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케마(yogakkhema: 瑜伽安隱), 멍에로부터 안온을
자세히 보면 잘 보인다. 확대하면 더 잘 보인다. 부처님 가르침은 분석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류했다. 오온을 다시 정밀히 분석하여 관찰했다. 그 결과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은 분석적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vibhāgavādin)라 했다.
분석론자 또는 분별론자로서의 부처님 가르침은 초기경전에 잘 설해져 있다. 5월 첫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의 주제는 ‘인간이 짊어진 네 가지 멍에’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멍에에 대하여 네 가지로 분별했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멍에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 존재의 멍에, 견해의 멍에, 무명의 멍에가 있다.”(A4.10)라고 했다.
요가(yoga)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멍에는 소의 등에 얹어 놓는 농기구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어로는 요가(yoga)라 한다. 요가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두 가지의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농기구로의 뜻이고, 또 하나는 종교용어라 했다.
농기구로서의 요가는 소에 매는 멍에를 뜻한다. 인도에서는 두 마리 소에 멍에를 다는 것이라 했다. 쟁기질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멍에가 소에 사용 될 때에는 속박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속박의 의미로 사용했다. 이런 멍에는 번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존재, 견해, 무명 이라는 네 가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멍에가 종교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결합을 의미한다. 요가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묵는다’는 뜻으로 영어로 ‘yokes, connection, bond’라고 표현된다. 무엇과의 결합인가? 신과의 결합이다.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는 신과 인간을 결합하는 의미에서 요가라 한다. 내면의 참다운 자아가 궁극의 브라흐마와 합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한다. 이처럼 내면에 참다운 자아가 있어서 궁극적 실재와 합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파가 베단타철학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멍에를 보면
부처님은 범아일여사상을 부정했다. 그래서일까 신과의 결합을 뜻하는 요가에 대하여 속박이라 보고 번뇌(āsava)의 의미로 보았다. 또한 번뇌는 폭류와 같은 것이어서 거센 흐름(ogha)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가는 번뇌와 폭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네 가지 멍에 중에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멍에를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kāmayogo? Idha bhikkhave ekacco kāmānaṃ 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sa kāmānaṃ 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appajānato yo kāmesu kāmarāgo kāmanandi kāmasineho kāmamucchā kāmapipāsā kāmapariḷāho kāmajjhosānaṃ kāmataṇhā sānuseti. Ayaṃ vuccati bhikkhave kāmayogo. (Iti kāmayogo)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관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감각적 쾌락에 대한 환락,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홀림,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열뇌,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를 향한 경향을 일으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라고 한다.” (A4.10)
감각적 쾌락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래서 오욕락이라 한다. 눈과 귀, 코, 혀, 몸과 같은 감각기관으로 즐기는 쾌락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오욕락에 빠지는 것에 대하여 소가 멍에를 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kāmayoga)’을 분석해 보면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samudayañca attha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나머지 세 가지 멍에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멍에의 경에서 키워드는 발생, 소멸, 유혹, 위험, 여읨이 키워드이다. 이것만 알면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이론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발생과 소멸은 다름 아닌 생멸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생멸의 지혜 단계가 되면 수행에 있어서 큰 진전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몸과 일어나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 했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착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주석을 보면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발생(samudaya)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발생계기(khaṇikasamudaya)와 발생조건(paccayasamudaya)이다. 발생조건을 알면 발생계기를 알 수 있고 발생계기를 알면 발생조건을 알 수 있다. 형성된 것들의 상승을 조건속에서 보면, 순간적 계기 속에 상승을 지각할 수 있다. 순간적 계기 속에 상승을 지각하면 그 해당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조건성을 알 수 있다. 소멸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Lba.II.204)
이와 같은 주석은 ‘Lba.II.204’에 근거한다. 약어표에 따르면 ‘Lba’는 ‘Die Lehrreden des Buddha aus Angereihten Sammlung’의 약어이다. 독일어 주석서이다. 전재성 선생은 Mrp( Manorathapūraṇī: 増支部註)라는 앙굿따라니까야 주석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석서를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초기불전연구원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발생과 소멸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독일어판 주석을 보면 발생계기(khaṇikasamudaya)에 대한 설명이 있다. 여기서 카니까(khaṇika)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 말에 대하여 ‘순간적 계기’라고 부연설명했다. 순간적 발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순간이 중요할까? 이는 수행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왜 느리게 행동해야 하는가
지난 1월달에 미얀마 집중수행 다녀왔다. 15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배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동작을 느릿느릿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빨리빨리 하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굼뜨지 않고 빨리빨리 하면 여러모로 살아 가는데 유리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은 “빨리빨리”라는 말이 입에 베어 있다.
수행처에서는 느리게 행동해야 한다. 걷는 것도 느리게 걷고, 앉는 것도 천천히 앉고, 먹을 때도 천천히 먹어야 한다. 이렇게 느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자신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빠릿빠릿하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천천히 행동해야 한다.
빨리빨리 하면 속도는 있지만 잘 볼 수 없다. 반면 천천히 하면 속도는 나지 않지만 잘 볼 수 있다. 더욱 더 천천히 하면 어떻게 될까? 더 잘 보일 것이다. 경행 할 때 천천히 걷는다.
경행을 하면 한발 들어서 내딛을 때까지 수 초 걸린다. 이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면 ‘듦, 밂, 내림, 닿음, 누름’이 된다. 이 과정을 관찰하면 성품이라 말하는 빠라맛타(paramattha: 究竟法)를 볼 수 있다. 멈추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집중을 요한다.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 발생(khaṇika-samudaya)’이라는 말은 수행용어라 볼 수 있다.
순간집중(khaṇika samādhi)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kāmayoga)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보라고 했다. 이 보는 방법에 대한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특히 발생과 소멸을 보려면 집중을 요한다. 두 가지 집중이 있다. ‘사마타 뿝방가마 위빠사나’라 하여 사마타 수행에 의해 선행되어지는 위빠사나가 있고, 또 하나는 ‘숫다 위빠사나’라 하여 사마타 수행을 거치지 않는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여기서 순수한 위빠사나는 순간집중에 따른 것이다. 순간집중에 따라 순간적 발생과 소멸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것에 대하여 카니까사마디(khaṇika samādhi)라 한다.
순간집중을 하면 좌선할 때 복부의 불러옴이나 꺼짐을 관찰할 수 있다. 더욱 더 순간 집중하면 더 자세히 관찰 할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면 할수록 마음은 평온해지고 침착해진다. 그래서 순간집중만으로도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여 마음의 청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마음의 청정에 대하여 오로지 근접집중이나 몰입집중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근접집중이나 몰입집중이 없으므로 마음의 청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찬몌 사야도는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틀렸다고 입증할 수 업으나 경험적으로는 그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163p)라고 학자들의 말을 부정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학자들이 오로지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수행하여 체득한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순간집중에 따른 순수위빠사나로도 마음의 청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복부의 움직임이나 경행을 하면 알 수 있다. 움직이는 대상은 순간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순간집중만으로도 청정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수행체험으로도 알 수 있고 또한 근거도 있다는 것이다.
순간집중과 관련하여 청정도론에서는“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되어 있다. 희열과 행복, 안온에 대하여 찰나삼매로도 가능함을 말한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마음에 현전하는 집중에 대하여 찰나삼매(khaṇika samādhi)라 한다.
빠라맛타를 꽤뚫어 보았을 때
담마상가니와 같은 주석서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따르면 네 가지 물질적 요소에 집중한 수행자는 카니까 사마디(순간집중)로서도 마음의 청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수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경행을 할 때 ‘듦, 밂, 내림, 닿음, 놓음’순으로 관찰 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잘 관찰하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는 움직임이 있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이 있으며 미는 움직임이 있고,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이 있다.”(165p)라고 했다. 이렇게 순간집중 했을 때 아주 편안하고 행복함을 느낄 것이라 했다. 심지어 자동으로 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솜털 위를 걷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고, 바닥에 떠서 걷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깊은 집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집중에 따른 깊은 집중이다. 그래서 단지 아는 마음만 남아 있다. 좌선을 하거나 경행을 할 때 풍대(風大)라는 빠라맛타를 꽤뚫어 보았을 때 오로지 행위와 아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인격이나 개인과 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오온이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는 관념이 제거 되었을 때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온에 대하여 단지 정신-물질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안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나머지 존재의 멍에, 견해의 멍에도 마찬가지이다.
요가케마(yogakkhema), 멍에로부터 안온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가 오욕락에 대한 것이라면, 존재에 대한 멍에는 색계와 무색계 대한 탐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견해의 멍에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고, 무명의 멍에는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이러한 멍에는 번뇌와 같은 것이고 폭류와 같은 것이다.
멍에, 번뇌, 폭류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탐욕(rāgo), 환락(nandi), 열애(sineho), 홀림(mucchā), 갈증(pipāsā), 열뇌(pariḷāho), 탐닉(ajjhosānaṃ), 갈애(taṇhā)가 잠재성향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잠재성향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멍에, 번뇌, 폭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하고, 오염을 초래하고, 미래에 다시 태어남, 늙음, 죽음으로 이끄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묶여 있는 자에 대하여 ‘멍에에서 안온을 얻지 못한 자(ayogakkhemī)’라고 한다.
멍에에서 안온을 얻지 못한 자가 있다면 멍에에서 안온을 얻은 자도 있을 것이다. 이를 요가케미(yogakkhemī)라 한다. 요가(yoga)는 멍에 또는 속박을 뜻하고 요가케마(yogakkhema)는 ‘멍에로부터 안온’이라 한다. 한자어로는 유가안은(瑜伽安隱)이다.
요가케마는 열반과 동의어이다. 멍에에서 벗어난 자는 열반을 성취한 자라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멍에, 존재의 멍에, 견해의 멍에, 무명의 멍에에서 발생과 소멸과 유혹과 위험과 여읨을 있는 그대로 아는 자를 말한다.
2019-05-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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