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독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장소는 너무 멀다. 서울에서도 북서쪽 끝자락에 있다. 서울 경계선을 넘어서 고양시에 있다. 삼송역 근처에 있어서 50키로가량되는 것 같다. 퇴근시간이어서일까 종로3가에서 지하철을 갈아탈 때 혼잡이 극에 달한다. 대부분 검은 옷 일색이다.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삼송테크노밸리 정류장에 내리면 공기가 다르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 언제그랬냐는듯이 피로가 싹 가신다.
배우려면 찾아가야
강독모임에 50키로는 긴 거리가 아니다. 멀리 남양주 두물머리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더 멀리 원주에서 오는 사람도 있다. 원주에서 삼송역까지는 얼마나 될까? 지도를 보니 130키로가량된다. 스님은 한달에 두 번 있는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먼거리를 승용차를 이용하여 달려오는 것이다. 스님이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것은 민족사에서 최근 발간된 ‘청암사 승가대학 비구니스님들의 좌충우돌 수행이야기’이다. 스님에게 명상음악씨디를 한장 주었다.
배우려면 본래 찾아 가야 하는 것이다. 배우고자 한다면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생이 학생 있는 곳으로 찾아 갈수도 있을 것이다. 과외선생 같은 케이스를 말한다. 학원강사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지식을 파는 사람이라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갈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배움의 목적이라면 배우려고 하는 자가 찾아 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느 모임이든지 나오는 사람만 나온다. 모임에 나오는 것은 이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속된말로 건질 것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시간과 돈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강독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독모임에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있다. 첫번째로 모두 ‘후원자’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배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월 능력껏 후원하는 사람들이 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두번째로 모두 ‘편집자’라고도 볼 수 있다. 번역이 완료되면 교정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오자, 탈자 등 오류가 발견되면 알려 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다.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올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 비유
12월 첫번째 니까야강독모임에서는 네 개의 경을 독송했다. 차례로 나열하면 ‘자리이타를 위한 삶의 의미’(A4.95), ‘칭찬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비난해야 할 사람을 칭찬한다면’(A4.100), ‘천둥만 치고 비는 내리지 않는 사람이란 누구인가?’(A4.102),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위의와 통찰의 관계’(A4.103) 이렇게 네 개의 경에 대한 것이다. 모두 네 가지 법수로 설명되어 있다.
자리이타행은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 비유를 들어 설명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화장용 장작의 경’(A4.95)을 보면,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과도 같다고 했다. 이는 최악의 사람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반승반속’이라고 했다. 이는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와 재가의 양자에서 소외된다.”(Vism.1.154)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최악이 있다면 최상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최상의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나 이익되게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우유의 비유를 들었다. 소에서 우유가 나오고, 우유에서 크림이, 크림에서 신선한 버터가, 신선한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버터기름에서 버터크림이 나오듯이, 자리이타행을 하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유제품중에 최상을 버터크림(sappimaṇḍa)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제호(醍醐)이다. 마찬가지로 자리이타행을 하면 최상의 경지에 올라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네 종류의 사람을 보면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을 더 높게 쳐 준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는 상구보리하화중생과도 관련이 있다. 먼저 자신의 수양을 하고 다음에 타인을 구제하는 것이다. 또 자애관과도 관련이 있다. 자애수행을 보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비난은 적당한 때에
두번째로 독송한 것은 “칭찬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비난해야 할 사람을 칭찬한다면”이라는 주제에 대한 경이다. 앙굿따라니까야 ‘뽀딸리야의 경’(A4.100)이 그것이다. 경에서 유행자 뽀딸리야는 부처님에게 비난과 칭찬에 대하여 세상에서 발견되는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말한다. 그렇다면 외도 유행자가 보기에 최상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놀랍게도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칭찬해야 할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최상이라고 했다. 외도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평정이야말로 훌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상대방이 잘못해도 지적하지 않거나 상대방이 잘 해도 칭찬하지 않다면 무관심한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립되어서 혼자 살아갈 것이다. 관계망이 없으니 독각승처럼 살아갈 것이다. 외도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평정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무량심이 실패하는 요인이 있다. 자애가 애정으로 변질될 때, 연민이 근심으로 노심초사할 때, 기쁨이 들뜸으로 떠들썩 할 때, 평정이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사무량심이 깨지는 것이다.
평정 (upekkha)이 실패하는 요인으로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때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했을 때이다. 부처님은 비난과 칭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뽀딸리야여,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나는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비난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고, 올바른 때에 사실과 진실에 맞게 칭찬해야 할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 더욱 훌륭하고 더욱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A4.100)
부처님은 비난해야 할 사람은 비난하라고 했다. 또 칭찬해야 할 사람은 칭찬하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이전에 독송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의 경’(A4.73)과 상충되는 면도 있다. 특히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당한 때’라고 했다. 자자와 포살과 같은 모임이 있을 때는 상대방의 허물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천둥만 치고 비가 내리지 않은 사람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비구름의 비유’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비구름의 경’(A4.102)이 그것이다. 이 비유를 보면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인도에서 몬순철이 되면 비가 내리는데 우리나라와 달리 엄청나게 내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다고 했다.
네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첫번째는 천둥만 치고 비가 내리지 않는 케이스가 있다. 말만 있을 뿐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두루두루 배웠지만 사성제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해당된다고 했다.
평생 배우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강좌 저 강연 찾아 다니며 열심히 배운다. 이런 것은 자랑이 아니다. 어느 정도 배웠으면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수행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말을 잘 듣는 것은 말을 잘 하기 위한 것이고, 책을 잘 보는 것은 글을 잘 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 배우기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천둥만 치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사람이 천둥도 칠 뿐만 아니라 비도 내리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의 가르침을 두루배웠다. 또한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사람은 천둥도 치고 번개도 치고 비도 내린다.”(A4.102)
부처님은 경, 응송 등 구분교(九分敎)의 가르침을 배웠다면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학만 배우고 실천이 따르지 않았을 때 교학승이라 할 것이다. 반면 수행만 하고 교학을 하지 않았다면 수행승이라 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는 구분교의 가르침과 사성제의 실천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안으로 꽉 찬 사람
옹기의 비유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옹기의 경’(A4.103)이 그것이다. 이는 ‘사성제’와 ‘위의’에 대하여 옹기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사람이 텅 비었지만 닫혀 있는가?”(A4.103)라고 했을 때, 이는 안으로 사성제를 통찰하지 못한 자에 대하여 텅 빈 자라 하고 밖으로 위의를 갖춘 자에 대하여 닫혀 있는 자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최상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최상의 사람에 대하여 옹기의 비유를 들어 이렀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사람이 가득 찼을 뿐만 아니라 닫혀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나아가고 물러가고 쳐다보고 돌아보고 구부리고 펴고 가사와 발우와 의복을 지닐 때에도 품위가 있다. 또한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가득 찼을 뿐만 아니라 닫혀 있다.”(A4.103)
품위가 있다는 것은 위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사띠가 잘 유지되고 있는 사람은 위의가 있어 보일 것이다.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존자를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위의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 덮게가 덮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통찰력도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안으로 꽉 찬 사람이다. 항아리에 가득 찬 것과 같다.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한달에 두 번 있는 강독모임에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피곤해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생 배우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배움은 배움으로 끝나기 쉽다. 시간과 돈과 정력을 소비해가며 강독모임에 참석했지만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지하게 경청한다. 그리고 노트를 한다. 녹음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강독모임에서 들었던 것을 노트한다. 받아 적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아 적는다. 사소해 보이는 것도 받아 적는다. 글 쓰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글로 남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
2019-12-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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