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무전유죄유전무죄와 소금덩어리 비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13. 11:05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무전유죄유전무죄와 소금덩어리 비유

 

 

무전유죄 유전무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언젠가 세상을 떠들썩 했던 사건에서 범죄자가 한 말입니다. 돈이 없으면 벌을 받고 돈이 있으면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배가 고파 빵을 훔쳤음에도 어떤 이에게는 벌이 되지만, 천문학적 금액을 탈세한 재벌은 벌을 받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사람 사는 곳에서는 이렇게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10월 니까야강독모임이 삼송테크노밸리 전재성원장 서고에서 열렸습니다. 평소와 달리 준비된 의자가 꽉 찼습니다. 늘 보던 얼굴들입니다. 모임이 열리기 바로 전에 일이십분 짤막한 대화를 하는 것 외 별다른 이야기는 없습니다. 전재성원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다 보면 밤 아홉시가 됩니다. 대부분 집이 먼 곳에 있어서 귀가하기에 바쁩니다. 강독모임 시간 외에 별도의 모임을 갖지 않지만 두 시간 동안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무언의 대화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이번 강독모임의 주제는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절대적인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소금덩어리의 경(loaphalasutta)’(A3.99)에 따르면 두 가지 업보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는 결정론적 업보이고 또하나는 연기론적 업보입니다. 전자는 자이나교 교리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입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업을 지으면 업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경에서 두 가지 케이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된다.”(A3.99)

 

 

비슷비슷해 보이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의 차이입니다.

 

이 두 문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tathā tathā na paisavediyatī)”입니다. 공통적으로 업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법구경에서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 (Dhp120)”와 같은 말입니다.

 

문장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yathā yathā'ya puriso kamma karoti)”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yathā yathā vedanīya aya puriso kamma karoti)”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은 지은 죄악에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이 절대적이 아님을 말합니다.

 

자이나교의 숙명론

 

전재성원장 설명에 따르면 업보에 대하여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는 말은 자이나교의 교리라 했습니다. 마치 1+1은 반드시 2가 되어야 하는 과학의 법칙처럼 기계적으로 들어 맞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업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고 보는 것은 숙명론적 교리라는 것입니다.

 

자이나교의 업설에 따르면, 업을 지으면 업이 물질화 되어 우리 몸에 달라 붙어 있기 때문에 고행을 통해 털어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경직된 교리입니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연기법에 따른 업에 대한 가르침은 유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이나교의 숙명론은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숙명론에 대하여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이나 행복에 대하여 모두 전생의 원인으로 돌렸을 때 어떻게 될까? 모든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면 어떤 행위를 해도 전생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모든 것이 결정 되어 있다면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A3.61)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자이나교에서도 업의 과보를 말합니다. 업의 과보를 받는데 있어서 동일합니다. 그러나 차이 나는 것은 자이나교는 무자비한 결정론이고 불교는 조건에 따라 업보도 다르다는 연기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라 하여 결정론적으로 말했고, 부처님은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라 하여 조건발생적으로 말했습니다.

 

연기법송(緣起法頌)에 따르면

 

업을 짓는 족족 업의 과보를 받는다면 가혹한 것입니다. 전생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름에도 지금 하는 행위가 전생에 저지른 과보에 기인 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행위를 해도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자이나교의 숙명론에 따르면 한번 지은 업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몸에 달라 붙어 있는 업을 사라지게 하려면 고행을 하여 떼어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예수의 은총이 있어야만 원죄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은 업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S56.11)라는 꼰당냐 존자의 깨달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부처님의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합니다.

 

한때 회의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앗사지 존자가 읊은 짤막한 게송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연기법송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송에 따르면 한번 형성된 것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어떤 죄업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재하는 순간 거래가 종료됩니다. 마찬가지로 업에 대한 과보를 받으면 지은 죄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은 업이 몸에 달라 붙어 있어서 고행을 통하거나 절대자의 은총이 있어야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외도의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이를 무작설(akiriya)이라 하여 비판했습니다.

 

동일한 죄악을 지어도

 

부처님의 업의 가르침은 자이나교의 교리처럼 업이 가차 없이 결정론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소금덩어리의 경’(A3.99)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잘 말해줍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동일한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A3.99)

 

 

어떤 사람이 아주 적은 죄악을 저질렀는데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평생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만 산 사람도 적은 잘못으로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같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현세에서 과보를 받는 자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한 업이 불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르면 지은 만큼 누구나 예외 없이 가차 없이 받는다고 합니다. 더구나 한번 지은 업은 고행을 하여 털어 내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 하는 행위는 모두 전생에 지은 업의 탓으로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같은 죄를 지었어도 사람에 따라 과보를 달리 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협소한 도량을 지닌 자에게

 

가난한 자가 빵 한조각만 훔쳐도 처벌 받습니다. 그러나 재벌이 천문학적 금액을 탈세해도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런 불합리가 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무전유죄유전무죄의 전형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소금덩어리의 경에서도 이와 같은 무전유죄유전무죄현상을 연상시키는 비유가 있습니다.

 

적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지옥에 가는 자와 똑 같은 죄악을 저질로도 현세에서 과보를 다 갚아 미래세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어떤 조건에 따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 협소하고 작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작은 것에서 유래한 큰 고통스런 삶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A3.99)

 

 

적은 죄악을 짓고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런 것도 아님에도 죄의식과 죄책감에 사로 잡혀 괴로워할 때 지옥에 있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협소한 도량을 지닌 자라 했는데, 이는 몸과 마음을 닦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소금덩어리의 비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그릇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협소하지 않고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무량한 삶을 산다.”(A3.99)라 했습니다. 무량한 삶을 사는 자, 즉 번뇌를 부순자에게는 적은 죄악도 현에서 받기 때문에 미래에 받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학, 정학, 혜학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삼학은 팔정도의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팔정도를 닦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같은 죄악을 지어도 도량이 넓은 자에게는 악처에 떨어질 만큼 과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받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소금덩어리 비유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 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서 마실 수 없는가?”(A3.99)

 

 



소금덩어리를 작은 그릇에 넣어 물을 부으면 짜서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수대야에 넣는다면 짠 맛이 덜할 것입니다. 아예 흐르는 큰 강에 던져 버린다면 짠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소금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짠맛은 더할 것입니다.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면 짠맛으로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적은 죄악도 사람에 따라 큰 과보를 받을 수 있지만, 같은 죄악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음을 말합니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어떤 자는 지옥에 가고 어떤 자는 지금 여기에서 털어 버리는 것은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하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진 자라면 짠맛이 희석되어서 미래 운명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 그릇을 넓혔기 때문입니다. , , 혜 삼학을 닦으면, 즉 팔정도를 닦으면 마음의 도량이 넓어져서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소금덩어리 비유는 일종의 불교적 구원론

 

불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습니다. 전부 맞다면 자이나교의 숙명론이 되어 버립니다. 불교에서는 반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유동적입니다. 그것은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 사람은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A3.99)라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저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A3.9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소금덩어리의 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매우 유명한 경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원장은 논리적 구조로 되어 있어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꼭 맞는 가르침입니다.”라 했습니다. 경에서 마치 무전유죄유전무죄를 말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에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 또한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몸과 마음을 닦으면 죄업에서 벗어 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소금덩어리 비유는 일종의 불교적 구원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2018-10-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