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띠를 넘어 이제 팔정도의 삶으로
스님에게 문자를 받았을 때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콘테이너라는 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거 중인 스님을 찾아 뵙고 대중공양을 올릴 것을 요청했는데 “산중에 홀로 텐트 쳐놓고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는 쓰지만, 거사님 같이 법안 갖춘 분이 바르게 보아주시니 다행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스님의 법명은 빤냐완따이다. 한국법명은 인법이다. 빤냐완따스님은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소속이다. 지난 7월 19일 개심사 보현선원 원담스님을 찾아 뵙고 이번에 두 번째 찾아 뵙는 스님이다. 스님을 찾아 뵙고자 한 것은 법보시 때문이다.
지난 7월 4일 청파동에 있는 담마와나선원에서 한국테라와다불교 안거법회가 있었다. 그때 스님은 자신의 시와 수필, 그리고 법문이 담겨 있는 책 ‘발바닥에 핀 연꽃’을 불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스님에게 공양하고자 한 것이다. 전화번호를 알아 내어서 문자를 보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혼자 가는 것 보다 여럿이서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았다. 2018년 빠알리법명 수계모임 카톡방이 있다. 마치 한날한시에 태어난 형제들처럼 아홉명이 법명을 받았다. 함께 할 것을 요청했으나 모두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법우님 두 명과 함께 갔다.
콘테이너 하우스
장마철이 길어지고 있다. 8월에 들어서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8월 2일 아침 출발하는 당일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쏟아 지는 강한 빗줄기를 뚫고 성남 심곡동에 있는 빤냐완따 스님 처소로 향했다.
스님이 거처 하는 곳은 성불암이다. 도시에 있지만 주택가와 산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절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진한 빨강괴색가사를 입은 테라와다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절이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절이 아니었다. 문자를 보낸 내용 그대로 콘테이너 하우스였던 것이다.
종종 콘테이너 하우스를 본다. 대개 임시 막사 같은 곳이다. 무허가이기 쉽다. 빤냐완따 스님이 사는 콘테이너도 임시로 머무는 거처라고 볼 수 있다.
20피트 컨테이너는 원룸형이다. 침대가 있는 곳은 방이고, 탁자가 있는 곳은 사무실이고, 주방이 있는 곳은 식당인 것이다. 스님은 이와 같은 원룸 시스템에 대하여 침실, 사무실, 종무소, 식당 등 다용도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마치 자연인처럼 살고 있다. 종편에서 보는 자연인을 보면 홀로 살아간다. 자연인과 차이가 있다면 스님은 수행자라는 것이다.
스님이 문자로 콘테이너를 언급했을 때 설마했다. 아무리 못해도 주택정도는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도착해서 성불암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절 비슷하게 생긴 건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저곳 둘로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성불암이라는 빨간 팻말이 보여서 그 옆 2층 주택이 성불암인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정말 콘테이너가 거처였던 것이다.
밖에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콘테이너에서 스님과 차담을 했다. 모든 것이 허름하고 모든 것이 낡아 보이고 모든 것이 궁해 보였다. 그러나 스님의 이야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스님과 9시 반부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1시 반까지 4시간을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들은 것은 미얀마 마하시선원에서 체험한 사띠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세상이 달라져 보였을 때
스님은 1998년 처음으로 미얀마를 건너갔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22년전의 일이다. 선원에 가면 하는 일이 없다. 오로지 수행밖에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어느 날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선원 문을 열고 나오는데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라는 것이다.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수행을 하다 보면 천지가 뒤바뀐 듯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스님도 아마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숨이 가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소멸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이 낱낱이 부수어져 버리는 듯한 것이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스님에 따르면 개념이 부수어지고 있는 그대로 드러난 것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개념으로 산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개념과 개념 사이에 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끊어져 있음을 말한다. 마치 개미가 줄지어서 갈 때 멀리서 보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끊어져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관념으로 보지 않음을 말한다. 관념으로 보면 허깨비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집중해서 체험을 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더지처럼 쑤욱 올라오는 마음을
스님은 호흡과 마음을 보는 것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렇다면 호흡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흔히 위빠사나수행처에 가면 “호흡 보셨습니까?”라고 지도법사가 물어본다. 이럴 때 초심자들은 낙망하기 마련이다. 호흡을 보라고 하는데 대체 호흡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호흡은 볼 수 있다. 배의 부름과 꺼짐을 관찰하면 호흡이 전면에서 일어나고 사라짐이 보이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빠리무카사띠(Parimukhasati)’라고 한다. 이와 같은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가장 먼저 호흡을 보아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스님은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고 하지만 이에 대하여 스님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했다. 마음을 볼 수도 있고 잡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의도’로 설명했다.
마음의 의도를 보려면 먼저 사띠가 24시간 유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잠에서 깨든 순간부터 잠들기까지 사띠가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밥 먹고 수행밖에 할 일이 없는 선원에서는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24시간 사띠가 유지되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사띠가 왜 신기한 것일까? 스님은 자석과 쇳가루 비유로 설명했다. 잠에서 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 종일 깨어 있는 마음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쇳가루 같다는 것이다. 이런 사띠가 유지되었을 때 마음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스님은 어느 날 사띠가 종일 유지된 상태에서 선원 계단을 올라갔다고 했다. 그때 움찔했다고 한다.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마치 두더지가 갑자기 머리를 내미는 것 같다고 했다. 무언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을 생생하게 보면 정신세계도 보입니다.”라고 했다.
마음을 컬러사진으로 본 것처럼
물질을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호흡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바탕에서 마음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두더지처럼 쑤욱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와 관련된 것을 시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치 검은 장막이 걷히듯,
뿌연 안개가 일순간에 사라지듯,
마음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컬러사진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마음의 고유한 특성들이
입체적으로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이제 비로소
5온(몸, 느낌, 관념, 의도, 인식)을 실재로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본성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발바닥에 핀 연꽃 53쪽)
스님은 마음을 컬러사진처럼 보았다고 한다. 마치 흑백의 세상에서 컬러의 세상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보임을 말한다. 하늘과 땅이 뒤바뀐 체험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을 컬러로 보았다는 것은 매우 선명하게 보았음을 말한다. 그런 마음은 고유한 특성이라고 했다. 이는 의도와 같은 마음부수를 말한다. 더 넓게는 빠라맛타담마를 말한다. 구경법을 명징하고 선명하고 컬러풀하게 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더 이상 개념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본다. 그래서 손을 손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부서져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틈을 보는 것을 말한다.
마치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마음을 들여다보면 틈이 있다고 한다. 이는 개념과 개념사이의 틈을 말한다. 이런 틈을 공략하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것이든지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빤냐완따 스님의 ‘틈’이라는 시를 보면 “가장 예리한 지혜의 바늘 하나가 그 틈에 꽂히는 순간, 온갖 감정이나 감각의 구속으로부터 일순 자유로워진다.”(발바닥에 핀 연꽃 28쪽)라고 했다.
마치 난생 처음 본 듯이
평소 이미우이 음악을 즐겨듣는다. 음악이 좋아서 씨디를 만들어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준다. 이미우이음악은 매일 듣는다. 아침 일터에 갈때는 라따나경을 듣고, 집으로 향할 때는 자야망갈라가타를 듣는다. 그런데 어느 날 들을 때는 잘 들릴 때가 있다. 완전히 몰입되어 음악과 하나가 될 때가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똑 같은 꽃을 보아도 어느 날 더 잘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컬러풀하게 보일 때가 있음을 말한다. 마치 흑백의 세상에서 갑자기 컬러의 세상으로 전환했을 때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스님은 최근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한다. 호박꽃을 새로 본 것이다. 스님의 콘테이너 안에 있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호박꽃’이라는 제목의 시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호박꽃을 보았네!
호박꽃을 보았네!
조선팔도 들녘마다
흔하게 피고 지던
피는 줄도 모르고
지는 줄도 몰랐던
“호박꽃도 꽃이냐” 천대 받아도
애호박 둥근호박 잘만 매달던
논밭뚜렁 미나리꽝 옆에
단내 풍기며 환하게 핀
7월의 아침
호박꽃을 보았네!
호박꽃을 보았네!”
스님이 육필로 쓴 것이다. 7월이라는 말이 들어 간 것으로 보아 지난달 7월을 말하는 것 같다. 어느 날 호박꽃을 보고서 마치 처음 본 듯이, 마치 난생 처음 본 듯이, 새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전에는 흑백으로 보았다면 이번에는 컬러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는 틈을 본 것이라 볼 수 있다. 개념과 개념 사이의 틈에서 호박꽃을 본 것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는 호박꽃이라는 개념으로 보았다면 7월에 아침에 본 호박꽃은 개념이 무너져서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서 난생 처음 본 것처럼“호박꽃을 보았네!”라고 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
개념을 부수고 컬러풀한 마음을 보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일까? 마음의 본성을 보았다고 해서 수행이 다 끈난 것일까? 스님은 시에서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는 도반 스님들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여기 수행자가 있다. 그는 늘 “한번 앉으면 이내 호흡이 사라지면서 온갖 마음도 사라지고 결국 아는 마음 하나만 남는데 그 아 아는 마음마저 종종 사라지더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10년전에도 했는데 지금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수행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앞마음이 뒷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수행의 경지가 대단히 높음을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결국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지켜 보는 마음이 사라짐을 경험했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 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스님이 강조한 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생활화해야
스님은 팔정도를 빠알리어로 모두 다 외웠다고 한다. 이는 니까야에 실려 있는 팔정도 정형문을 말한다.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vibhaṅgasutta)’(S45.8)이 그것이다.
스님은 팔정도를 빠알리어로 틈만 나면 독송한다고 한다. 팔정도야말로 불교인들이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생활속에서 팔정도에 걸리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정도라고 했다.
팔정도에 삼마왔짜(sammāvācā)가 있다. 이를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 네 가지가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는”(S45.8)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올바른 언어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제 사띠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불교와 위빠사나 수행이 도입된 이래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 사띠이다. 그러나 사띠로서 끝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뒷마음이 앞마음을 알고, 그 마음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말을 이제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띠를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팔정도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팔정도는 일상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지없이 깨져 보았기에
스님은 왜 이렇게 사띠를 넘어서 팔정도를 강조한 것일까? 이는 깨져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여지없이 깨졌다.”라고 했다. 마음을 컬러로 보아서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어쩌면 자만이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다 깨달은 사람처럼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인도여행을 하면서 여지 없이 깨졌다고 했다. 켈커타에서 거지떼를 만나면서 깨진 것이다. 떼거리로 달라붙는 거지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낸 것이다. 그때 “마음을 컬러로 보면 무엇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를 2년 동안 유행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때 2년 동안 유행을 마치고 인도를 떠났는데 그때 공항에서 또다시 거지떼를 만났다고 한다. 그때 거지떼에게 짜증도 내지 않고 화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이 이렇게 장난 치는구나!”라고 알았다고 한다.
공부했다고 교만하지 말라고 했다. 수행했다고 하여 자만을 갖지 말라고 했다. 경계에 부딪치면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계를 만나도 깨지지 않으려면 자비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띠를 넘어서 팔정도를 닦아야 하고, 팔정도를 넘아서 십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세 가지
스님이 강조한 것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일상에서 사띠이고, 두번째는 팔정도의 실천이고, 세 번째는 십바라밀의 실천이다. 여기서 십바라밀의 경우 세 가지가 있는데 재가자의 경우 가장 낮은 단계인 일반적 초월의 길(dasapāramī)을 말한다. 보시바라밀의 경우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출가수행자는 그 보다 상위에 있는 우월적 초월의 길(dasaupapāramī),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승의적 초월의 길은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전생담에 있는 보살행을 말한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가장 강조한 것은 십바밀행이다. 수행자라면 사띠에서 머물지 말아야 하고 팔정도를 생활속에서 닦아야 한다. 여기서 그쳐서는 안되고 최종적으로 십바라밀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콘테이너 하우스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스님의 선방
스님은 선방도 가지고 있다. 홀로 살고 있는 스님에게 어떤 선방일까? 몹시 궁금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텐트였다. 법당 옆에 야외 텐트가 하나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선방이라고 했다.
부처님이 등 뒤에서
스님은 법당으로 안내했다. 콘테이너 하우스에서 산길로 약 100미터 가량 올라가면 작은 건물이 나온다. 스님이 폐자재를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불과 사오평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법당이다. 그렇다고 기와지붕이 있는 절집 모양이 아니다. 마치 자연인처럼 스님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이다.
법당은 허가된 건물은 아니다. 산불이 나서 타버린다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언젠가 산불이 나서 법당을 집어 삼킬 기세였는데 온몸으로 산불을 막았다고 한다.
법당에서 스님에게 삼배를 했다. 스님에게 보시금을 올렸다. 이에 스님은 축원해주었다. 스님은 법당에서 일어난 신비한 체험을 이야기했다. 이는 작년에 발간된 스님의 책에 실려 있는 ‘파스를 붙이며’에 실려 있다. 스님은 시를 낭송해 주었다. 일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늘 밤,
그 고단했던 다리위에 파스를 붙인다.
법당 향로에 향 한 개비 피워놓고
파란색 봉지를 이제 막 뜯으려는데,
문득 등 뒤에서 “수고했구나!”하시며
한파스를 떼어주고 새파스 붙여주시는
부처님의 따수운 손길.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창문 너머 어둠 속
피리새와 소쩍새새가 번갈아가며 우는 봄밤.”
스님은 이 시를 낭송할 때 끝부분에서 눈물을 보였다. 부처님이 살며시 다가와서 다리에 파스를 붙여 주며 “수고했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쭈뼛하고 소름이 돋았다.
상윳따니까야 ‘사자의 경’에서 부처님이 천신들에게 설법했다. 설법을 들은 천신들은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라고 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름이 돋았는데 이는 전율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파스 붙여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율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감동이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난 것이다.
성불암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부처님이 ‘수고했다’라는 말을 할 정도인 것 같다. 성불암이 경매에 들어 갔는데 부처님만은 지켰기 때문이다. 또 여기까지 오기까지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리가 아파서 파스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소쩍새가 울던 봄밤에 부처님이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 붙여준 것은 아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점심 공양청을 하고
스님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서 살지도 않고 가까이 산다. 마치 자연인처럼 살아도 주변에서 불편해하지 않는다고 한다. 검붉은 색 계통의 테라와다 가사를 입은 스님이 바로 주택가 옆에 살아도 사람들은 전혀 게의치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점심공양을 했다. 한정거장 거리에 있는 우렁쌈밥집으로 모셨다. 이를 공양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먹을 것을 싸 가지고 할 수도 있으나 준비하는데 시간 걸리고 여러가지 번거로운 점도 있어서 가까운 식당을 활용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차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에 스님일행이 식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젊은 엄마와 어린 남매가 두 손 모으고 합장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불교세가 약하지만 신심 있는 불자는 있는 것이다.
팔정도정형구를 빠알리어 외우기
부처님은 수행자를 만나서 담마를 듣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5)라고 했다.
빤냐완따 스님을 만나서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논했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는 법회에서 법문 듣는 것과 또 다른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래서 선지식을 직접 친견해야 하는가 보다.
빤냐와로 스님의 담마를 듣고서 마음의 숙제를 내었다. 그것은 팔정도 정형구을 빠알리어로 외우는 것이다. 이전에도 빠알리어로 된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 초전법륜경 등을 외웠기 때문에 벽돌쌓기 방식으로 외우면 된다. 자신과 또 하나 약속했다. 팔정도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장마철에 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작은 콘테이너 하우스에서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소는 열악해 보인다. 남들이 보면 “아, 눈물 난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띠를 넘어 팔정도를 생활화 하고 승의적 십바라밀행을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에게 빗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하늘이 리듬을 맞추어 비를 내리고
초암은 잘 덮여 있고 바람 없이 안락하여
마음은 잘 집중되었으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비를 내리시오.”(Thag.51)
2020-08-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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