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전도(顚倒)에 대하여
니까야강독모임 가는 날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든다. 약간 몸살기가 있기 때문이다. 50키로 가량 되는 그 먼거리를 힘들게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대부분 사람들은 쉬기 마련이다. 굳이 힘들게 그 먼 곳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갈 필요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전철을 타면 피곤하다. 서서 가는 것이 힘이 든 것이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의 호흡기에서 나오는 탁한 것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감기라도 걸린 사람이 있다면 공기를 통하여 전염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혼자 마스크를 쓰고 있을 수도 없다. 마침 자리가 났다. 염치불구하고 앉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 탔다. 언제나 그렇듯이 3가역은 혼잡의 극치를 이룬다. 통로를 빠져 나가기 힘들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와 비례하여 공기도 탁하다. 퇴근시간 만원이 된 전철안에는 형광등 아래 무표정한 사람들이 스마트폰 보기에 바쁘다.
구파발역에서 버스로 갈아탔다. 강독모임이 열리는 삼송테크노밸리까지는 세 정거장 거리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공기가 다르다. 아까까지만 해도 질식할 듯 괴로웠으나 공기가 상쾌하다. 참고 버틴 보람이 있다. 오늘은 누가 왔을까?
강독모임에 늦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급적 30분 전에 앉아 있으려고 한다. 전재성 선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해서 앉아 있으니 전재성선생은 주전자에 보이차를 끓여 놓았다. 이것도 일종의 서비스일 것이다. 먼 길을 찾아 간 것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도현스님이 도착했다. 남양주 정혜사에서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버스와 전철로 찾아 온다. 삼송역에서 택시타고 왔다고 한다. 홍승봉선생이 모습을 보였다. 지난번 오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늘 보던 얼굴이라 반가웠다.
두 분이 새로 왔다. 혜소스님이 원주에서 차를 몰고 왔다. 혜소스님과 인연이 있다. 페이스북에서 알게된 페이스북친구, 페친이다. 청암사 계간지 ‘월간청암’에 원고를 부탁받아 기고한 적이 있다. 이런 연으로 알게 되었다.
새로 노보살이 왔는데 놀랍게도 삼배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장면은 처음 본다. 삼배는 스님에게나 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찬 바닥에서 공손히 절을 했다. 이런 모습에 전재성선생은 물론 모인 사람들도 당황했다.
늘 옆자리에 앉던 장계영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개근하기 때문에 늦더라도 오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되어서 독송하는 장면을 사진찍어 카톡방에 올렸더니 오늘이 강독모임인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강독모임이 끝나면 차로 도현스님을 모시고 가는데 스님이 그 먼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에 대한 염려를 했다. 모임이 끝나고 손지현선생이 차로 모셔다 드렸다.
네 가지 전도(顚倒)에 대하여
이번 강독모임은 ‘거꾸로 된 것, 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A4.49)이다. 네 가지 전도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독송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 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
네 가지 전도는 한자어로 상, 락, 아, 정에 대한 것이다.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하여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거꾸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것은 지각의 전도(saññāvipallāsa), 마음의 전도(cittavipallāsa), 견해의 전도(diṭṭhivipallāsa)를 말한다.
한번 사견(邪見)에 빠지면
전도라는 말은 빠알리어 ‘vipallāsa’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로 ‘perversions’ 또는 ‘distortions’의 뜻이다. 영어 ‘perversions’는 곡해, 악용, 도착의 뜻이 있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전도는 수다원이 될 때 제거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류자가 되면 세 가지가 부서진다.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계금취견을 말한다. 세 가지 전도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이러한 전도에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의 질적 전도가 있다. Mrp.III.91에 따르면, 그것은 곧 무상한 것에 대해 항상하다고 보는 전도, 괴로운 것에 대해 즐겁다고 보는 전도, 무실체적인 것에 대해 실체가 있다고 보는 전도이다. 이러한 지각의 오염은 마음의 오염을 초래하고 마음의 오염은 견해의 오염으로 확대된다. 이 가운데 지각의 오염이 가장 근원적이다. 그래서 MN.II.507에 따르면, 문둥병 환자는 불속에서도 즐겁다는 전도된 지각을 얻는다.
Lba.II.208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바지라냐나 마하나야까 장로는 ‘어떤 사람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보고,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각의 전도이고, 그것으로 인해 공포가 생겨나면 그것은 마음의 전도이고, 이 귀신을 제거하기 위해 퇴마의식을 행한다면 그것은 견해의 전도이다.’라고 했다.(앙굿따라니까야 4권 285번 각주)
세 가지 전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지각의 전도’를 들었다. 밤중에 귀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밤중에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각주에서는 문둥병환자의 예를 들었다. 문둥병환자는 가려우면 긁는데, 긁으면 긁을수록 아픈 것이 아니라 시원하다는 것이다. 아귀는 피고름을 맑은 강물로 본다고 한다. 자기의 인식정도에 따라서 전도적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다.
세 가지 전도중에서 최악의 전도는 ‘견해의 전도’일 것이다. 주석에서는 퇴마의식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한번 견해가 굳어지면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유튜브에서 최진석선생의 장자강연을 듣고 있는데 이런 말을 했다. 최선생은 “특정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견해라는 말은 초기불교에서는 부정적 언표로 사용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견해의 모음(diṭṭhisaṃyutta)’(S24)에서도 확인된다. 견해상윳따에서는 육사외도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견해는 ‘사견(邪見)’이기 쉽다. 부처님 가르침을 제외한 모든 견해는 사견인 것이다. 그런데 한번 사견에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최진석 선생은 ‘불가능’이라고 말했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전재성선생은 네 가지 전도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했다.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한 전도인 상, 락, 아, 정에 대한 것이다. 먼저 무상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이 현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는 것으로 보는 전도를 말한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다리도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리뿐만 아니라 건물 등 견고하게 보이는 것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된 생각일 뿐이라고 했다.
지금 견고하게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 붕괴하고 말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시시각각 붕괴하고 있음에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속아서 산다’라고 했다. 서양철학이 대표적이다.
서양철학에 ‘이데아론’이 있다. 플라톤이 주장한 것이다. 어떤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영원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불교는 정반대라고 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대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말을 달리 표현하면 거꾸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거꾸로 보는 것을 바로 잡아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전도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즐거움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화살로 보라고 했다. 이 말은 강독모임 때마다 늘 하는 말로서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이 세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으면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를 인용하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 자”라고 말했다. 이 말 역시 여러 반 강조하는 말이다. 경에서는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즐거움을 추구한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료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눈으로 귀로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위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자기가 생각한 즐거운 곳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자살을 들었다.
이 세계를 벗어나려면 버려야 한다. 그것은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눈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결코 이 세상을 버릴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자살도 욕망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죽으면 괴로움도 없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체 없는데 실체가 있다고
무아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는 전도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세 가지 자아로 설명했다. 초기경전에서 무수하게 볼 수 있는 정형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S22.100)라는 말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나의 것’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자아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나의 것이라고 먼저 한정해 놓아야 내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세 가지 나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갈애, 자만, 유신견으로 설명했다. ‘이것은 나의 것’은 갈애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나’라는 것은 자만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는 것은 사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파아옥 사야도의 법문집 ‘업과 윤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나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1) 배우지 못한 범부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을 ‘이것은 나의 것’(eta
ṃ
mama)이라 여긴다. 이것은 갈애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ta
ṇhā-ggāha)
(2) 배우지 못한 범부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을 ‘이것이 나’ (eso'hamasmi)라고 여긴다. 그것은 자만심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m
āna-ggāha)
(3) 배우지 못한 범부는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을 ‘이것은 나의 자아’ (eso me att
ā
)라고 여긴다. 그것은 사견에 구속되어 있음을 드러난 것이다.( di
ṭṭhi-ggā
ha) (파아옥 사야도의 업과 윤회, 47p)
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 손이 있다. 이를 ‘나의 손’이라고 한정하면 ‘내손’이 되는 것이다. 얼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로지 얼굴 하나 보고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굴은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다. 얼굴에 뾰로지 하나라도 생기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얼굴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얼굴은 내가 된다. 더 나아가 얼굴은 자아가 된다. 느낌도, 지각도,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한정하는 순간 오온은 내것이 된다. 그래서 견고한 추상적 자아가 형성된다. 유신견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번 유신견이 생겨나면 벗어나기 힘들다. 예류자가 되기 전까지는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는 갈애와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는 자만, 그리고 오온에 대하여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유신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청정하다고
마지막으로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보는 전도가 있다. 여기서 더러운 것은 몸이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우리 몸에 대하여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열 가지 부정관과 서른 두 가지 신체의 기관을 명상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몸에 대하여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매나 얼굴에 매료 되어서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꺼풀만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정육점의 고기덩어리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테리가타에서는 기녀였던 암바빨리 장로니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에 대하여 덧없는 것으로 표현했다.
암바빨리 장로니는 코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산봉우리처럼, 젊음이 한창일 때에 나의 코는 아름다웠으나, 늙어서 말라비틀어진 식물줄기와 같으니”(Thig.258)라고 했다. 또 유방에 대해서는 “위로 둥글게 부풀러 올라 봉긋하여 예전에 나의 두 유방은 아름다웠지만, 물 없는 물주머니처럼 늘어졌으니, 진리를 말하는 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Thig.265)라고 했다.
우리 몸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늙어지면 추한 모습이 된다. 그럼에도 겉모습에 대하여 아름답게 보는 것에 대하여 전도된 것이라고 했다. 테라가타에서 목갈라나 존자는 자신을 유혹하는 기녀에 대하여 “피부로 엮여진 분뇨의 자루,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 (Thag.1157)라고 했다.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류도(逆流道)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항상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고, 청정하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고, 더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전도에 대하여 우주삼라만상에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부처님은 항상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해서 설했다. 그래서 로히땃싸의 경에서 부처님은“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도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A4.45)라고 말씀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오온을 떠나서 말하면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은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하였다. 부처님이 네 가지 전도에 대하여 말한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범주를 벗어난 가르침이 아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마무리했다.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지각하고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더러움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삿된 견해에 빠지고 마음이 혼란하여
지각이 전도된 자들은
악마의 멍에게 묶여
멍에로부터 안온을 얻지 못하고,
뭇삶들은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끄는
윤회를 거듭하지만,
광명을 비추는
깨달은 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괴로움의 종식으로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을 밝히네.
지혜로운 님들은
그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성찰하니.
무상을 무상으로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실체 없음을 실체 없음으로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관찰하고
올바른 견해를 취하여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하네.”(A4.49)
2019-10-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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