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전처 보듯이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이 있다. 어느 것이 더 괴로울까? 병이 나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 한시바삐 벗어나길 바란다. 너무 괴로워서 다른 것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이 계속 되면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모욕을 당했을 때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다.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로 앙갚음 해 보지만 마음만 상할 뿐이다. 분노로 인하여 극심한 정신적 괴로움을 겪는다. 육체적 괴로움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정신적 괴로움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 육체적 고통은 시간 지나면 사라지지만 정신적 괴로움은 두고두고 남는다.
상카루뻬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 한다.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 11번째 지혜에 해당된다. 상카라는 현상을 말하고 우뻭카는 평온을 말한다. 현상에 대한 평온은 다름아닌 중립이다. 현상에 대해 남 보듯 하는 것이다. 이혼한 전처 보듯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현상의 특징은 생멸이다. 인간의 활동자체가 생멸이다. 인간은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오온은 생멸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도 생멸이고 정신적 괴로움도 생멸이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일어 났다 사라지게 되어 있다.
행사장은 텅텅 비어 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었다. 행사가 끝나자 관중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처음 그 상태로 돌아 갔다.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일었지만,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쳤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 그 상태로 있다.
누군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기물을 파손하지만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난동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제풀에 지쳐 꺽여지면 평온이 올 것이다. 행사장에서 한바탕 퍼포먼스가 있었던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니.” 바이블 구절이라 한다. 그러나 불교적 가르침에 가깝다. 생멸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생성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있지 않다. 죽을 것처럼 괴로운 육체적 고통도 틈이 있다. 파도가 밀려 오듯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분노와 슬픔과 같은 정신적 괴로움도 그때뿐이다. 조건이 바뀌면 마치 화면이 전환 되듯이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모든 현상은 일어 났다가 사라진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지속 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영화장면 바뀌듯이 사라진다. 생겨난 것에 목숨 걸 필요 없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죽어도 좋아”라며 목숨 걸 필요 없다.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에 목숨 걸 필요 없다. 격정에 못 이겨 일을 저질렀을 때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이혼한 전처는 내것이 아니다. 나의 처라면 남자와 희희낙낙하는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것이 아니라면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지켜만 보면 중립의 마음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평온이 유지된다.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설산동자는 이 게송을 야차로 부터 들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성하고 다시 소멸해야 하리.(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라는 뜻의 게송이다. 설산동자는 이어지는 후송을 듣기 위해 투신했다. 이어지는 게송은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이다. “생성하고 또한 소멸하니 그것들의 적멸이 행복이네.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ti)”라는 뜻이다.
두 개의 생멸이 있다. 앞의 생멸은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이고, 뒤의 생멸은 오온으로서의 생멸이다. 제행이 무상한 것은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지켜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라(nibbidā viraga)”라고 했다. 대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가 소멸 했을 때 고요해질 것이라 했다. 고요한 그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라 한다. 이혼한 전처 보듯이.
2019-05-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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