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인들은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다. 출가한 스님조차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은 출가자의 무지에 대한 글을 올렸다. 하안거를 맞이하여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데 종회의원을 8번 했다는 스님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종회를 8선했다는 스님은 선원에서 안거를 나는 것이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잘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에 대한 무지이다. 종회 8선을 했으면 거의30년 종단권력을 쥐고 있었던 권승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스님의 탄식
스님에 따르면 권승은 선원 생활이 재미가 없고 답답하고 따분하다고 했다고 한다. 마침 기회가 되어서 차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권승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는 것 같다는 취지로 써 놓았다.
스님은 권승에게 “무엇을 깨달았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권승은 ‘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마음이 있기는 있습니까?”라며 재차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권승과의 대화에서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무지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권승은 “선원에서 선정을 닦는데 그것 닦아서 뭐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선원은 따분하고 재미가 없고 답답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될 것이다. 이에 스님은 “선정을 얻어야 지혜가 나오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스님이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법구경에서도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고 했기 때문이다.
권승의 답변이나 질문을 보면 무지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출가하여 수십년 종회의원으로 지낸 노스님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스님이 선정에서 지혜가 나오고, 지혜가 있어야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자 놀랍게도 ‘그런 것 알아봐야 결국은 다 죽는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단멸론이다.
스님은 권승의 말을 듣고 탄식했다. 스님은 권승의 무지에 대하여 “무식한 목사보다 더 심하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음의 힘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행을 하지 않았으니 마음의 힘이 없어서 선방에서 정진하는 것이 재미없고 따분해 보였던 것이다. 설령 정진하여 어떤 결과물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고 말 것인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식이다.
스님은 권승에게 간단하게 깨달음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연기를 깨달았다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기란 세상 모든 것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두가 관계속에 있다.”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기에 대하여 공성이라고 하고, 공성의 본질은 마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의 깨달음을 연기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이는 율장대품 제1장 1절이라고 볼 수 있는 보리수이야기(Bodhikatha)에서도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Vin.I.1)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초야, 중야, 후야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연기법을 순관과 역관을 관찰하여 깨달았다. 여기서 연기법은 십이연기가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깨달아 무상정등각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다나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우다나는 어원적으로 ‘숨을 내쉬다, 발언하다(udāneti)’의 뜻이다. 우다나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흥어린 신성한 발언 또는 환희로운 앎에 기초한 시구를 말한다.
우다나는 부처님의 궁극적인 깨달음과 열반에 대한 감흥어린 시구에 대한 것이다. 우다나는 북전 한역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전승되어 왔는데 부처님의 깨달음과 열반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려면 우다나를 보아야 한다.
우다나 제1장 제1절은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마치 유일신교 바이블에서 제1장 제1절은 창세기와 같듯이, 우다나에서는 가장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다나의 제1장 제1절은 율장대품의 보리수이야기와 병행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깨달음은 불교의 역사이고 동시에 승단의 역사임을 말한다. 모두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율장에서 그것도 가장 첫번째인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다루었다는 것은 불교의 정체성을 나타내주기에 충분하다.
율장과 우다나에서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 “초야에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라는 말은 ‘paṭiccasamuppādaṃ anulomaṃ’를 번역한 것이다.
연기법은 조건발생의 법칙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법과는 다른 것이다. 연기법은 인과에 조건이 추가 되어 있다. 그래서 연기법은 원인(hetu)과 조건(paccya)과 결과(phala)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줄여서 인연과라고 한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는 일반적으로 조건적 발생 또는 상호발생이라고 번역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면 ‘조건적 수반적 발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기법에 대하여 단지 상호의존으로만 본다면 연기를 다 설명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라고 했을 때 이는 상호의존적 연기가 된다. 상호발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송을 보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연기송을 보면 후송이 있다. 후송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라고 표현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조건발생을 말한다. 이렇게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수반적 발생)’가 결합된 것이 그 유명한 연기송이다.
연기송은 율장대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다나가 좀 더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우다나에 실려 있는 연기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Ud.1)
우다나에는 이와 같은 연기송이 선언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치 헌법 같은 것이다. 헌법은 모든 법에 있어서 최상위법이다. 헌법 보다 더 높은 상위법은 없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설하기전에 먼저 연기송을 선언했다. 그래서 십이연기 순관을 설할 때에는 먼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며 연기송의 전송을 선언했다. 이렇게 전송을 선언하고 난 다음에 “곧,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십이연기 순관을 설했다.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에서 그치지 않았다.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과 함께 반드시 연기의 역관도 설했다. 부처님이 십이연기 역관을 설할 때 역시 연기송을 먼저 선언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며 연기송의 후송을 먼저 선언한 다음에 “곧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식으로 십이연기 역관을 설했다.
연기송이 단멸론으로 악용 되었을 때
네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연기송은 매우 심오하다. 그러나 악용될 소지도 있다. 특히 단멸론자에게 악용될 수 있다.
단멸론자들은 정신은 육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육체가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이는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의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렇게 연기에 대하여 상호의존적으로 보면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가 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이 된다.
단멸론은 연기의 반쪽만 적용한 것이다. 나머지 반쪽은 적용하지 않아 단멸론이된다. 연기송은 상호의존 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적 연기도 있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이다. 이와 같은 조건발생적 연기는 십이연기에 적용된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식이 된다.
십이연기는 조건발생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주체가 없다. 십이연기 연결고리는 모두 조건발생으로 연결된 것이다. 예를 들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Vedanāpaccayā taṇhā)”라고 했을 때, 여기서 느낌은 갈애의 발생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조건을 뜻하는 빳자야(paccayā: 緣)가 들어간 것이다.
상호의존연기와 조건발생(수반발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연기법이다. 이렇게 조건발생되어 있는 연기법에서는 단멸론은 발 붙이기 힘들다. 조건발생하여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기 때문에 행위를 조건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연기법을 설했다. 그런 연기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연기법을 설한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법이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단멸론이고 또 하나는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다.
우주로 확장된 연기송
연기법에는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라고 했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연기를 말한다. 상호의존적 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를 말하며 한자어로는 ‘若有此卽有彼’라고 한다. 조건발생적 연기는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를 말하고 한자어로는 ‘若生此卽生彼’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有此卽有彼)”라는 구절 하나만을 취하여 단멸론에 적용했다. 그래서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했다. 이런 염려가 있어서일까 부처님은 분명히 후송을 언급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卽生彼)”라며 조건발생적 연기를 뒤이어 설한 것이다. 이것도 부족해서일까 십이연기를 설했다.
십이연기는 일반적 원리의 연기송을 특수한 원리의 연기에 대한 것이다. 연기송에서 두 구절로 되어 있는 전송을 확장하여 열 두 가지 고리의 연기의 순관으로 설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모두 만족해야 함을 말한다. 또 연기는 오온으로 한정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이 연기송을 먼저 선언하고 난 다음에 십이연기를 설한 것은 심오한 뜻이 있다고 본다. 부처님이 만약 단 네 구절로 된 연기송만을 설하고 말았다면 혼란이 야기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에서일까 부처님은 먼저 네 구절로 연기송을 선언하고 그 다음에 십이연기 순관과 역관을 설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후대 변질되었다. 그것은 연기법을 우주로 확장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른바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한다. 그런데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연기법을 우주로까지 확장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오온을 떠나 우주로 확장되었을 때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왜 그런가?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한 것만 취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연기송 전송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전자만 취하고 후자는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된다.”라며 상호의존전 연기 하나만 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하여 관계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연기가 우주로 확장되었을 때 조건발생적 연기, 즉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조건발생적 연기는 폐기된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은 왜 출가했을까?
부처님은 왜 출가했을까?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서 재난을 보았다고 했다.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에게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4)라고 했다.
부처님이 출가한 것은 생노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생노병사는 괴로움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괴로움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욕망에 있다. 그것도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욕망에서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재난이라고 했다. 이런 재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난다는 출가의 경에서 부처님의 출가에 대하여 “재가의 삶은 번잡하고, 티끌 쌓이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출가의 뜻풀이 성격이 강하다. 집을 떠나 집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집없는 곳에서 산다고 하여 모두 출가라고 볼 수 있을까? 출가가 아니라 가출일 수 있다. 아난다는 이어서 “출가한 뒤에 신체적으로 악행을 피하고, 언어적으로 짓는 악행도 버리고, 아주 청정한 삶을 살았습니다.”(Stn.407)라고 했다.
출가는 ‘청정한 삶’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윤회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출가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연기의 가르침은 원리로 정해져 있는 법칙
부처님의 관심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관찰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그것도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연기설도 아니고 연기론도 아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조건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S12.20)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의 가르침은 법칙이다. 마치 물리학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중력의 법칙처럼, 연기법은 법칙인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연기설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또 어떤이는 연기론이라고 한다. 연기의 가르침은 설도 아니고 논도 아니고 법이다. 부처가 출현했든 출현하지 않았든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S12.20)라고 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발견했다. 이는 연기법이 원리로서 또는 법칙으로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가 출현하여 발견한 연기법도 후대로 가면 갈수록 변질된다. 연기법이 마치 단멸론이나 우주법칙을 설명하는 용도로 변질되었을 때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발견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사람은
부처님은 우리들을 괴로움에서 해방시켜준 분이다. 사성제를 안다는 것은 괴로움을 안다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면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가장 먼저 고성제를 설했다.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하여 팔고를 설했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하여 먼저 알아야 괴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로 보았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아니 연기법을 발견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연기법은 사성제에 적용된다. 따라서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성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즐기기에 바쁘다. 안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갈애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갈애는 반드시 괴로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갈애는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누군가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무어라 답해야 할까? 깨달음은 연기법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는 연기의 구조이기 때문에 또한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으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출발점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깨달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누군가“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 다음부터 그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 가야 할 것이다. 팔정도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2020-08-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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