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네 가지 오염에 대하여
10월 두 번째 니까야강독모임이 삼송역 삼송테크노밸리 서고에서 열렸다. 이번 주제는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의 오염’에 대한 것이다. 경을 보니 마치 오늘날 권승들의 행태를 보는 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은 행태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앙굿따라니까야 ‘오염의 경’(A4.50)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네 가지 오염이 소개 되어 있다. 해와 달을 가리는 것에 대하여 구름, 안개, 연기와 먼지, 그리고 라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라후는 개기일식이나 개기월식을 말한다.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면 해나 달이 가려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두워지고 빛을 잃게 된다. 수행자와 성직자가 오염되면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수행자의 네 가지 오염에 대하여
수행자와 성직자의 오염은 어떤 것일까? 마치 구름이나 안개끼듯이, 연기와 먼지로 자욱하듯이,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난 것처럼 어두워지고 빛이 바래지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들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곡주나 과일주등의 술을 마시는 것을 삼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첫 번째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의 오염이 있다. 그 오염에 의해서 오염된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빛나지도 비추지도 광명을 놓지도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성적인 교섭을 하며 성적인 교섭을 삼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의 오염이 있다. 그 오염에 의해서 오염된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빛나지도 비추지도 광명을 놓지도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금과 은을 받고 금과 은을 받는 것을 삼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세 번째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의 오염이 있다. 그 오염에 의해서 오염된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빛나지도 비추지도 광명을 놓지도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삿된 생계수단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삿된 생계수단을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네 번째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의 오염이 있다. 그 오염에 의해서 오염된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빛나지도 비추지도 광명을 놓지도 못한다.”(A4.50)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에게 네 가지 오염이 있다. 그것은 술을 마시는 것(surāmerayapānā appaṭiviratā), 성적교섭을 하는 것(methunasmā dhammā appaṭiviratā), 금과 은을 받는 것(jātarūparajataṃ sādiyanti), 그리고 삿된 생계수단을 유지하는 것(micchājīvā appaṭivirat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오늘날 범계승에게서도 볼 수 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출가자가는 곡차라는 이름으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은처자를 두고 있다. 처자식이 있다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모아야 하고 삿된 생계수단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스님은 더 이상 스님이 아니다. 반승반속이라고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반승반속은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 같아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반승반속에게 보시를 하고 공양해도 과보를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왜 술을 마셔서는 안되는가
수행자나 성직자가 술을 마시면 왜 안될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술 마시면 안되는 이유에 대하여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행자가 사띠를 유지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 일을 해도 집중이 안되고 공부를 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좌선이나 행선, 일상에서 사띠 하는데 있어서 음주행위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 이런 이유로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음주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타종교에서는 술 마시는 것이 허물이 되지 않는다. 특히 카톨릭이 그렇다. 카톨릭 신부는 독신으로 살지만 알코올중독자가 많다고 한다. 포도주에 대하여 예수의 피로 생각하고 마시기 때문에 술 마시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카톨릭 신부 중에는 술고래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성직자가 알코올중독자가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위하여 독신으로 살며 신부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십계명에는 불음주계가 없다. 이슬람에서는 음주를 하면 사형이라고 한다. 종교마다 음주에 대한 것이 차이가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오계 중의 하나로서 매우 엄격하다. 테라와다 예불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삼귀의와 오계인데 오계를 빠알리어로 독송할 때 반드시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라고 낭송한다. 법회할 때 마다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오계를 지키기 어려움을 말한다. 어기면 참회하고 또 받아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계율(sjkhapada)이라고 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신중해야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율장에서 불음주계를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속죄죄가 적용된다고 했다. 오계가 대부분 바라이죄와 관련 있는데 불음주계만은 예외이다. 음주를 하면 고백하고 참회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과 사고의 칠팔십프로가 음주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불음주계만 잘 지켜도 세상에서 일아나는 사건과 사고는 엄청나게 줄어 들 것이다.
불교인이 음주하면 오계를 어긴 것이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것은 허용될 것이다. 사회생활하다 보면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초기경전에서 음주를 했어도 선처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찾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씰라의 경’(A6.44)이다. 재가의 여신도 미가씰라가 “청정한 삶을 산 사람과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사람이 모두 미래 동일한 운명을 받는 것입니까?” (A6.44)라고 물어본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함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부처님은 사람의 다양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많이 배우고 바른 지혜로 관통하여 해탈에 이른 자에 대하여 “일시적인 해탈의 성취가 있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에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에 가는 자가 아니다.”(A6.44)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 이런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A6.44)라고 말했다. 술을 마시는 등 비속한 삶을 산 자도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면 과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없다.” (A6.44)라고 하여 사람에 대하여 신중하게 평가하라고 했다.
왜 성적교섭을 해서는 안되는가
출가한 수행자에게 성적교섭은 있을 수 없다. 율장에서는 수백페이지에 걸쳐서 음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율장의 상당량이 음계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청정한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는 순결을 의미한다. 이 말은 원래 바라문의 네 가지 수행기에서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梵行期)’에 해당된다.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시기인 범행기에는 성적교섭과 무관한 시기이다. 성접교섭은 범행기가 끝나고 가정에서 결혼하여 생활하는 시기인 가주기에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브라흐마짜리야 즉, 범행기에서 성적교섭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청정한 삶이 요구된다. 불교에서 수행자의 삶은 합습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율장을 보면 성적교섭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이 있다. 율장비구계를 보면 불사음계가 생겨난 인연담이 있다. 마치 한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출가한 아들에게 아들 하나 낳아 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청에 못이겨 전처와 성적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맹독을 지닌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 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Vin.III.20)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엄하게 말했을까? 이는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자여, 그것을 인연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어서 “그 때문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출가수행자가 성접교섭을 하면 바라이죄를 짓게 되어서 승단에서 추방된다. 이는 율장비구계에서 부처님이“수행승이여, 수행승이 성적교섭을 행한다면,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함께 살 수 없다.”(Vin.III.20)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 금과 은을 받아서는 안되는가
수행자와 성직자는 금과 은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만일 금과 은을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S42.10)라고 했다.
금과 은은 오늘날 돈과 같은 것이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감각적 쾌락의 재난에 빠질 위험이 크다. 오늘날 돈 많은 재벌가의 이세 또는 삼세가 마약으로 인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출가한 수행승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백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베살리의 진보적 수행승들이 금과 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에 대한 문제를 ‘십사’라고 하는데 제2결집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결집에서 금과 은을 받는 것은 비법으로 간주 되었다. 이는 부처님이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여겨도 좋습니다.”(S42.10)라고 말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왜 호흡이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인가
강독모임에서 질문이 있었다. 전재성선생은 호흡에 대하여 미세하게 느껴지는 신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어느 질문자는 호흡에 대하여 ‘신체적 작용’이 아닌지에 대하여 물었다. 신체와 신체적 작용은 다른 것이다. 호흡이 신체와 관련 있다는 것은 ‘까마부의 경’(S41.6)을 보면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을 보면 신, 구, 의에 대하여 선정의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경을 보면 신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 형성입니다.” (S41.6)라고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호흡은 네 번째 선정에서 사라진다. 참고로 사유는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고,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호흡명상을 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초선에서 이선으로 올라갈 때 사라진다. 다음으로 네 번째 선정에서 호흡이 사라지는데 호흡은 신체적 형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최종적으로 지각과 느낌이 사라지는데 이는 정신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다면 정신적 형성도 사라지지 때문에 멸진정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호흡명상을 하면 차례로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오근과 오력은 어떤 관계일까?
또하나 질문이 있었다. 질문자는 오근과 오력에 대하여 차제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오근에서 오력으로 전개 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전재성선생은 오근과 오력은 차제관계가 아니라 별개라고 말했다. 오근과 오력은 별개이면서 또한 동시작용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마치 두 개의 강물이 만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오근과 오력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근과 오력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마도 신, 근, 염, 정, 혜라는 마음의 작용(cetasika) 다섯 가지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믿음의 능력은 곧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힘은 곧 믿음의 능력이다.”(S48.43)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서 차이가 있을까?
주석서에서는 오근과 오력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경에서 언급된 “믿음의 능력은 곧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힘은 곧 믿음의 능력”이라는 말에 대하여 “그것은 결정의 특징을 지배한다는 믿음의 능력이고 불신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믿음의 힘이다.”(Srp.III.24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근에 있어서 믿음은 지배의 의미가 있고, 오력에 있어서 믿음은 흔들림 없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배와 흔들림없음의 차이이다.
오근은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능력(indriya)이고 오력은 흔들리지 않으므로 힘(bala)이다. 이것이 차이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오근과 오력의 차이에 대하여 “불신-나태-방일-산란-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까닭에 극복이라고 불리는 우세의 의미에서 능력이라고 한다. 또한 불신 등으로 인해서 패배당하지 않는 까닭에 부동의 의미에서 힘이라고 한다. 그 양자는 모두 믿음 등으로 다섯 가지가 된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이라고 한다.”(Vism.22.37)라고 되어 있다.
오근과 오력에 대하여 차제적 단계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선생은 상윳따니까야 제6권 해제에서 능력에 대하여 약한 초기단계로 보고 힘에 대하여 강한 발전적 단계로 보는 것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상윳따6권 해제, 36페이지)라고 하여 부정했다. 왜 그럴까? 전재성선생은 강독모임에서 오근과 오력에 대하여 두개의 강물이 만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강이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나아가고 동쪽으로 들어가는데 그 가운데 섬이 있다면, 수행승들이여, 강에 하나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그 강에 두 개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강에 하나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섬의 동쪽 연안의 물의 흐름과 서쪽 연안의 물의 흐름이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그 강에 하나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이다.
수행승들이여, 강에 두 개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그 섬의 북쪽 연안의 물의 흐름과 남쪽 연안의 물의 흐름이 있는데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그 강에 두 개의 흐름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이유와 근거이다.”(S48.53)
상윳따니까야 싸께따의 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근과 오력은 같은 것이면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가운데 섬이 있는데 섬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보면 오근과 오력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섬을 중심으로 하여 상하로 보면 물줄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오근과 오력은 차제관계가 아님이 분명하다. 오근은 약한 것이고 오력은 강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오근과 오력은 별개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9-10-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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