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 열가지, 니까야 강독 두물머리 정혜사모임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30. 14:05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 열가지, 니까야 강독 두물머리 정혜사모임

 

 

변화를 주고자


전재성선생의 니까야강독모임이 남양주 정혜사에서 열렸다. 매월 둘째와 넷째주 금요일 저녁 7시에 전재성 선생 삼송역 서고에서 열리는데 이번에는 변화를 주기로 한 것이다. 강독모임 멤버 중의 하나인 장선생이 제안한 것이다.

 

안양에서 삼송역까지는 무척 먼 길이다. 전철로 이동한다. 넉넉잡고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남양주 정혜사에서 삼송역까지 멀기는 마찬가지이다. 정혜사 도현스님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버스와 전철과 지하철, 택시를 타고 삼송역 서고에 온다. 거의 두 시간 반은 걸리는 것 같다. 이밖에도 멀리 분당에서도 오고 인천에서도 온다.

 

매월 두 차례 열리는 강독모임 시간은 저녁 7시이다. 계절에 따라 바깥 날씨 변화를 알 수 있다. 겨울이 되면 캄캄하지만 유월 하지철이 되면 8시가 되어도 훤하다. 매번 똑 같은 밥을 먹으면 식상하다. 때로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강독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하지만 때로 밖에서 할 필요도 있다. 공기좋고 경치좋은 정혜사에서 모임 한번 갖자고 하여 성사되었다. 작년 12 30일 정혜사에서 모임을 가진지 7개월만이다.

 




2019 7 27일 토요일 오전 10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아직 두 명이 도착하지 않았다. 30분을 늦추어서 10시 반에 시작하기로 했다. 정혜사 법요집에 실려 있는 빠알리어 예경문과 삼귀의, 오계를 독송했다. 그리고 10분 가량 입정했다.

 




두 명은 11시 가까이 되어서 도착했다. 한명은 초행길이라서 버스와 지하철, 전철 등으로 산넘고 물건너 왔다. 오기까지 힘들어도 일단 오면 좋은 것이다. 현재 행복하면 지나간 과거가 아무리 힘들어도 추억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독모임과 인연 맺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가르침과의 인연이다. 삼장을 꿰뚫어 알고 있는 전재성 선생의 이야기는 들을만하다.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에 대하여

 

7 27일 정혜사 강독모임에서는 무엇을 위하여 청정한 삶을 사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경을 독송했다. 앙굿따라니까야 청정한 삶의 경’(A4.25)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ayida bhikkhave brahmacariya vussati janakuhanattha, na janalapanattha, na lābhasakkārasilokānisasattha, na itivādappamokkhānisasattha, na iti ma jano jānātūti. Atha kho ida bhikkhave brahmacariya vussati savarattha, pahāattha, virāgattha, nirodhatthanti.

 

수행승들이여,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험담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공덕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와 같이 나를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해서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제어하기 위해서이고, 끊어버리기 위해서이고, 사라지기 위해서이고, 소멸하기 위해서이다.”(A4.25)

 


 

전재성선생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에 대하여 청정한 삶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했다. 이는 브라흐마(the Creator: 梵天)와 짜리야(behavior: 行爲)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하느님의 행위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10가지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새롭게 해석한 청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말미에 설명되어 있는 사라지기 위해서이고, 소멸하기 위해서이다. (virāgattha, nirodhatthanti)”라는 말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한마디로 열반을 지향하는 삶을 말한다.

 

전재성선생은 브라흐마짜리야와 유사한 말로서 브라흐마비하라(brahmavihāra)가 있다고 했다. 이를 한역으로 범주(梵住)라고 번역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범주(四梵住)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자애, 연민, 기쁨, 평정에 대한 것으로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산다는 것은 사무량심으로 사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이비청정

 

청정한 삶 첫 번째는 사람들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사이비청정을 예로 들었다. 어느 수행자가 하루 한끼 먹는 것을 자랑한다면 사이비로 보는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 한끼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반드시 하루 한끼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세 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두 끼를 먹어 보니 좋았고, 한끼를 먹어 보니 더 좋아서 하루 한끼를 권한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율장으로 확립되어서 하루 한끼가 된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 내가 하루 한끼 먹는데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이는 자만일 것이다. 고행한 것을 자랑삼아 알리는 것이다. 이는 누가 나같이 고행하며 사는 사람 어디 있으랴?’라고 하는 우월적 자만에 해당된다. 아홉 가지 자만 중에서도 가장 상층에 있는 자만으로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는 자만을 말한다.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일까?

 

청정한 삶 두 번째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다. 이는 무소유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소유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율장을 보면 빅쿠들에게 허용하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행위는 모두 무소유에 위반 될 것이다.

 

무소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협의의 무소유와 광의의 무소유이다. 협의의 무소유는 물질적인 것이고, 광의의 무소유는 정신적인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무소유는 탐, , 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탐진치에서 생겨난 번뇌가 없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라는 것이다.

 

율장에 따르면 부처님이 인기를 얻게 되자 많은 보시가 들어 왔다. 그 결과 빅쿠들이 옷을 한보따리 갖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필요한 옷 세 벌 만을 가지라고 했다. 처음부터 무소유였던 것이 아님을 말한다. 진정한 무소유는 정신적 무소유라고 했다. 탐진치를 소멸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소유인 것이다.

 

아낀짜나(akiñcana), 아무 것도 없는 자


어느 수행자는 가진 것이 없다. 물질적으로 무소유인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번뇌가 가득 하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가진 것이 많아서 무소유의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가 다한 아라한만이 진정한 무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분노를 떠나고 또한 망상도 버려

일체의 결박을 뒤어넘어야 하리.

정신-신체적 과정에 집착하지 않아

아무 것도 없는 님에겐 괴로움이 따르지 않네.” (S1.34)

 

 

게송에서 아무 것도 없는 님(akiñcana)탐욕등의 번뇌를 떠난 자, 즉 탐진치가 없는 아라한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고, 사향사과에는 무언가 고통을 주거나 방해하는 오염이 없기 때문에 무소유이다.” Srp.III.99라고 했다.

 

무소유로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까? 이는 , 우리는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200)라는 법구경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범천에 사는 천신들은 가진 것이 없지만 기쁨을 먹고 산다고 했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청정한 삶 다섯 번째는 공덕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음을 말한다. 천상도 천상 나름이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을 쌓아 욕계천상에 태어날 수 있고, 여기에 사마타수행공덕을 쌓으면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사무량심을 닦으며 청정한 삶을 살아 범천에 태어나더라도 그것은 윤회하는 세계이다.

 

공덕이 다하면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미얀마에 이런 격언이 있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다. 우 꾼달라 사야도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서 본 것이다. 책에 따르면 몸에서 나는 빛으로 반짝이는 광채로 가득한 범천에서의 삶이 끝나고, 그의 선업의 결과와 선정의 힘이 다하면 그 즉시 돼지와 같은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365)라고 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청정한 삶 여섯 번째는 이와 같이 나를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행과 관련이 있다. 아홉 가지 자만 중에서도 최상에 해당된다. 이는  이와 같이 나를 알아주기 바란다.’라는 뜻으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여기 두타행을 닦는 자가 있다. 그는 계행에도 철저하다. 그에게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마음이 일아나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월적 자만 중에서도 우월에 해당된다. 누군가‘누가 나 같이 수행한 사람 있으랴?’라고 말한다면 수행자의 교만이다. 또 ‘누가 나 같은 배움이 있으랴?’라고 말한다면 이는 배운자의 교만이다.

 

누가 알아주어야만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논어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라는 말이다. 계행을 잘 지키고 고행을 한다고 하여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청정한 삶이 아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번뇌를 여의는 삶이 청정한 삶일 것이다.


감각능력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청정한 삶 일곱 번째는 제어하는 것(savarattha) 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기관 제어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바다의 비유를 들었다. 시각의 바다, 청각의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무섭고 무시무시한 것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의 바다에 대하여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S35.228)라고 했다.

 

시각에는 시각의 바다가 있고, 청각에는 청각의 바다가 있다. 후각에는 후각의 바다가, 촉각에는 촉각의 바다가, 정신에는 정신의 바다가 있다. 이와 같은 바다는 각각의 세계를 뜻한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이와 같은 여섯 감각능력으로 인지 되는 세계에 대하여 우주를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은 바다와 같아서 감각능력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 시각의 바다, 청각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청정한 삶은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는 것에 달려있기도 하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청정한 삶 여덟 번째는 끊어 버리는 것(pahāattha)’ 이다. 전재성선생은 끊어 버림을 뜻하는 빠알리어 빠하나(pahāa)에 대하여 버린다의 뜻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버리는 것에 대하여 잘못하면 허무주의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아마도 베란자의 경에서 단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보였다.

 

베란자의 경에 따르면 바라문 베란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고 말했다. 베란자는 소문만 듣고 가르침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A8.11)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름을 말한다.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합니다.” (A8.11)라고 말했다.

 

부처님이 오로지 괴로움의 진리만 설했다면 허무주의자로 오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뿐만 아니라 발생의 원인, 소멸, 소멸방법에 대하여 설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법이 전해져 왔다.

 

부처님이 단멸을 설한 것은 탐진치의 소멸도 되지만 괴로움을 끊어 버리는 것도 된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끊어버림은 근본적으로 괴로움을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불교를 조금만 알았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청정한 삶 아홉 번째는 사라지는 것(virāgattha)’이다. 사라짐은 비라가(virago)의 번역어이다. 색깔이 변색되어 감을 뜻한다. 마치 연극이 끝났을 때 페이드아웃(fade-out)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잘못 사용 되면 자살을 합리화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어느 정치인이 자살했다. 이전 해에는 또다른 유명정치인이 투신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전재성 선생은 두 정치인에 대하여 불교를 조금만 알았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자살하여 사라진다고 하여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행위가 청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동력이 되어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적 오염원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이 동력이 되어 윤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멸이란 무엇일까?

 

정말 죽고자 한다면

 

청정한 삶 열 번째는 소멸하는 것(nirodhatthan)’이다. 소멸을 뜻하는 빠알리어 니로다(nirodha)‘cessation’의 뜻으로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마치 등불의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멸은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만 가능함을 말한다.

 

자살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윤회하는 것이다. 여기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대개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매우 비겁한 방법이라고 했다. 정말 죽고자 한다면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앉아서 죽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면서 멈추게 하는 것이다.

 

호흡이 멈추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호흡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음은 자기자신도 어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죽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호흡을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수행은 멈추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멈춤은 다름 아닌 삼매를 말한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소멸하려거든 멈추어야 한다. 현재 하고 있는 행위를 당장 멈추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설법을 듣는다고 하여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비트겐슈타인의 프리겐그라스 비유를 들었다.

 

파리를 잡기 위한 도구가 있다. 주둥이가 작고 아래가 큰 병이다. 병안에 생선을 넣어 두면 파리가 생선냄새를 맡고 좁은 유리병 주둥이로 들어간다. 그런데 한번 들어간 파리는 병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언어의 한계를 들었다.

 

아무리 설법을 들어도 언어로 된 설명이다. 개념화 된 언어로 설명해 보지만 진실을 알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언어라는 것은 투명한 유리병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한 투명한 유리벽에 부딪치는 파리와 같다는 것이다. 언어에 의존하면 자기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파리신세와 같음을 말한다.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여기서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매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도 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했다.

 

끊어 버리고, 사라지고, 소멸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멈추려면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로 멈출 수 있는 자만이 유리병과 같은 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소설 데미안이 있다. 헤르만 헤세가 지은 것이다. 데미안에서는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헤르만 헤세가 맛지마니까야 병아리 부화 비유 이야기’(M16)를 보고 영감을 얻은 것이다.

 

자신이 형성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이 구축한 자아라는 단단한 알껍질을 깨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베란자의 경에서는 병아리부화비유에 대하여 무명의 껍질을 깨고”(A8.11)라고 하여 무명타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수행은 개인공간에서 법문은 공개홀에서

 

전재성선생 설명이 모두 끝났다. 전재성선생은 이런 자리가 마련 된 것에 대하여큰 의미를 부여했다. 수행은 개인적으로 하지만 법문은 함께 들어야 함을 말한다.  한국불교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명상홀에서 함께 명상을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에 없었다고 한다.

 

법당은 본래 법문 듣는 장소이지 함께 모여 명상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예로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이 나무 밑이다. 이것들이 텅 빈 집이다.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S43.1)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빈집에 가서 홀로 수행 하는 것이다. 설법은 함께 들어도 수행은 각자 해야 함을 말한다.

 

법당에서는 법문 듣고 수행은 각방에서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래서인지 미얀마수행센터를 보면 일인일실이 주어진다. 목욕탕까지 있어서 일인일실일욕실이 된다. 예불이나 법문할 때는 커다란 홀에 모인다. 또한 인터뷰할 때 함께 모인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홀로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초기에는 모여서 하는 것도 나을 것 같다.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으면 토굴 같은 곳에서 홀로 정진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자기소개시간에

 

자기소개시간이 되었다. 이날 모두 19명이 참석했다. 20명 예상 했는데 어느 정도 들어 맞은 것이다. 스님은 두 명 참석했다. 도현스님과 동출스님이다. 도현스님은 정혜사 주지스님이니 당연 참석이다.

 

동출스님은 멀리 북한산 서쪽에 있는 절에서 오셨다. 배움이 있는 곳에서 늘 볼 수 있는 스님이다. 지난 봄 휴전선 두타연행사를 함께 했다. 펀치볼 전몰자 추모제에서는 천도재를 지내 주셨다. 정평불과 인연이 많은 스님이다.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생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에 참여를 부탁하자 흔쾌히 들어 주었다. 큰누나 같기도 하고 여장부같기도 하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어렵게 왔다. 그동안 말로만 듣고 책으로만 접한 전재성선생을 직접 뵙게 되어서 반갑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임과 전재성선생과의 인연을 말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한번이라도 모임에 나온 사람을 대상으로 안내문을 발송했다.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행사를 소개하고 참여를 요청했다. 어느 카톡에서는 과잉홍보라 하여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사람이라도 더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알렸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은 줄 알기 때문이다.

 

보시도 타이밍

 

점심시간이 되었다. 정혜사에서 정성껏 준비했다. 주지스님에 따르면 사람을 세 명이나 불러서 준비했다고 한다. 밥은 보약과 같다. 온갖 약재가 들어가 있는 듯한 약밥이다. 갖가지 나물과 샐러드 등 부페식으로 준비했다. 평소 명상홀로 사용되는 문수전에서 식사를 했다.

 




보시도 타이밍이라고 한다. 보시하고 싶다고 해서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다. 식사가 끝나고 옥수수를 선물 받았다. 정혜사 가까이 사는 장계영선생이 찐옥수를 선물로 듬뿍 안겨 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선생은 보시공덕 타이밍을 잘 잡은 것이다.

 

두물머리 청정지역에서

 

식사후에 두물머리 산책을 나갔다. 지난 겨울에는 정혜사 아래 다산공원 강변으로 나갔지만 이번에는 차를 이용하여 두물머리로 간 것이다. 마침 비가 개여서 하늘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무척 더웠다. 습기를 머금은 무더위이다. 태양빛이 너무 강렬하여 그냥 다닐 수 없었다. 양산을 쓰고 다녀야 할 정도로 강했다. 남자들은 우산을 펼쳤다. 비올 때 사용되는 우산이 햇볕 가리개로 사용된 것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누구나 한번쯤 와 보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강물은 푸르고 하늘은 맑다. 전날 비가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깨끗이 씻겨 나간 것 같다. 마음도 맑고 깨끗해진 것 같다. 두물머리 청정지역에서 연꽃이 피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핀 연꽃이 더욱 더 청정해 보였다.

 

 

2019-07-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