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담마따(法性)와 법신사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14. 23:11

담마따(法性)와 법신사상

 

 

법성게에서 법성(法性)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전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실체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법의 성품이라고 풀이 되는 법성이 우주로 확장 되었다. 이는 대승불교적 관점에 따른 것이다. 테라와다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한정짓는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우주가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법의 성품이라는 법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니까야강독 모임이 712() 전재성선생 서고에서 열렸다. 칠월 들어 첫번째 열린 모임에서 깨달은 자가 공경하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이라는 제목을 가진 경을 독송했다. 앙굿따라니까야 우루밸라의 경1’(A4.21)에 해당된다. 법성과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yannūnāha yopāya dhammo mayā abhisambuddho tameva dhamma sakkatvā garukatvā upanissāya vihareyyanti.

 

나는 내 스스로 올바로 곧바로 깨달은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은 어떨까?”(A4.21)

 

 

리스 데이비스여사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 즉 법(dhamma)은 불교발전의 어떤 특정한 시기에 신()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문장을 두고 한 말이다.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에 의지 하면서부터 법이 신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번역가 가이거는 이것을 법신(法身)사상의 시초로 보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대승불교의 싹이 튼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스승을 찾아 다녔으나 오래 있지 않았다. 궁극적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궁극적인 것을 찾기 위해 6년간 고행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하고 정각을 이루었다. 정각을 이루고 5주 째 되었을 때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A4.21)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부처님의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더 이상 스승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경하고 존중할 만한 수행자나 성직자가 없는 것에 대하여 아쉬워했다. 다섯 가지 중에서 계행의 다발(戒溫)’을 예로 든다면 나는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A4.21)라고 했다. 계행의 다발뿐만이 아니다. 삼매의 다발, 지혜의 다발, 해탈의 다발,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의 다발에 있어서도 부처님과 견줄만한 존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대승불교 예불문에 오분향례가 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고 하여 새벽과 저녁에 행하는 예불뿐만 아니라 각종불공의식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중요한 불교의례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오분향례가 초기경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다발에 의지했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다발에 의지했을 때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다. 수행단계에서는 스승이 필요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다른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다발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계행의 다발의 경우 수 많은 계행이 있는데 서로 긴밀하게 연관 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이를 추인이라도 하듯이 하느님 사함빠띠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미래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현재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수많은 사람의 슬픔을 없애주네.

 

모두가 올바른 가르침을

공경하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또한 살아갈 것이니,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법성이네.”(A4.21)

 

 

게송에 따르면 깨달은 자는 법성(dhammatā)에 의지했다. 전재성선생은 법성에 대하여 추상명사로서법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을 뜻하는 담마는 원칙, 사실, 가르침 등 다양한 뜻이 있는데 문장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담마에 대하여 단지 ()’이라고만 번역한다면 매우 경직된 번역이 될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법성을 뜻하는 담마따에 대하여 법다움이라고 번역했다.

 

게송에서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법성이네.”라고 했다. 여기서 깨달은 님들의 법성은 부처님들의 법성을 말한다. 삼세제불의 법성이라는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법다움이네.”라고 번역했다. 법성과 법다움의 차이이다.

 

법성을 뜻하는 담마따는 초기경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초기경전 중에서도 비교적 후대에 성립된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전재성선생은 대승불교의 법신사상이 담마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승불교에서 법신사상은 법(Dhamma)을 신앙하는 사상을 말한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법신에 대하여 지혜광명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이라고 한다. 또 세상을 남김없이 비추기 때문에 편조법계(偏照法界)라고 한다. 이처럼 법신사상은 빛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것도 빛이 퍼져나가는 형상이다. 이는 태양신 숭배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태양신숭배사상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고대인도에서도 수리야(suriya)라 하여 태양신숭배사상이 있었다. 태양은 빛이 퍼져 나가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담마()도 퍼져나가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는 담마를 수레바퀴로 비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치 태양에너지가 방사하듯이, 담마가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신 자체가 법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승에서 법성은 법성게로 잘 표현 되어 있다. 화엄경을 210자로 축약한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 따르면 법성은 진여나 불성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담마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등장하는 담마따는 계정혜삼학과 해탈, 해탈지견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련 있다. 그래서 법성에 대하여 법이라는 사실로 보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법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법의 성품은 다름 아닌 생멸이고, 생멸하는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법성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법성은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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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은 정혜사(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478-10, Tel: 031-576-8252)에서 열린다. 강독모임 멤버이자 전재성선생 후원자인 도현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이다. 7 27() 정혜사 법당에서 10시에 시작된다.

 




정혜사모임은 작년 12 30일 이후 꼭 7개월 만이다. 점심공양이 끝나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두물머리 다산공원으로 산책나간다. 연꽃철이기 때문에 연꽃이 절정일 것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다.

 

 

2019-07-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