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자자와 포살의 승가에서 성자가, 증상계학(增上戒學)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8. 9. 29. 12:27

 

자자와 포살의 승가에서 성자가, 증상계학(增上戒學)에 대하여

 

 

배움을 열망하는 자들의 모임

 

아침의 마음은 마치 업경대(業鏡臺)와 같습니다. 이전날에 행위 했던 것이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이전의 행위는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꿈자리가 좋지 않으면 마음의 부담으로 남습니다. 마치 남의 행위를 보면서 나의 행위를 돌아 보는 것처럼, 마치 영화에서 장면이 나의 마음에 투사(投射)되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끼는 것처럼 아침이 되면 업의 거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업경대의 마음은 아침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빠알리니까야를 열었을 때도 나타납니다. 이전의 행위가 후회스러운 것이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정도로라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는 말이 있듯이, 하루라도 빠알리니까야를 접하지 않으면 마음은 오염되어서 부담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구월 들어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이 9 28일 전재성박사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서 열렸습니다. 변함없이 늘 나오는 고정멤버들이 정겹습니다. 그 동안 바쁜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던 도현스님이 참석했습니다. 늘 보면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지만 그렇다고 참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열명 안팍에 지나지 않는 모임이지만 배움의 열망으로 진지합니다. 배움을 열망하는 자들의 자발적 참여 모임이고 자발적 후원 모임입니다.

 




수행자다운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월 두번째 모임에서 핵심적으로 다룬 주제는 계정혜 삼학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행자다운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주제로 되어 있는 경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첫 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드는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의 수용,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의 수용,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의 수용이다. 이와 같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드는 세 가지가 있다.”(A3.81)

 

 

이 경은 앙굿따니라니까야 수행자의 경’(A3.81)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에 대하여 증상계학(增上戒學: adhisīlasikkhā)’이라 합니다.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증상심학(增上心學: adhicittasikkhā)’, 그리고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증상혜학(增上慧學: adhipaññāsikkhā)’라 합니다.

 

초불연에서는 각각 높은 계를 공부짓는 것[增上戒學]’높은 마음을 공부짓는 것[增上心學]’높은 통찰지를 공부짓는 것[增上慧學’’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1) The undertaking of the training in the higher virtuous behavior, (2) the undertaking of the training in the higher mind, and (3) the undertaking of the training in the higher wisdom.’라고 번역했습니다.

 

증상계학(增上戒學: adhisīlasikkhā)에 대하여

 

보다 높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빠알리어 ‘adhi’는 전치사로서 up to; ‘over; on; above’의 뜻입니다. 증상계학의 경우 ‘adhisīlasikkhā’라 하는데 보다 높은(adhi) (sīla)를 익히는 것(sikkhā)’을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학습계율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배움의 경’(A3.88)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지키고, 의무계율을 수호하고,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지켜야 할 학습계율을 수용하며 배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학습계율이라 한다.”(A3.88)

 

 

증상계학에 대한 것을 보면 네 가지입니다. “1)의무계율을 수호하고(pātimokkhasavarasavuto), 2)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viharati ācāragocarasampanno), 3)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anumattesu vajjesu bhayadassāvī), 4)지켜야 할 학습계율을 수용하며 배운다. (samādāya sikkhati sikkhāpadesu)”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D2)에서도 계행의 다발을 설하기 전에 네 가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첫 번째 항의 의무계율(pātimokkha)’이란 비구계나 비구니계와 같은 구족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 항의 올바른 행위의 경계라는 말은 탁발할 때 행위 등의 말합니다. 세 번째 항의 사소한 잘못의 두려움이란 중죄와 같은 소소한 계율을 말합니다. 네 번째의 학습계율(sikkhāpada)’이란 평생 지녀서 배우고 익혀 할 계율을 말합니다.

 

왜 학습계율(sikkhāpada)이라 하는가?

 

불교에서 계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십계처럼 신의 명령이 아닙니다. 계율은 지키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배우고 익혀서 실천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학습계율(sikkhāpada)’임을 말합니다. 이는 빠알리어 ‘sikkhāpada’‘steps of training’의 뜻으로 단계적으로 실천하여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도  ‘training’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초불연은 공부지음이라 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계율을 전공하는 스님을 보았습니다. 대만에서 수학하고 있는 스님은 천태대사의 한역 사분율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습계율이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빠알리 율장과 경정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sikkhāpada’라는 말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식카빠다가 학습계율이라 하여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라 알려 주었으나 학습계율이라는 말이 매우 생소한듯이 받아 들입니다.

 

빠알리어 식카빠다(sikkhāpada)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학습계율로 번역했고, 초불연에서는 ‘학습계목으로, 빅쿠보디는 ‘training’으로 번역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빅쿠보디의 번역은 식카빠다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식까빠다가 학습계율일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학습계율의 경’(A3.85)’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은 학습계율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한 수행승이 계행을 구족하였더라도 삼매가 그만하고 지혜가 그만하다면,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 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것이 무능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근본청정에 순응하는 청정한 삶에 적당하고 계행에 효과가 있고 계행에 확고한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가 그 학습계율을 닦는다면, 그는 세 가지 장애를 완전히 부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다.”(A3.85)

 

 

학습계율에서 중요한 문구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소한 학습계율무능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소한 학습계율(khuddānukhuddakāni sikkhāpadāni: 小小戒)’이란 승단추방죄를 제외한 학습계목을 말합니다. , 승단잔류죄, 참회죄, 고백죄 같은 계목을 말합니다.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여 백 가지 이상 되는 계율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승단 추방이라는 바라이죄를 짖지 않는 한 계를 어기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승단잔류죄를 지었다면 몽둥이로 맞을 정도로 죄를 말하고, 참회죄를 지었다면 재가 든 자루로 맞을 정도의 죄이고, 고백죄는 대중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 하며 용서를 비는 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학습계율에 대하여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tāni āpajjati'pi vuṭṭhāti'pi)”라 하는데 이는 학습계율이 단계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말합니다.

 

개차법(開遮法)과 어떻게 다른가?

 

종종 한국불교 스님들에게서 개차법(開遮法)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하듯이, 개차법은 상황에 따라 계목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합니다. 세속오계라 일컬어지는 살생유택(殺生有擇)’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최근에는 조계종 총무원에서 불자들 신행지침으로 공표된 불음주계에 대한 것으로 취하게 마시지 않기 운동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개차법은 없습니다.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키지 못하는 것을 지키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계율이기 때문에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살생하지 말라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Adinnād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 합니다. 학습계율(sikkhāpada)으로서 계율을 지키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불음주계와 관련해서는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라고 독송합니다.

 

평생 지니고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학습계율은 평생 지니고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 법회에서는 삼귀의와 함께 반드시 필수적으로 함께 독송합니다. 보름에 한번 있는 포살일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테라와다 승가에서는 포살일에 학습계율을 함께 독송합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니까야 학습계율의 경서문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매 반월마다 이익을 원하는 양가의 자제들이 배우는 백오십 가지의 학습계율이 독송된다.” (A3.85)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구족계라는 것이 스님이 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님을 말합니다. 재가불자가 수계하는 날 오계를 받았다고 하여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회때 마다 받아지니고 포살 때 마다 받아 지니듯이, 마찬가지로 출가 수행자들 역시 보름에 한번 구족계를 다시 받아 지녀야 함을 말합니다. 이는 계율이 개차법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학습계율이기 때문입니다.

 

보름마다 포살일에 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세 가지 배움의 토대, 즉 증상계학, 증상심학, 증상혜학에 섭수되는 것이 학습계율이라 했습니다. 학습계율 없이는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자자와 포살의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학습계율을 늘 받아 지녔을 때 보다 높은 삼학이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바라이죄를 짓지 않는 한 크고 작은 사소한 학습계율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는 그것이 무능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Na hi mettha bhikkhave abhabbatā vuttā)”(A3.85)라 했습니다. 여기서 무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능은 빠알리어 ‘abhabbatā’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inability; impossibility’의 뜻입니다. 이 무능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무능은 고귀한 참사람이 될 수 없는 무능을 의미한다.”(Mrp.II.348)라 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나는 그것 때문에 [성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나니라 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주석적 번역을 했습니다. 빅쿠보디는 Because I have not said that he is incapable of this.”라고 번역했습니다.

 

바라이죄를 제외한 승단잔류죄 등 사소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성자가 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참회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는 은폐되기 쉽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면 감추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 승가에서는 보름마다 포살일에 학습계율로서 계본을 외웠습니다. 계본을 외우면서 잘못을 참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포살일에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S8.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름마다 포살일에 학습계율을 낭송하고 잘못을 참회 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增上戒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계행을 바탕으로 하여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增上心學)도 이루어지고,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增上慧學)도 이루어집니다. 모두 학습계율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학습계율을 닦는다면, 그는 세 가지 장애를 완전히 부수고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다.”(A3.85)라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아라한이 되어 깨달음이 완성됩니다.

 

소떼들의 뒤를 따르는 당나귀처럼

 

깨달음이 단계적으로 완성되듯이 학습계율도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지키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아예 지키지 않는다면 오계와 구족계는 수계할 때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삼학에 대하여 우리는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에 치열한 의욕을 일으켜야 하고,..”(A3.81)라 했습니다. 배움에 대한 치열한 의욕을 일으켰을 때 보다 높은 계학, 보다 높은 정학, 보다 높은 혜학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오계와 구족계를 단지 통과의례용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한 당나귀가 소떼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도 소이다. 나도 소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당나귀에게는 소와 같은 모습, 소와 같은 목소리, 소와 같은 발걸음이 없기 때문에, 소떼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도 소이다. 나도 소이다.’라고 단지 생각할 뿐이다.”(A3.81)

 

 

부처님은 학습계율을 잘 지켜 계정혜 삼학이 완성되어 가는 제자들을 소떼로 비유했습니다. 반면 학습계율을 지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계정혜 삼학도 닦지 않는 수행승에 대하여 당나귀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문장은 청정도론에도 보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계행을 지키지 않는 수행승에 대하여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 했습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아서 수행승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 자에 대하여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과 속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비구라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Vism.1.154)라 했습니다.

 

당나귀 같은 반승반속(半僧半俗)

 

계행을 지키지 않는 무늬만 승려가 있습니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지만 재가자들도 하찮게 여기는 부업에 몰두하는 승려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들 반승반속에 대하여 한국의 재가불자들은 스님이라 하여 합장하고 공경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소떼들의 뒤를 따르는 당나귀와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당나귀는 소와 확연히 구분됩니다.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입니다. 소는 사람에게 우유를 공급해 주어서 사람 못지 않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당나귀는 말같이 보이지만 말도 아니어서 짐이나 부리는 하찮게 여기는 동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당나귀는 어리석은 자의 상징처럼 간주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소와 당나귀는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반승반속의 승려는 당나귀와 같습니다. 이쪽 저쪽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음에도스님이라 한다면 마치 나는 스님이다. 나는 스님이다.”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계행도 엉망이어서 보다 높은 계행에 대한 배움도 없고, 보다 높은 마음에 대한 배움도 없고, 보다 높은 지혜에 대한 배움도 없다면 그에 대하여 그는 수행승의 참모임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수행승이다. 나는 수행승이다.’라고 단지 생각할 뿐이다.”(A3.81)라고 했습니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궁금한 것은 질문하고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들은 것을 모두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1시간 반 가량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거의 네 시간 이상 소요됩니다. 못다 쓴 글은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녹음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들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재성박사가 이렇게 모임을 지속하는 것도 일종의 사회에 대한 회향으로 봅니다. 번역일에 바빠서 눈코 뜰새 없지만 이제까지 휴가기간을 제외하고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년에 율장 통합본을 완성하고 나서부터는 사람들과 접촉을 많이 할 것이라 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 번역이 마무리됨을 의미합니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통합본의 경우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입니다. 상윳따니까야는 7권이 한권으로, 최근에 출간된 앙굿따라니까야는 9권이 한권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디가니까야와 맛지마니까야도 통합본입니다. 사부니까야가 모두 통합본입니다. 여기에 율장까지 통합본이 된다면 누구나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어서 누구나 쉽게 가르침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열망하는 자들이 매달 두 차례 서고에 모입니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궁금한 것은 질문합니다. 그러나 질문은 짧게 합니다. 하나라도 더 많이 듣는 것이 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루일과를 마치고 삼송역까지 걸어가면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한달에 두 번 있는 강독모임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이면 너무 자주 열려서 부담스럽고, 한달에 한번씩이면 너무 오래 시간인 것 같아서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주 내지 삼주에 한번 정도라면 딱 적당합니다. 다음 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전재 될지는 가 봐야 압니다.

 

 

2018-09-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