것이 좋아서 참 마음에 듭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주석이 있는 번역서
새로 출간된 청정도론이 불서 베스트셀러 7위까지 랭크된 것은 이전에 청정도론이 이미 출간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호기심도 작용한 것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에서 청정도론은 불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불서인데 새롭게 출간된 청정도론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숫따니빠따 출간과 관련하여 설명했습니다.
전재성선생이 숫따니빠따를 완역하여 출간 했을 때 잘 팔렸다고 합니다. 이유는 이미 숫따니빠따가 여러 종 출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책에 대한 인지도가 불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법정스님이 편역한 숫따니빠따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70년대 출간된 바 있는 법정스님의 숫따니빠따는 그 때 당시 선풍적인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신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책장에 꼽혀 있을 책이라 봅니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숫따니빠따는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역을 중역한 것입니다. 더구나 주석도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재성선생의 숫따니빠따는 빠알리원전과 주석을 직접 번역한 것으로 풍부한 주석이 특징입니다. 또한 한구절, 한단어 대한 설명이 각주에 빼곡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번역서는 전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어 번역 숫따니빠따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출간된 청정도론 역시 주석이 빼곡합니다. 이전 번역과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에게 있어서는 갈증을 해소 시켜 주는 또 하나의 역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통을 얻기 위한 조건을 보면
11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의 주제는 ‘금세공사와 보다 높은 마음을 닦는 수행자’에 대한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금세공사의 경1’(A3.100a)에 대한 것입니다. 이 경은 ‘소금 결정의 품’에서 두 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육신통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첫 번째 경의 경우 금세공의 비유를 들어 거친 불순물제거, 중간 불순물제거, 작은 불순물제거라는 세 개의 법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 경은 ‘금세공사의 경2’(A3.100b)라 하여 삼매, 정근, 평정이라는 세 개의 법수로 이루어진 것이 첫 번째 경과 다릅니다.
두 개의 경을 보면 육신통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통이라는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신통은 반드시 조건을 갖추어야 함을 말합니다. 만일 먹은 대로 된다면 누구나 신통을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신통을 갖추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보다 높은 마음(adhicitta)’을 닦는 세 가지 조건입니다. 가장 먼저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라는 ‘거친 불순물’을 제거 하는 것입니다. 마치 금세공사가 금을 정제하기 위하여 자갈이나 돌조각과 같은 거친 것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통을 얻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사유, 악의의 사유, 폭력의 사유와 같은 ‘중간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금세공사가 미세한 자갈과 굵은 모래와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통을 얻기 위한 세 번째 단계는 가문에 대한 사유, 국가에 대한 사유, 자존에 대한 사유와 같은 ‘작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금세공사가 미세한 모래와 검은 반점과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를 보면 신구의삼업에 대한 것으로 오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를 보면 팔정도에서 정사유에 대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미세한 번뇌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정당화 하기 위해 흥분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눈에 띄는 말은 ‘자존’입니디. 이는 경에서 “보다 높은 마음을 닦는 수행승에게는 가문에 대한 사유, 국가에 대한 사유, 자존에 대한 사유와 같은 작은 불순물이 있다.”(A3.100a)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사유(janapadavitakko)’도 일종의 번뇌에 해당됩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한몸 헌신하는 ‘가문에 대한 사유(ñātivitakko)’도 번뇌입니다. 더구나 자존심 가지는 ‘자존에 대한 사유(anuviññattipaṭisaññutto vitakko)’도 번뇌라 합니다. 여기서 자존에 대한 사유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멸시받지 않음에 대한 생각’이라 번역했습니다.
자존에 대한 사유는 미세한 번뇌에 해당됩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흥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오상분결에서 말하는 웃닷짜(uddhacca)입니다. 이를 한역으로 도거(掉舉)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에서는 ‘자기정당화’라 번역한다고 했습니다. 흥분을 뜻하는 웃닷짜가 왜 자기정당화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자기정당화는 미세한 자만심에 속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정당화 하기 위해 흥분합니다.”라 했습니다.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수행자가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가문을 생각하고 자기정당화 하는 것은 미세한 번뇌로서 금세공의 비유를 들자면 작은 불순물에 속합니다. 이와 같은 작은 불순물 마져 녹여 내려 버렸을 때 “그것이 제거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가르침에 대한 사유가 남는다.” (A3.100a)라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에 대한 사유(dhammavitakkā)’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르침에 대한 사유에 주석을 보면 이는 ‘열 가지의 통찰번뇌’에 대한 것이라 했습니다. 열 가지 통찰번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각주에서는 청정도론 ‘Vism.XX.105’를 참조하라고 했습니다. 찾아 보니 ‘열 가지 통찰의 경계적 오염(vipassanupakkilesa)’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한역으로 관수염(觀隨染)이라 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초보적 관찰을 시작하는 통찰자에게는 열 가지 통찰의 경계적 오염이 일어난다.”(Vism.20.105)라고 했습니다. 열 가지 경계적 오염원은 어떤 것일까? 청종도론에 따르면 “1)빛, 2)앎, 3)희열, 4)안온, 5)행복, 6)확신, 7)분발, 8)확립, 9)평정, 10)욕구이다.” (Vism.20.105)라 했습니다.
수행중에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초보적 수행자가 수행중에 빛을 보았을 때 “실로 지금 이전에는 이러한 빛이 일찍이 생겨나지 않았으나 확실히 나는 길에 도달했고 경지를 획득한 것이다.” (Vism.20.107)라고 착각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는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고 파악하고, 경지가 아닌 것을 경지라고 파악한다.”(Vism.20.107)라 했습니다.
수행중에 빛을 봤다고 해서 깨달은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행중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업에서 물질을 만들어 내듯이, 빛은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물질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빛을 보면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빛을 즐기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그의 통찰의 길은 실로 어긋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근본적 명상주제를 포기하고 빛만의 유혹에 빠져 앉아 있는 것이다.”(Vism.20.107)라 했습니다. 빛뿐만 아니라 이하 앎, 희열, 안온, 행복, 확신, 분발, 확립, 평정, 욕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를 ‘열 가지 통찰의 경계적 오염’이라 합니다.
성과에 대한 자만으로 인하여
열 가지 오염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서는 분명히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이러한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파괴되기 마련이고, 괴멸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고, 소멸되기 마련이다.”(Vism.20.126)라고 지혜로써 판별해야 함을 말합니다.
수행자에게 ‘자존에 대한 사유’와 같은 작은 불순물이 제거되면 ‘가르침에 대한 사유’가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에 대한 사유라는 것은 열 가지 오염적 경계에 대한 생각과 같다는 것입니다.
빛을 보고서 ‘나는 깨달았다’라고 착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은 빛을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입니다. 빛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입니다.
유신견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그 삼매는 평화롭지 않고 탁월하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고 통일성에 도달하지 못해서 노력을 기울여 겨우 유지하는 제어이다.”(A3.100a)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을 보면 “정신적인 번뇌가 충분치 못한 통찰수행으로는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열 가지의 통찰번뇌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성과에 대한 자만과 같은 것은 다시 의도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Lba.I.259)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보다 높은 마음을 닦으려면
빛을 보고 흥분 했을 때 탁월한 삼매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겨우 노력을 기울여 이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보다 높은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So hoti samādhi santo paṇīto paṭippassaddhiladdho ekodibhāvādhigato, na sasaṃkhāraniggayhavāritavato. Yassa yassa ca abhiññā 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ṃ abhininnāmeti abhiññā 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 āyatane.
“그러나 그 마음이 내적으로 안정되고 완전히 고요해서 통일되고 집중되는 때가 온다. 그 삼매는 평화롭고 탁월하고 고요하고 통일성에 도달해서, 결코 노력을 기울여 겨우 유지하는 제어가 아니다. 그가 곧바로 알고 실현해야 할 것을 곧바로 알고 실현하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일 때는 조건이 충족될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알고 실현한다.”(A3.100a)
이 구절은 이어지는 여섯 가지 신통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 되는 삼매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네 번째 선정에 대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라 합니다. 이를 한자어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하고 빠알리어로는 우뻬까사띠빠리숫디(upekhāsatipārisuddhi)라 합니다.
네 번째 선정인 사념청정상태에 이르러야 육신통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선정에서는 희열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열 가지 경계적 오염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희열과 행복은 거친 것이기 때문에 네 번째 선정단계에서는 버려집니다. 그래서 네 번째 선정의 경우 정형구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라고 표현됩니다.
경에 따르면 육신통이 가능한 선정에 대하여 “결코 노력을 기울여 겨우 유지하는 제어가 아니다. (na sasaṃkhāraniggayhavāritavato)”(A3.100a)라 했습니다. 이는 오염원을 억누르거나 차단해서 얻은 제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바로 알고 실현해서 얻은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곧바른 앎 (abhiññā)’입니다.
곧바른 앎(abhiññā)에 대하여
곧바른 앎, 즉 아빈냐(abhiññā)는 육신통의 조건이 됩니다. 이와 같은 아빈냐에 대하여 영어로는 “The 6 ‘higher powers’, or supernormal knowledge’s”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최상의 지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아빈냐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삼매수행은 곧바른 앎을 가져 오는 공덕이다.”(Vism.12.1)라 했습니다. 삼매수행을 닦으면 이득이 있음을 말합니다. 어떤 이득인가? 이는 “삼매수행을 갖추어 쉽게 지혜수행을 이룰 수 있다.” (Vism.12.1)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삼매를 닦는 것은 결국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 (Dhp372)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지혜일까? 신통과 관련해서는 육신통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육신통 중에서도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삼명(三明)이라 하여 깨달음의 조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명은 부처님의 깨달음과도 관련 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초야에 숙명통, 중야에 천안통, 후야에 누진통 삼명을 통해 깨달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삼명으로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일까 신통을 뜻하는 아빈냐에 대하여 ‘최상의 지혜’라고도 합니다.
사적인 욕망으로 신통을 부리려 할 때
신통도 신통 나름입니다. 세속적 신통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데바닷따를 들 수 있습니다. 율장소품 제7장 ‘참모임분열의 다발’에 따르면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살해하고 교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또 아자따삿뚜를 교사하여 부왕을 죽이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통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데바닷따의 신통은 사라졌습니다.
세속적 신통이라 불리우는 데바닷따의 신통은 왜 사라졌을까? 이에 대하여 율장소품에서는 “존자여, 데바밧따는 이득, 명예, 칭송에 정복되어 마음이 사로잡혀 이와 같이 ‘내가 수행승의 참모임을 이끌겠다.’라는 욕망을 일으켰습니다. 존자여, 이러한 마음이 생겨남과 동시에 데바닷따에게는 신통력이 사라졌습니다.”(Vin.II.185)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통은 욕심을 부리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욕망으로 신통을 부리려 할 때 신통이 작동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정신으로 만들어진 몸(manomayakāya: 意所成身)이란?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가능합니다. 선정의 상태가 욕망이 여읜 상태이기 때문에 사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것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깨달음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그래서 신통을 뜻하는 아빈냐에 대하여 곧바른 앎, 초월지, 최상의 지혜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물위를 걷고 벽을 통과하는 등 신족통은 어떻게 해서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원장은 디가니까야에서 예를 들었습니다.
디가니까야‘인연의 큰경’(D16)에서 ‘정신으로 만들어진 몸’에 대한 이야기가나옵니다. 이를 나마까야(nāmakāya)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명[정신]의 몸(정신적인 몸)이 시설되는데,”(D1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정신]의 몸(정신적인 몸)’이 나마까야(nāmakāya)입니다. 정신의 몸은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빠세나디왕에게 삼매에 따른 곧바른 앎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다양한신통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조건이 만족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네 번째 선정에 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육신통에서 하나에서 여럿이 되는 등 열 가지 변화에 대하여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manomayakāya)’이기 때문에 가능함을 설명합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그 수행승은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의 창조에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이게 하여,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갖추고, 정신으로 만들어지고, 모든 사지를 갖추고, 감관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듭니다.”(D2.83)
이 문장이 ‘정신으로 만들어진 몸’의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노마야까야(manomayakāya)에 대하여 한역으로는 ‘의소성신(意所成身)’ 또는 ‘화작(化作)’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의소성신에 대하여 경에서는 칼과 칼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는 “이것이 칼이고 이것이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칼은 칼집에서 뽑혀진 것이다.”(D2.84)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칼을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뱀과 뱀허물의 비유로도 설명합니다. 비록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이 신통을 지닌 자의 창조된 몸이긴 하지만 형상과 감관 등에 있어서 육체적인 몸과 똑같음을 말합니다.
꿈을 꾸면 꿈속에서 장면이 현실보다 더 생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꿈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돋보기로 햇볕을 한 곳에 집중하면 연기가 나지 시작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현실에서는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 펼쳐집니다. 이는 경전에서 신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통은 네 번째 선정에서 일어납니다. 고도로 마음을 집중 했을 때 호흡도 끊어질 것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에서 ““장자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이 소멸합니다.”(S41.6)라 했습니다. 여기서 언어적 형성은 사유와 숙고에 대한 것으로 두 번째 선정에서 사라지고, 신체적 형성은 호흡에 관한 것으로 네 번째 선정에서 사라집니다.
호흡이 사라졌다는 것은 몸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몸은 있지만 정신만 남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네 번째 선정의 상태로 정신으로 만든 몸이 가능한 상태일 것입니다. 마치 칼집에서 칼을 뺀 것과 같습니다.
왜 누진통이 신통일까?
몸은 있지만 정신만 남아 있는 상태라면 꿈속과 같을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하늘을 날아 다니기도 하는데 네 번째 선정에서 신족통을 얻은 자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는 열 가지 신통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삼명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숙명통, 업보에 따라 타인의 태어남을 아는 천안통, 그리고 번뇌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는 누진통을 말합니다.
삼명은 깨달음을 위한 지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신통을 닦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깨닫기 위한 지혜를 닦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재성원장은 신통에 대하여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하며 인간을 뛰어넘는 지혜라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신통이라 했습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육신통 중에서 삼명은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단지 기적 같은 신통을 부리기 위해 신통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전생을 봄으로 인하여 윤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宿命通), 타인의 태어남을 봄으로 업과 과보에 따른 윤회를 보는 것(天眼通)은 지혜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누진통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신통의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누진통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사성제에 대한 것입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이 신통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곧바로 알게 되어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됩니다. 사실 이런 신통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하늘을 날고 벽을 투과하는 신통을 가졌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 한마디에 인생의 방향이 180도 바뀌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신통이라 할 것입니다. 마치 개구장이가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 “거참 신통하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뜻으로 본다면 누진통이야말로 최상의 신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진통은 사성제로 완성된다
육신통 중에서 누진통은 해탈로 설명됩니다. 이는 누진통에 대한 정형구에서“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 지혜의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완전히 알고 깨달아 성취하고자 한다.”로 표현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진통은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한 것입니다. 즉 양면으로 해탈한 자가 누진통의 지혜를 가진 자입니다. 이와 같은 누진통은 숙명통, 천안통 등과 같은 나머지 다섯 가지 신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부처님 가르침이 신통입니다.”라 했습니다.
누진통은 사성제로 완성됩니다. 신통으로 업보에 따라 윤회하는 삶을 알게 되었을 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입니다. 이는 가장 먼저 괴로움을 뼈저리게 아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고성제입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고성제에 대하여 단순하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 굴려서 아는 것입니다.
사성제에서 괴로움은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과거로 부터 윤회해 왔기 때문에 사고팔고라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업의 결과로서 괴로움은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철저하게 자각했다면 괴로움은 버려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집성제입니다.
고성제는 결과이고 집성제는 원인입니다. 고성제를 철견했을 때 괴로움의 원인은버려지게 됩니다. 존재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버려지게 됩니다.
갈애는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기보다는 버려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았을 때,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이미 버려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는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苦聖諦),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道聖諦), 버려야 할 것(集聖諦)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滅聖諦)입니다.”(Stn.558)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신통
사성제를 아는 것이 신통입니다. 사성제 중에서도 고성제를 알게 되면 나머지 것도 곧바로 알게 됩니다. 하나의 진리를 꿰뚫게 되면 나머지 것도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S56.3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진리를 통찰하게 되면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도 동시적으로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바른 앎(abhiññā)’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신통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신통입니다. 신통이라 하여 하나가 여럿 되고 물위를 걷거나벽을 투과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되었을 때 신통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에게 “거참, 신통하네!”라 하듯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거참, 신통하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신통한 자들입니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은 괴로움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이처럼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게 해주는 부처님 가르침이야말로 신통중의 신통입니다. 전혀 신통같지 않아 보이는 누진통이 육신통중에서 가장 최후에 언급된 이유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2018-12-01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금요니까야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까야강독모임에 매번 빠지지 않는 것은 (0) | 2018.12.21 |
---|---|
마음의 그림자에 압도 되었을 때, 임종의 침대에 누운 자에게 (0) | 2018.12.18 |
청정도론은 남방불교의 백과사전 같은 것,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청정도론출간 작은법회 (0) | 2018.11.10 |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무전유죄유전무죄와 소금덩어리 비유 (0) | 2018.10.13 |
자자와 포살의 승가에서 성자가, 증상계학(增上戒學)에 대하여 (0) | 2018.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