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옳은가?
선(善)과 불선(不善)에 대하여
고행적인 삶이나 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옳은 것인가? 9월 들어 첫번째로 열린 니까야강독모임 주제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섬김의 경’에서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참으로 이 모든 것,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유익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A3.78)라고 말합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찾아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부처님에게 말한 것입니다. 이미 답을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가 설명해보라.”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난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과 불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을 실천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증가하고 착하고 건전한 것이 감소한다면, 이와 같은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무익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을 실천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 증가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감소한다면, 이와 같은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유익한 것입니다.”(A3.78)
경에서 키워드는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꾸살라( kusalā)’와 ‘아꾸살라(akusalā)’를 번역한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꾸살라에 대하여 ‘유익한 법[善法]’이라 번역했고, 아꾸살라에 대해서는 ‘해로운 법[不善法]’이라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꾸살라에 대해서는 ‘wholesome’이라 했고, 아꾸살라에 대해서는 ‘unwholesome’이라 번역했습니다.
꾸살라와 아꾸살라
초기경전에 따르면 꾸살라와 아꾸살라는 십선법과 십악법으로 설명됩니다. 맛지마니까야 ‘올바른 견해의 경’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어떠한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의 뿌리이고,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입니까?”(M9)라고 말하며 아꾸살라, 즉 악하고 불건전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입니까? 벗들이여,
1)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3) 삿된 음행을 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5) 이간질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6) 욕지거리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7) 꾸며대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8) 욕심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9) 분노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10) 삿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M9)
악하고 불건전 것의 반대가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열 번째 항목을 보면 삿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어떤 견해도 가르침이 아닌 것은 사견이라 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했습니다. 천수경에서는 열 번째 항에 대하여 ‘치암중죄금일참회’라 하여 단순하게 ‘어리석은 행위’라 했으나 초기경전에서는 구체적으로 사견(邪見)을 갖는 것, 즉 가르침 아닌 것을 갖는 것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꾸살라, 즉 착하고 건전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벗들이여, 어떠한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까? 벗들이여,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5)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6)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8) 탐욕이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9) 분노가 없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10) 바른 견해가 착하고 건전한 것입니다.
이것들을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M9)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나라마다 다르고 전통에 따라 다르고 문화에 따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선이라 생각하는 것이 불선이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불선이라 생각하는 것이 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선과 악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 증가하면 선이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증가하면 악이라 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고행적인 삶, 청정한 삶, 이상에 헌신하는 삶이라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규범과 금계(sīlabbata)에 대하여
경에서는 네 가지 삶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것 (sīlabbataṃ), 고행적인 삶(jīvitaṃ), 청정한 삶(brahmacariyaṃ), 이상에 헌신하는 삶(upaṭṭhānasāraṃ)을 말합니다.
규범과 금계를 지키는 삶을 계금취견에 빠졌다고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벌받을까 봐 두려워한다면 불선법이 증장될 것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계율에 양심을 가책받는다면 지키지 않음만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여 “계율을 지킨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정언명령처럼 규범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규범과 금계(sīlabbata)에 대하여 족쇄로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계금취견을 가지고 있으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류자의 조건이 유신견과 계금취견과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타파입니다. 규범과 금계에 대하여 집착을 가지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증장되기 때문에 불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계율은 학습계율입니다. 평생 받아 지녀 배우고 익혀 나가면서 완성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합니다.
고행자의 자만에 대하여
고행적인 삶(jīvita)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 삶을 뜻합니다. 도덕적인 삶도 도가 지나치면 고행이 됩니다. 고행을 하는 자에게 자만이 생겨나면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됩니다. 이는 아홉 가지 자만에서 우월한 중에서 우월한 자만으로 나타납니다.
자만에는 태생적 자만, 부자의 자만, 배운 자의 자만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수행자의 자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수행자인데” 또는 “내가 고행자인데”라는 자만일 것입니다. 특히 구만에서 정점에 있는 우월중우월의 케이스가 있습니다. 어느 출가수행자가 계행과 두타행을 통하여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여긴다면 이는 고행적인 삶에 대한 자만입니다. 고행적 삶에 대한 자만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 헌신하는 삶은 옳은가
수행자라면 누구나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바랍니다. 빠알리 원어가 의미하듯이 브라흐마짜리야는 범행(梵行)을 뜻합니다. 청정범행이라고도 합니다. 청정한 삶을 살면 범천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청정한 삶을 살아도 그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향한다면 악행이 됩니다.
이상에 헌신하는 삶(upaṭṭhānasāraṃ)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로지 사회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밖으로만 향할 때 그것이 아무리 지고한 목표라 하더라도 악하고 불건전한 결과가 초래한다면 악행이 됩니다.
모든 선악의 기준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 증가하면 선이 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증가되면 악이 됩니다. 지금 청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여, 이상이 높은 삶에 헌신한다고 하여 모두 선이라 볼 수 없습니다.
지혜가 수반되는 삶을 살아야
착하게만 살아서는 안되고 건전하게 살아야 합입니다. 건전하게 살려면 지혜롭게살아야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꾸살라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단순히 착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착하면서도 건전해야 꾸살라의 뜻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꾸살라는 어떤 의미일까?
꾸살라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면 제1의 뜻이 ‘kammically wholesome’이라 되어 있습니다. 행위에 있어서 건전해야 함을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가 건전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건전한 행위는 무엇에 기반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일 것입니다.
꾸살라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악하고 불건전하고 어리석은 것 아꾸살라입니다. 이는 마음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지금 대상에 대하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행한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되어 아꾸살라가 됩니다.
누구든지 집착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가지고 행동할 때 그 행동은 건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탐, 진, 치 등에 매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착하기만 하고 지혜가 없다면 탐, 진, 치로 사는 것이 되어 결국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되어 악행을 하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만큼 위대한 진리는 없다.”
지금 아무리 착한 삶을 살아도 지혜가 없으면 악처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없다면 반드시 탐, 진, 치에 물들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생동안 착하게 살아도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비교해 보면 악행이 더 많을 것입니다. 착하게 살았다고 하여 모두 지혜롭게 산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지지 않고 법을 지키며 착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탐, 진, 치의 세월을 보냈다면 잘못 산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궁극적으로 무상, 고, 무아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강독모임에서 “무상, 고, 무아만큼 위대한 진리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자가 가장 착하고 건전하고 지혜롭게 사는 자라 볼 수 있습니다.
2018-09-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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