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가 닥쳤을 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 많은 비유가 나옵니다. 가르침을 비유를 들어 설명 했을 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 비유는 일상 생활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 중에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A3.76)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라 합니다. 그리고 갈애는 수분이라 합니다. 본문과 주석을 보아야만 정확하게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7월 첫번째 강독모임에서는 ‘존재의 경’을 독송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존재, 존재’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서 존재가 됩니까?”
[세존]
“아난다여, 감각적 쾌락의 세계라는 결과를 낳는 업이 없이도 감각적 쾌락의 존재가 시설될 수 있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시설될 수 없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래서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에게는 하층의 세계에 의식이 확립된다. 이와 같이 해서 미래의 재생존재로 태어난다.”(A3.76)
이 경은 앙굿따라니까야 ‘존재의 경(A3.76)’에 실려 있습니다. 삼계 중에 욕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는 경에서는 하층의 세계, 중층의 세계, 상층의 세계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의 세계라 부르는 욕계는 하층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모든 세계는 공통적으로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이라 했습니다. 중층의 세계라는 색계도 무명과 갈애의 중생들이고, 또한 상층의 세계라는 무색계도 역시 무명과 갈애의 중생들이라 합니다.
삼계는 윤회하는 세상입니다. 천상에 태어난 천신들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하층의 세계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합니다. 공덕을 쌓으면 선처에 태어나고 공덕을 쌓지 않으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kammaṃ khettaṃ, viññāṇaṃ bījaṃ, taṇhā sineho)”라는 가르침으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존재(bhava)는 삼계와 육도를 윤회합니다.
유식학의 토대가 되는 경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이 경은 유식학의 토대가 되는 경이라 했습니다. 이는 경에서 ‘의식은 종자이다(viññāṇaṃ bījaṃ)’라는 말에서 기원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서 식이 윤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서 부처님이 싸띠라는 수행승을 나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싸띠비구는 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오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생겨난 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M38)라며 호되게 질책했습니다.
식이 윤회한다는 것은 외도의 견해입니다. 어떤 변치 않는 영혼체와 같은 마음이 있어서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꾼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식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된 식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도 조건적으로 생겨난 다는 것”이라 하여 마음은 조건발생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조건발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말합니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라 했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발생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연기법이라 하는데 이는 조건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을 인연과(因緣果)라고도 하는데 이는 원인(hetu)과 조건(paccaya)과 결과(phala)에 따른 것입니다.
유식학에서는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유식학에서는 제7식과 8식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 하는데 이 식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에서 ‘의식은 종자이다(viññāṇaṃ bījaṃ)’라 했는데 이 문구가 유식학의 토대가 된다고 합니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인 존재
앙굿따라니까야 존재의 경은 존재(bhava)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윤회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넓게는 삼계윤회를 말하고, 좁게는 육도윤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존재이든지 무명과 갈애 때문이라 합니다. 무명과 갈애가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경에서는 “무명의 장애가 있고 갈애의 결박이 있는 뭇삶(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장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입니다. 무명은 가려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갈애는 묶여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인 존재는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덕을 지으면 보다 높은 세상에 태어나고, 악행을 하면 악처에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무명과 갈애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kammaṃ khettaṃ, viññāṇaṃ bījaṃ, taṇhā sineho)”라 했습니다.
여기서 ‘업은 밭이다.(kammaṃ khettaṃ)’라 했습니다. 왜 업이 밭이라 했을까?주석에 따르면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업이 자라는 장소이기 때문에 밭이다.”(Mrp.II.334)라 되어 있습니다. 행위에 따라 농부도 되고 도둑놈도 된다는 가르침이 있는데,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남을 말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밭(khetta)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 ‘의식은 종자이다. (viññāṇaṃ bījaṃ)’라 했습니다. 왜 의식을 종자라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그것과 동시에 유위적인 형성의 의식이 싹트는 장소이기 때문에 종자이다.”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식(viññāṇa)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재생연결식이고 또 하나는 현생에서 마음입니다. 의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보았을 때 이는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는 십이연기에 따른 것입니다. 형성이라는 것은 업과 동의어입니다.
어떤 존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나는데, 이 세 가지 대상 중의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조건발생하는 식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전 생에 공덕을 쌓아 공덕의 밭을 잘 일구었다면 그 세계에 형성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건발생하는 식에 대하여 부처님은 종자(bīja)라고 했습니다.
경에서 ‘갈애는 수분이다.(taṇhā sineho)’라 했습니다. 왜 갈애를 수분이라 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보살피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수분이다.”라 되어 있습니다. 갈애에 대하여 사성제에서는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 했습니다. 갈애가 태어남의 요인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Dhp.154)라며 집짓는 자가 갈애라 했습니다.
경에서 갈애를 수분으로 본 것은 업을 밭으로 보고 의식을 종자로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밭에 씨앗을 심으면 발아합니다. 여기에 적당한 수분이 있어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수분이 없는 척박한 땅이라면 씨앗이 떨어져도 발아가 되지 않거나 성장이 부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진 땅에서 좋은 종자가 적절한 수분을 취하면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 밭은 다름 아닌 삼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현재 나는 과거 전생의 업보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업생(業生)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서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M135)라 말씀하신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업이 자신이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kammassakatādiṭṭhi)’을 말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왜 나는 이런 성향일까? 이모양 이꼴로 생긴 것도 모두 전생의 업보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업생입니다. 전생이 지은 행위로 인한 과보가 익어서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형성되기 위해서는 업(kamma)뿐만 아니라 식(viññāṇa)과 갈애(taṇhā)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삼계 중의 하나에 태어나고, 육도 중에 한 곳에 태어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이전 생에 공덕의 밭을 잘 갈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회찬 의원의 투신에 대하여
최근 정의당 원내총무 노회찬 의원이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친구로부터 후원금 형식으로 받은 오천만원 때문에 문제가 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일반사람들이라면 사과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높은 도덕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자에게는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도덕적 가치를 먹고 사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노회찬 의원도 평생 청정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오천만원 받은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결정적으로 받지 않았다고 부인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거짓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거짓말이 탄로가 났습니다. 이 거짓말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노회찬 의원이 불교공부를 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행위를 해도 아무 생각없이 합니다. 말을 해도 아무 생각없이 거리낌 없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습니다. 그러나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말을 함부로 했을 때 그에 따른 대가가 반드시 따릅니다. 노회찬 의원이 돈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인코져 물었을 때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솔직하게 “돈을 받았습니다. 참회합니다.”라고 하면 용서 되었을지 모릅니다. 또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가르침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특히 오계준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도덕덕 가치관입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법회에서는 법회할 때 마다 반드시 오계준수서약을 낭송합니다. 요즘은 대승불교에서도 확산되는 추세라 합니다.
부처님은 업이 밭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현존하는 뭇삶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어진 환경에서 밭을 잘 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밭을 황페화 하는 이도 있습니다.
밭을 잘 간다는 것은 공덕행을 말합니다. 공덕을 쌓으면 선처에 태어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공덕이 다하면 이전 생에 지어 놓은 악행의 과보가 익어서 악처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계에서 사는 존재는 업과 의식과 갈애로 인하여 끊임 없이 윤회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은 위기가 닥쳤을 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평소 오계를 지키는 것을 생활화 했을 때, 예를 들면 거짓말 상황이 닥쳤을 때 거짓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밭을 일구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만일 그가 오계를 지키지 않아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한다면 자기가 살아가는 밭에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불망어계 역시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처하면 거짓말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계준수를 철저하게 지키겠다고 서약했다면 솔직하게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오계는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학습계율(sikkhāpada)이라 합니다. 그래서 불망어계에 대하여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라 합니다. 오계는 평생 지니고 학습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계율입니다.
마음의 밭을 갈면
농부는 밭을 갈아 먹고 삽니다. 밭을 잘 갈아 수확이 많다면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밭을 간다고 했습니다. 바라문이 “그대는 밭을 가는 자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대가 밭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라고 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마음의 밭을 간다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몸을 수호하고,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stn80)
2018-07-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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