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27. 16:21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멀고도 먼 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가는 길이다. 전철을 두 번 갈아 타고 버스를 한번 더 타야 한다. 벌써 3년째 다니지만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버스를 잘못 탄 것이다. 버스가 반대방향으로 것이다. 그럴 때는 기사에게 물어 보고 탔어야 했다.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라며 추측한 결과 지각했다.

 

한시간 먼저 오기로 했다. 서고 청소 때문이다. 최근 유리벽 공사를 했는데 쓸고 닦고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한시간 일찍 도착하여 청소하기로 한 것이다.

 

버스를 잘못 타서 십여분 늦게 도착했더니 한창 청소가 진행 중이었다. 멀리 대전에서 온 두 법우님이 바닥을 마대로 닦고 있었다. 또 두 법우님은 주방에서 그릇을 닦는 등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복층 구조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1층만 청소했다. 2층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서고가 확 바뀌었다. 유리벽 공사로 인하여 1층의 경우 서고와 사무실공간으로 분리 되었다. 이렇게 한 것은 책의 먼지 때문이다. 책에서 나오는 먼지가 기관지염 등을 유발하면 건겅에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서고는 2층에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각종 서적이 보관 되어 있다. 그런데 2층에는 수행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닥이 송판으로 되어 있어서 좌선과 경행이 가능하다.

 




청소가 끝나고 간단한 파티가 있었다. 빠짐 없이 참석하는 두 법우님이 케이크와 떡을 준비해 온 것이다. 환경이 새로 바뀐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네 가지 노력이 있는데

 

5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이 5 24일 전재성 선생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서 열렸다. 이번 주제는 올바른 노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른바 사정근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노력의 경(padhāna sutta)’(A4.13)이라 되어 있다. 네 가지 노력은 다음과 같다.

 

 

①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②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③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④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유지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A4.13)

 

 

제어의 노력(律儀勤)

 

사정근에서 첫번째 것은 제어의 노력(律儀勤)’이라고 한다. 아직 생겨나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 감각적 체험에 대한 것이다. 시각, 청각 등 감각이 대상과 만나면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때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게 되면 감각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오염된다. 매력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탐욕이 일어나고, 혐오스런 대상에 대해서는 성냄이 발생한다. 그리고 중성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어리석음이 수반된다. 이러한 것들은 제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감각기관의 단속이 요청된다.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않으면 번뇌가 일어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모든번뇌의 경’(M2)에 따르면 수호에 의하여 끊어지는 번뇌로 설명된다. 시각과 관련된 것이라면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한다. 수행승이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길 것이지만, 시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M2)라고 했다.

 

버림의 노력(斷勤)

 

사정근에서 두번째 것은 버림의 노력(斷勤)’이라고 한다. 이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버리는 것이다. 설령 감각기관을 단속하고 제어 했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업의 거울이 연상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는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마치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숙적인 것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Vism.14.100)라고 했다. 업경대를 연상케 한다. 이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면 바꿀 수 없다.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거울에 비친 것은 수동적이다. 이는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대상을 만났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났다면 거울에 비친 것처럼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거울을 바라보는 얼굴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착하고 건전한 것은 얼굴처럼 능동적”(Vism.14.100)이라고 했다.

 

업경대처럼 수동적으로 결과로서 나타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는 바꿀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조건을 바꾸면, 즉 새로운 원인을 만들면 착하고 건전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쐐기의 비유로 설명된다.

 

쐐기의 비유는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 따르면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M20) 라고 했다.

 

쐐기의 비유는 일종의 방편이다.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설명되는 작은 쐐기도 버려야할 대상이다. 해탈과 열반의 길에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착하고 건전한 것들도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의 노력(修勤)

 

사정근에서 세번째 것은 수행의 노력(修勤)’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생겨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bhāvanā’를 번역한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존재를 의미한다.

 

바와나의 어근 ‘bhū있다’ ‘되어 간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와나는 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연습을 해서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말은 연습을 통해서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말 대신 수습(修習)이라는 말도 사용된다.

 

수행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경전상에서는 칠각지를 들고 있다. 새김, 탐구, 정진, 희열, 안온, 평정의 깨달음 고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수행에 대하여 칠각지를 예로 들었을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질병의 경’(S46.15)에서 부처님이 중병에 걸린 깟싸빠에게 깟싸빠여, 내가 올바로 설한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를 익히면,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된다.”(S46.1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칠각지는 닦고(bhāvitā) 자주 익히는 것(bahulīkat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한다. 칠각지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많이 닦고 익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것이 수행의 노력이다.

 

수호의 노력(守護勤)

 

사정근에서 세번째 것은 수호의 노력(守護勤)’이다.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인상(nimitta)을 수호함으로써 나타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정상(不淨相)이다.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같은 열 가지 부정상을 말한다.

 

수호근에서 왜 부정관을 하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부정관은 착하고 건전한 것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극단적으로 괴로움에 대한 명상을 함으로 인하여 싫어하여 떠남(nibbidāya virāgāya: 厭惡-離欲)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부정관을 하지 않으면 세상과 너무 가까워져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에서 벗어나려거든 부정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관을 하면 스스로 정화가 일어나고, 부정관을 하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십자가는 일종의 부정관(不淨觀)

 

부정관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죽어서 부패해 가는 시체를 관함으로 인하여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죽음 보다 최악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괴로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진짜 수행이라고 했다.

 

흔히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을 한다. 생과 사는 같은 것이라 한다. 또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은 죽을 정도로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 극복과는 먼 말이 될 수 있다. 그다지 절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부정관이나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 놓았다면 죽음과 같은 위기가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최악의 상황에 대하여 준비한 수행을 해 놓았다면 흔들리지 않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기독교의 십자가는 극복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보면 예수가 피를 흘리고 고통받고 있는 모습이다. 더구나 손에는 못이 박혀 있다. 끔찍한 모습을 한 십자가를 기독교인들은 매일 접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부정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 고통받는 예수와 늘 함께 한다. 불교인들이 해골 등을 명상하듯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부정관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정관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 보다 더 나쁜 것이 없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고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보다 더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강력한 힘을 받는다. 최악의 상황을 보는 듯한 십자가를 보면서 현재 처한 나의 고통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고난 극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일여나 공과 같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에 매어 있을 때 고난이 닥치면 어떻게 될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인들 중에는 고난이 닥쳤을 때, 죽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왔을 때 개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부정관


부정관을 하면 강력한 힘이 생겨난다고 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마하 띳싸 장로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쩨띠야빱바따 산에서 살던 장로 마하 띳싸가 아누라다푸라로 탁발 하러 가던 중에 양가집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난 다음에 친정으로 가기 위해 꽃단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여인은 장로를 보자 넋나간 마음으로 이빨을 보이며 크게 웃었다. 장로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쳐다 보다가 이빨에 대한 부정을 지각했다.

 

그때 그녀의 남편이 뒤따라 왔다. 그는 장로를 보고서 존자여, 어떤 여인을 보았습니까?”라며 물었다. 그러자 장로는 여인이나 남자가 여기서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해골의 다발이 이 큰 길을 지나갔다.”(Vism.1.55)라고 말했다.

 

마하 띳싸장로는 여인의 이빨을 보고서 이전의 지각을 떠올렸다. 장로는 32가지 신체의 형태에 대한 부정관에서 이빨만을 취했다. 그런데 이빨에서 취한 습득인상이 열가지 부정상 중에 해골이 드러난 시체의 대응인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로는 평소에 혐오스런 해골이 드러난 시체, 혐오스런 해골이 드러난 시체라며 부정상을 닦았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장로 마하 띳싸가 이빨만을 바라보았는데, 부인이 전체적으로 시체의 해골더미로 현현한 것(Vism.6.81)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장로는 여인의 이빨을 보고 부정상을 취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장로는 평소에 부정상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사정근을 보면 단계적으로 되어 있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은 감각기관을 단속하여 제어해야 한다. 제어가 되지 않으면 불선법이 생겨날 것이다. 그럴 경우 버려야 한다. 반면에 선법은 계발하고 수호되어야 한다. 아직 생겨나지 선법을 계발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렇게 계발된 선법은 유지해야 한다.

 

불선법이라면 쳐내야 하고 선법은 증장해야 한다. 이것이 사정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말씀했다.

 

세상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즐겁다고 보고 더욱더 즐거움을 추구한다. 괴로우면 한시바삐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즐거움은 계속 유지 되지 않아서 불만족을 초래한다. 그래서 현자들은 즐거운 것을 괴롭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괴로운 느낌을 화살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을까?

 

두개의 화살이 있다. 육체적 화살과 정신적 화살을 말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지고 피곤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S36.6)라고 했다.

 

괴로운 느낌이 생겨 났을 때 화살과 같은 것으로 보라고 했다. 화살은 맞으면 아프다. 그런데 범부들은 화살을 맞았을 때 아파 죽겠네!”라며 괴로워한다. 이로 인하여 두 번째 화살을 맞게 된다. 괴로운 느낌을 화살과 같은 것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무수한 화살을 맞게 된다. 그 결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첫번째 화살에서 그쳐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했다. 몸이 아프면 육체적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다. 괴로운 느낌은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후가 중요하다. 괴로운 느낌으로 인하여 정신적 화살은 맞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자에 대하여 바른 관찰자’(S36.5)라고 했다.

 

 

2019-05-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