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승이 한국에 온 까닭은? 도래승불교의 파워
달마는 동쪽으로 갔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을까? 영화 제목에도 있는 말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현스님에 따르면 인도불교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대하여 문화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는 마치 물과 같다고 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전래 될 때 인도의 불교문화가 중국의 전통문화 보다는 훨씬 높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동쪽으로 간 불교는 크게 성공했다는 것이다. 반면 서쪽으로 간 불교는 문화적 장벽에 막혀 더 이상 서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자현스님은 그리스문화를 들고 있다. 그리스 문화로 인하여 불교는 서진을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동아시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이 가장 끝이긴 하지만 한국은 대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땅끝’처럼 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사실상 ‘섬’이나 다름 없다. 북한에 막혀 있어서 대륙과 육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항공로가 있기 때문에 섬이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섬처럼 오랫동안 고립되어 온 한국불교에 서쪽에서 온 승려가 있다. 미얀마 ‘빤딧짜’ 스님이다. 빤딧짜 스님은 왜 동쪽으로 왔을까?
빤딧짜 스님 친견을 앞두고
빤딧짜 스님을 만났다. 3월 28일 둔촌역 부근에 있는 담마야나 선원에서 김도이, 유지현, 안석자 법우님과 함께 만났다. 만남은 김도이 선생이 주선 했다. 담마마마까 집중수행을 다녀 온 후에 도반들이 함께 모일 자리가 있었는데 그 때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김도이 선생에 따르면 빤딧짜 스님은 외국인 승려로서 보기 드문 선지식이라 했다.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온 여러 훌륭한 스님들도 많지만 외국인 승려가 한국에 와서 포교를 하면서 수행지도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빤딧짜 스님의 친견을 앞두고 책을 읽었다. 그것은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이라는 제목을 가진 스님의 법문집이다. 담마야나에 다녔던 안석자 선생이 선물로 준 것이다. 친필 사인이 담겨 있는 책을 최근에야 보았다. 책을 보면서 이제까지 알음알이가 정리 되는 것 같았다. 교학과 수행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리 된 책을 보면서 스님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책은 스님의 역량이 담긴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님이 속한 종단의 전통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담마야나 선원은 어디에
담마야나 선원은 어디쯤 있을까? 행정구역상 주소는 ‘서울 강동구 양재대로 1313번지’에 있다. 바로 옆에는 올림픽 공원이 있다. 지방에서 자동차로 온다면 서울외곽순환도로 ‘서하남 IC’에서 진입하면 10분 이내로 갈 수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둔천동역에서는 10분 거리에 있다.
담마야나 선원은 5층짜리 빌딩에 자리 잡고 있다. 빌딩 1층에는 국민은행이 있다. 건물 입구에는 ‘(사)법승(法乗) 담마야나선원’이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영어로 ‘THERAVADA ORDER’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말은 ‘테라와다 종단’이라는 뜻이다. 담마야나 종단이 있는 곳이다. 또 입간판에는 한글로 ‘위빳사나’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곳이 수행처인 것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선원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선원 입구에는 담마야나 선원을 알리는 문구와 함께 ‘지혜개발 심리변화 인간성장의 길’이라는 또 하나의 문구가 보인다. 선원에서는 5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 겸 간이 주방이 있는 곳에 하나의 상징적인 문구가 보였다. 그것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라는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이다. 한역으로는 ‘불방일정진(不放逸精進)’이라 한다. 전재성 선생은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는 사띠와 동의어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새김을 잃어 버리지 밀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일까 담마야나 선원에서는 이 문구에 대하여 한글로 “잊지 않음으로 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하라.”라며 주석적 번역을 해 놓았다.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인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는 담마야나 선원의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문구라 볼 수 있다.
마하시전통의 수행처
스님과의 친견시간은 9시부터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선원 내의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방이 여러 개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수행홀에 들어가 보았다. 여느 수행처와는 다르게 커다란 걸게 벽화가 눈에 띈다. 아마 이곳에서 법문도 하고 수행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또 다른 수행처가 있다는 것이다. 5층짜리 건물로서 꾸띠도 있고 수행홀이 있다. 그곳에 스님의 거처가 있다.
벽에 인증서가 하나 걸려 있다. 마하시사야도의 사진과 함께 ‘The Title of Mahasi Nayaka’라는 문구가 보인다. 마하시 센터에서 수여한 인증서이다. 빤딧짜 스님이 마하시 수행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지 게시판을 보았다. 선원 일정 등 알림종이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공양청’이다. 3월 아침과 점심 공양자 명단이 적혀 있는 것이다. 마치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한달치 공양제공자 명단을 보는 것 같다. 스님의 일정을 보니 3월 18일부터 3월 25일까지 미얀마에 있었다. 면담 날자가 28일이기 때문에 한국에 온지 3일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살인미소의 호감형 젊은 스님
오전 9시가 되었을 때 스님이 들어 왔다. 휜칠한 키가 인상적이다. 얼굴은 희고 미남형이다. 더구나 젊다. 한눈에 보아도 ‘호감형’이다. 한국불자들이 좋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춘 것 같다. 스님은 비주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법문도 잘 하고 수행지도도 잘 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담마야나 선원은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여러 곳이 있다. 최근에는 세종시 인근에 만오천평 규모의 수행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스님과 접견실에서 마주 앉았다.
스님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자애로운 미소라 볼 수 있다. 이런 미소를 요즘말로 ‘살인미소’라 할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선원에 갈 때는
방문한 네 명은 먼저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앉은 상태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는 테라와다식 삼배이다. 세속적 나이가 훨씬 많은 백발 또는 반백인 사람들이 머리를 바닥에 댄 것이다. 그러자 스님은 축원을 해 주었다. 우리말로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장수하고, 용모가 아름답고,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행복하길” 바라는 축원문이다.
스님친견을 앞두고 공양물을 준비 했다. 가급적 집에 있는 것을 가져 가고자 했다. 그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했다. 김치반포기와 영지버섯을 넣고 끓인 물 한패트병을 준비 했다. 미얀마 수행기와 순례기를 인쇄-제본한 책 ‘수행의 나라 미얀마에서’와 불교명상치유음악 씨디도 한장 올렸다. 그리고 봉투도 하나 준비 했다. 소액이지만 능력껏 한 것이다. 어느 선원에 가든지 빈손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기본예절이다. 보시에 의존하는 곳이 선원이다. 작은 것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올리면 된다.
봉투를 올릴 때 모두 함께 올렸다. 작은 선반에 봉투를 올려 놓고 건네자 스님은 축원 해 주었다. 스님은 먼저 빠알리어로 삼보공덕에 대한 찬탄 게송을 읊었다. 이를 따라 했다. 빠알리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가며 했다. 다음으로 공덕회향 게송문을 읊었다. 내용은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주변 사람들 은혜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을 돌렸다.
‘간난아기론’에 대하여
친견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스님의 책을 읽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질문도 준비 했다. 단지 스님의 얼굴만 보러 간다면 바쁜 일정을 소화 해야 하는 스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 고민 등을 이야기한다면 피곤해 할 것이다. 그래서 대중공양식으로 준비하고 질문할 것도 생각해 보았다.
스님에게 ‘간난아기론’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불교닷컴에 연재된 모 교수의 칼럼에 대한 것이다. 교수는 윤회를 부정했다. 윤회가 있다면 자손에게 디엔에이(DNA)를 전달하는 ‘생물학적 유전’과 문화유전자라 볼 수 있는 밈(MEME)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문화적 유전’이 있을 뿐이라 했다. 교수는 또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습니다.”라는 식으로 글을 써 놓았다.
스님은 교수의 간난아기론에 대하여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사견(邪見)이라 했다. 그런 것 같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윤회가 참인지는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금방 확인 할 수 있다. 아비담마상가하나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 또는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명쾌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 포착된 것만을 믿고 오로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을 믿으려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교수는 윤회를 믿지 않아도 착하고 건전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대개 막행막식하며 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금하는 그 어떤 일도 서슴없이 행할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단멸론자에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교수는 내생과 윤회를 믿지 않아도 사회적 도덕적 규범에 따라 착하고 건전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마음은 본래 제멋대로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이는 법구경에서 마음에 대하여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마음은 내 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이는 부처님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제어하고 계발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을 안다면 교수가 말한 것처럼 간난아기론과 같은 사견은 발 붙이지 못할 것이다.
기복을 해도 같은 기복이 아니다
스님에게 미얀마 불교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미얀마 스님들도 소유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에 스님은 미얀마스님도 소유한다고 말했다. 재가불자가 빅쿠에게 기부할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승가에 기부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빅쿠에게 기부하는 것이라 했다.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에서 빅쿠에게 승원을 기증하면 빅쿠의 소유로 된다고 한다. 빅쿠가 죽으면 상좌에게 계승된다고 한다. 그러나 빅쿠의 가족에게 물려 주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미얀마나 한국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나 차이 나는 것이 있다. 미얀마 스님들은 돈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도들이 사찰위원회를 구성하여 신도들이 사찰의 재정을 관리한다고 한다.
미얀마 불자들의 신심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대부분 기복불교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기복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같은 기복이긴 하지만 미얀마 기복불교는 ‘알고 기복한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바라는 것이다.
스님은 기복에 대하여 한가지 예를 들었다. 한국의 불자들은 입으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며 기도하지만 그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염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불자들은 부처님의 ‘아홉 가지 공덕’을 생각하면서 염불한다고 한다. 그것은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의 존귀한 님이다.”(S11.3)와 같은 불수념(佛隨念)이다.
미얀마나 한국이나 일반불자들 대부분은 기복에 의존한다. 그러나 기복을 해도 같은 기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교육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의 불자들이 뜻도 모르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암송하지만 미얀마 불자들은 멧따경(慈愛經) 등 초기경전을 암송하는 것도 교육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빤딧짜 스님은 왜 한국에 왔을까?
스님은 왜 한국에 왔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수 많은 사람이 가졌던 것 같다. 검색해 보니 교계 신문에서도 스님이 한국에 온 이유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곳 담마야나 선원에서도 스님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도 스님이 한국에 온 이유에 대하여 언급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 들은 것만 못할 것이다.
스님이 처음 한국에 온 것은 2001년도라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이다. 스님이 1971년생이니 나이 30살 때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런데 한번 한국에 오고나니 이후로 계속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계속 초청한 것이다.
스님이 한국에 처음 오게 된 것은 몸이 좋지 않아 치료차 온 것이라 했다. 부산에 있는 한보광스님이 초청한 것이라 한다. 한국에 처음 와서 약 7개월 가량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한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스님은 한국에 와서 처음 3개월 간은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마치 아기가 한국어를 배우듯이 3개월이 지나고 나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가 7개월째 되었을 때 의사소통하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
스님이 한국어를 빨리 배우게 된 것은 주변에 미얀마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오로지 한국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린 아기가 엄마에게 말을 배우듯이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하면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한국어는 유창하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지 18년 되었으므로 한국인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깊이 있는 이야기는 힘들다. 그런데 스님의 한국어 실력은 대학생 수준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법문도 하고 글도 쓰고 수행지도도 하는 것이다.
스님은 포교에 대한 원력을 세웠다. 이는 양곤에 있는 마하산띠수카(Mahasantisukha) 불교대학원에서 2004년 해외 포교학을 이수했기 때문이다. 포교학은 2년 과정이라 했다. 스님에 따르면 그때 당시 20명이 졸업했다고 한다. 각자 임지를 찾아 떠나 포교하면 되는 것이다.
스님은 유럽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스웨덴이라 했다. 그런데 2001년 이후 한국에 처음 인연 맺은 이후 한국에서 계속 초청이 들어 오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승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스님에 따르면 한국을 제외하고 성공한 곳이 별로 없다고 한다. 미국으로 떠난 승려는 환속했다고 한다. 대만으로 떠난 승려는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미얀마 불교는 전세계 불교를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미얀마 불교가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얀마에서 제5차 결집과 제6차 결집을 주도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 미얀마에서는 삼장법사가 있어서 수행은 물론 교학적으로도 가장 앞서 가고 있다.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이 스리랑카라 하지만 지금은 미얀마로 바뀐 듯 하다. 이와 같은 미얀마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포교사를 보낸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이다. 빤딧짜 스님은 포교하기 위해서 한국에 온 것이다.
추락하는 한국불교에서
해마다 승속을 막론하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미얀마로 떠난다. 이유는 한국불교에서 한계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방에서 십년, 이십년 공부해도 진척이 없었는데 ‘미얀마에 갔더니 길이 보이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이를 말해 준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부터 미얀마 수행바람이 불었다. 이후 90년대와 이천년대에도 열풍이 불어 해마다 미얀마로 수행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소개 된 것은 불과 이삼십년 밖에 되지 않는다. 과연 테라와다불교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현재 한국불교는 기로에 서있다. 2015년 종교인구 총조사에서 불교의 경우 3백만명이 빠져 나갔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불자들이 ‘불교를 버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 같은 시기에 개신교는 숫자가 늘어 났다. 그래서 한국불교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데드크로스(Dead Cross)’가 발생했다. 개신교에게 역전 당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불교의 추락은 가속화 될 것이다. 주식시장에서도 데드크로스가 발생하면 하향추세가 지속된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락하는 한국불교에 날개가 없는 것 같다. 날개 없다면 추락은 가속화 될 것이다. 추락을 멈추게 하려면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현재 방법으로 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부처님 계율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테라와다 불교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불교에 기성종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테라와다 불교와 같은 새로운 종단도 있다. 비록 숫적으로는 미미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청정성’이다. 가급적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고 계율정신을 잊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그런 모습을 테라와다 불교에서 보았다.
한국에는 여러 종파의 테라와다 불교가 들어와 있다. 흔히 말하는 테라와다 3국이라 불리우는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의 불교가 들어와 있다. 자국의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들어 온 것이기도 하지만 포교를 목적으로 들어 온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담마야나 선원을 들 수 있다.
빤딧짜 스님은 2009년 이후 한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2016년에는 세종시 인근에 만오천평 부지를 확보하여 수행센터 건립 계획도 가지고 있다. 선원은 물론 강원까지 갖춘 총림의 성격이 될 것이라 한다. 어느 정도 정착 되면 미얀마의 고승도 초청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원력은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곳곳에 담마야나 선원이 건립되었다. 앞으로 십년이나 이십년 후에는 놀랍게 발전 되어 있을지 모른다.
구법승 불교와 도래승 불교
한국불교가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경우 불교인구는 761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4.7%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개신교가 967만명으로 18.7%이고, 천주교가 389만명으로 7.5%에 달해서, 두 종교를 합하면 1,356만명으로 26.2%를 차지하여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데드크로스가 발생했으니 불교의 쇠락은 더욱 더 가속화 될 것이다.
한국불교가 추락하고 있다. 기성종단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기성종단은 개혁대상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개혁대상이 스스로 개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지난 3년 동안 한국불교에 만연된 적폐청산이 실패로 돌아 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 기성종단에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대중들은 부처님 가르침과 계율대로 사는 청정한 종단을 원한다. 이럴 때 시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 것이 테라와다불교이다.
빤딧짜 스님은 도래승이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의 도래승이다. 이와 같은 도래승은 삼국시대 때도 있었다.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는 인도의 도래승이었다. 마라난타는 384년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와서 불교를 전파했다. 오늘날 법성포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밖에도 신라에 불교를 전한 묵호자도 도래승이었다. 그때 당시 상황으로 보아 대승불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초창기 때는 도래승 불교가 되기 쉽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도래승불교였다. 주로 서역에서 온 스님들이다. 이와 같은도래승 불교의 특징은 번역작업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서역승인 구마라집이 대표적이다. 이후 중국에서 구법승이 법을 배우로 인도로 떠났다. 현장스님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경우 테라와다불교에 있어서 구법승과 도래승이 혼재하고 있다. 각자 법을 펼치고 있지만 힘에 있어서 차이가 발견된다. 구법승이 미얀마에 가서 배워와서 법을 펼쳐도 한계가 있다. 그것은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고작 이삼십년 역사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도래승의 경우 수천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수행과 교학에 있어서의 힘으로 작용한다. 빤딧짜 스님이 한국에 온 것은 개인적으로 왔다기 보다는 미얀마의 수천년 테라와다 전통을 통째로 가져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장 도래승불교는 구법승의 불교와 차별화 된다. 구법승이 미얀마에서 배워 와서 법을 펼치지만 역사가 짧기 때문에 힘이 부족하다. 반면에 도래승의 불교는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수천년 전통이 고스란히 실려 있기 때문이다.
빤딧짜 스님도 도래승이다. 도래승이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이 번역작업이듯이, 빤딧짜 스님 역시 바른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같다. 그래서 2006년 까지는 한국말을 알아도 한국말로 법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설픈 한국어로 법문했을 때 가르침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책을 선물받고
담마야나에서 세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책제목은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달빛처럼 꽃향기처럼’이다. 책의 제목이 아름답다. ‘여래가 오신 길’은 십바라밀에 대한 것이고, ‘보물산 둘레길’은 불법승 삼보와 관련된 법문을 엮은 것이고, ‘달빛처럼 꽃향처럼’은 자애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밖에도 초전법륜경과 관련된‘붓다의 첫 사자후, 세상을 깨우다’가 있다.
스님은 오종의 책을 발간 했다. 이 중에서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을 읽어 보았다. 한마디로 ‘서프라이즈(surprise)’라 볼 수 있다. 한국의 불교전통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 것 중에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가르침이 보호해 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테라와다 303게송에 실려 있다. 법을 지키면 법이 보호해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밖에도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가 많아서 노랑형광메모리 칠 해 두었다. 선물로 받은 책도 틈틈이 읽어서 노랑형광메모리 칠을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주황색메모리 펜으로 덧칠하면 된다.
스님이 이렇게 오종의 책을 발간한 것은 제대로 불교를 알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국에 와서 포교를 해 보니 한국의 불자들이 모르고 있던 것이나 알고 있더라도 틀리게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책을 쓴 것이라 한다. 중국에서 도래승이 번역작업 먼저 한 것처럼 책을 통하여 바른 불교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법승종(法乗宗)의 초조(初祖)가 될지도
빤딧짜 스님은 2009년 이후 한국에 와서 살고 있다. 스님이 동으로 온 까닭은 포교를 하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지 모른다. 그런 조짐은 보인다. 한국에 이미 ‘담마야나(法乗)’라는 종단이 설립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님은 나이가 젊다. 1971년 생으로 올해 나이 48세이다. 미얀마 샨(Shan)족 출신의 스님은 생긴 모습도 한국인과 거의 똑같다. 샨족의 경우 미얀마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데 중국 운난성 등 북쪽에서 내려온 민족이라 한다. 그래서 샨족은 미얀마 사람들 모습과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고 한다.
스님은 든든한 기반이 있다. 스님은 미얀마 양곤에 있는 산먀띠다 마하시 선원장이기도 하다. 20대 때는 강원에서 불교경전과 빠알리어를 수학했다. 이후 불교경전과 빠알리어 강사도 했다. 이처럼 교학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고 수행력도 있다. 그래서 법문도 잘 하고 수행지도도 잘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얀마불교의 힘이다.
빤딧짜 스님에 따르면 한국은 십년전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 했다. 스님이 처음 한국에 발을 들였을 때 하고는 더욱더 많이 다른 것이다. 이대로 십년, 이십년, 삼십년, 사십년 머문다면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마치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듯이, 미얀마에서 온 스님으로 인하여 한국불교가 환골탈태할 계기를 갖게 될지 모른다. 달마가 중국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듯이, 어쩌면 빤딧짜 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법승종(法乗宗: Dhammayana Order)’의 초조가 될지 모른다.
2019-03-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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