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한달에 두 번 있는 니까야강독모임이다. 한번 빠지면 한달만에 가게 된다. 11월 첫번째 모임이 그랬다. 안양에서 고양까지는 먼 거리이다. 전철과 지하철, 그리고 버스로 갈아타며 가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 귀가길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밤늦은 시간 귀가길에 전철은 늘 만원이다.
거의 11시 대 전철안에는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다. 안양, 수원, 천안 등 수도권 1호선 전철안에는 사람냄새로 가득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러나 도중에 전화를 받고 회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곽순환고속도로 김포IC에서 회차하여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11월 첫번째 모임은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체카톡방에 홍광순선생이 녹음파일을 올려 놓아서 시간 있을 때 들었다. 녹음을 듣고 후기를 쓰려 했으나 밀린 일이 너무 많아서 11월 두 번째 강독모임을 맞게 되었다.
일찍 도착하여
해가 엄청나게 짧아 졌다. 저녁 6시만 되도 캄캄하다. 구파발역에서 삼송테크노밸리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에 지나지 않는다. 강독모임이 7시에 시작되지만 가급적 30분 먼저 도착하려고 노력한다. 도착해보니 선덕선생과 손지현선생이 먼저 도착하여 청소하고 있었다. 걸레를 들고 책상을 닦고 주방에 있는 그릇등을 닦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찍 도착했으니 뭐라도 하나 해야 한다. 올 사람들을 위하여 보이차를 준비했다. 준비는 간단하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받아서 보이차를 넣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착하면 머그컵으로 한잔씩 따라 주는 것이다.
이날 이상길선생은 큰 보시를 했다. 전재성선생을 위하여 건강식품선물 셋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참석자들을 위하여 작은 빵과 귤을 나누어 주었다. 평소 남모르게 보시를 실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평소에도 드러난 것 같다.
율장통합본 출간에 대하여
강독모임이 시작되기 전에는 전재성선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시간이 된다.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예정대로라면 11월에 통합본 율장이 출간되어야 한다. 번역서의 경우 발간인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 발간후원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경우 번역서의 가장 서두에 ‘발간사’를 실어 주는 관행이 있는 것 같다. 모든 준비가 끝났기 때문에 곧 발간되리라고 본다.
율장통합본은 거의 일년 걸린 것 같다. 작년 11월 이맘때쯤 청정도론 출간회가 있었는데 율장통합본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존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에 이어서 ‘부기’가 새로 추가되었다. 통합본은 일종의 개정판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스님들이 율장통합본을 보게 된다면 한국불교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또 재가불자들도 율장을 본다면 출가수행승들이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재가자들이 율장을 합송하는데 참여할 수는 없지만 책으로 나온 것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다. 율장도 경장과 마찬가지로 필독서가 될 것이다.
자따까(jātaka)번역에 착수했는데
율장 다음에는 무엇일까? 전재성선생은 자따까(jātaka)번역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천궁사와 아귀사를 먼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바뀐 것 같다. 언젠가는 번역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은근하게 자따까번역을 바랬다. 초기경전이나 논서를 보면 자따까에서 인용된 구절이 많기 때문이다. 또 각종 인연담을 보면 출처가 자따까인 것이 많다.
자따까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것은 미얀마에서 사는 한국비구스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미얀마 마나빠다이 승원에서 교학과 수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스님에 따르면 미얀마불교를 결속하는 힘이 자따까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PTS본을 근간으로 하는 빠알리-미얀마 주석서를 바탕으로 2년 동안 번역에 매진할 것이라고 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이솝우화나 안데르센동화는 자따까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불교경전이 가장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거쳐서 서유럽에 전파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자따까는 대승불교의 유래가 된다고도 했다. 왜 그런가? 대승불교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수행이 자따까에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십바라밀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후대 대승불교성립에 영향을 준 경전임에 틀림없다.
자따까가 아직까지 한국에서 원문으로 번역된 것은 없다. 다만 일본 남전대장경에 실려 있는 본생담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역을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자따까가 번역된 언어는 많지 않다. 독일에서는 1920년대에 독어판이 번역되었다고 하니 한국보다는 백년이 빠른 것이다.
자따까는 거의 대부분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게송만 보아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법구경도 주석을 보아야 한단어 한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따까를 번역한다는 것은 ‘주석을 번역한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완역한 숫따니빠따, 테라가타, 테리가타, 우다나, 이띠붓따까도 사실상 주석을 번역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앞으로 출간까지 2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뒷담화 하는 것을 보면
11월 두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앙굿따라니까야 ‘참사람이 아닌 사람의 경(Asappurisasutta)’(A4.73)을 독송했다.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행하는 네 가지 불선행과 참사람인 사람이 행하는 네 가지 선행에 대한 것이다.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떤 불선행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단점과 장점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남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남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자신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자신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A4.73)
대부분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를 우리말로 ‘뒷담화’라고 한다. 대화할 때 남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재미 있는 일일 것이다. 사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런데 얘기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 단점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장점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참사람이 아닌 사람(sappurisa)’, 즉 일반사람들은 없는 데서 남말하기 쉽다고 볼 수 있다.
참사람(sappurisa)이라면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다면 참사람도 있을 것이다. 참사람을 빠알리어로 삽뿌리사(sappurisa)라고 한다. 영어로는 ‘a righteous man’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선인(善人)’이라고 말한다.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선남자’나 ‘선여인’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빠알리 사(sa)는 진실의 의미가 있다. 뿌리사(purisa)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에 삽뿌리사는 ‘진실된 사람’을 뜻한다. 전재성선생은 ‘참사람’으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참사람은 단점이나 장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까? 정확하게 참사람이 아닌 사람과 반대이다. 참사람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은 남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남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은 남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남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은 자신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자신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은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하물며 묻지 않았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뜨리고 머뭇거리고 불완전하게 대충 자신의 장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A4.73)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이, 즉 절친이라면 이야기할지 모른다. 절친은 비밀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자신의 단점을 얘기한다면 단점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라고 했다. 그것도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A4.73)라고 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수행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행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청정한 삶에 있어서 허물이 있어서는 안된다. 수행자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법이라고 했다. 수행자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용납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수행을 목표로 했을 때는 단점을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
경에서는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율장의 가르침과는 상충된다. 율장에서는 남의 허물도 말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보름에 한번 있는 포살법회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남의 허물도 지적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단점이나 허물을 지적하는 것은 참사람이 아니라면 오해받기 쉽다. 일반사람이 남의 단점이나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뒷담화’가 될 것이다. 마치 회사직원들이 술좌석에서 사장을 안주삼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참사람들끼리라면 얼마든지 단점이나 허물을 말해 줄 수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확인된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
(Dhp76)
세상에는 남의 단점이나 허물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말한다면 이는 망신주기라고 볼 수 있다. 남의 단점이나 허물을 말하려거든 일대일로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그럴경우 단점이나 허물은 뒷담화가 아니라 충고가 된다. 그런데 충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누구나 자신의 단점이나 허물에 대하여 지적하면 발끈하기 쉽다. 그러나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도 몰랐던 것을 알려 주었을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나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은 나를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발전시켜 주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종종 겪는다. 모함을 받는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국가폭력이다. 불의를 참지못하여 뛰어 들었을 때 가혹한 형벌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칠십년대와 팔십년대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한 민주화유공자들이 대표적이다. 사회정의를 주창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것이다.
국가폭력으로 옥살이했다면 억울한 것이다. 전재성선생도 칠십년대 유신시대때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바 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할 것이다. 오로지 분노로만 일관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 비난을 했을 때 참아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전재성선생은 “잘 참아내기만 하면 엄청난 힘이 됩니다.”라고 했다.
한번 어려움을 겪고 나면 내성이 생긴다. 이후로 왠만한 어려움은 견디어 낸다. 그러나 이를 참아 내지 못하면 곧 무너지고 만다. 누군가 나를 비난했을 때 가급적 참아내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인내해야 한다. 참고 인내할 때 힘이 길러진다. 더 큰 시련이 와도 버티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
누군가 나의 단점이나 허물을 이야기해도 참아 내야 한다. 억울함을 참아내는 것은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인내하고 인욕하는 것에 대하여 ‘힘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아수라와 천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윳따니까야 1권을 보면 욕먹는 아수라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아수라는 욕을 먹으면 먹을수록 흉악하게 생긴 용모가 아름다워지고 빛이 난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일까?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추악하고 왜소한 야차가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보좌에 앉았다. 이를 본 천신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싫어하고 실망하고 분노할수록 야차는 보다 아름다워지고 보기 좋아지고 용모가 단정해졌다.”(S11.21)라고 설명되어 있다.
야차는 아수라를 말한다. 흉악하게 생긴 야차가 신들의 제왕 제석천의 보좌에 앉아 있자 신들이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야차는 남들이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신들의 용모와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천신들은 야차에 대하여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일 것입니다.”(S11.21)라고 결론을 내었다.
초기경전을 보면 야차는 분노의 대명사이다. 야차가 분노하면 용모는 더욱더 흉악하게 된다. 그런데 야차에 대하여 분노하면 정반대로 용모가 준수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제석천은 야차에게 다가가서 합장하며 “벗이여, 난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벗이여, 난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 벗이여, 난 신들의 제왕 제석천입니다.”(S11.2)라며 세 번 말했다.
제석천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야차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그런데 제석천이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부를 수록 야차는 점차 왜소해지지고 용모도 흉악해졌다는 것이다.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에게 분노하면 용모가 준수해지지만 반대로 인내하면 야차는 점점 흉악한 용모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제석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결코 화를 내어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덕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가를 살펴서
나는 자신을 잘 제어할 뿐이네.”(S11.2)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의 보좌에 앉아 있는 야차를 몰아내는데 있어서 욕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참고 인내하고 겸손하게 대했다. 이는 제석천의 일곱 가지 서원에서도 드러난다. 일곱 가지 서원 중에 일곱 번째의 것을 보면 “나는 살아 있는 한 화내지 않으며 만약 나에게 화가 나면 곧바로 그것을 제거하리라.”(S11.13)라고 되어 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을 때
흔히 말하기를 ‘화내면 진다’라고 말한다. 논쟁을 했을 때 흥분하면 지는 것과 같다. 바둑에서도 흥분하면 진다고 한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모욕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자애명상’을 하라고 했다.
자애명상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가르침 그대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에게도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극복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신구의 삼업으로 설명했다.
전재성선생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복합체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언어적으로 “그 사람도 행복하기를!”라며 수 없이 반복하면 언어적 현상이 신체에도 영향을 주고 정신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은
자애명상을 하면 원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모든 힘은 인내했을 때 생겨난다. 그런데 인내하면 할수록 더 큰 힘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은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 대하여 비난을 하고 모욕을 주어도 참고 견디어 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생겨도 참고 견디어 내야 한다. 참고 견디어 내다보면 내성이 생겨서 왠만한 비난이나 모욕은 견디어 낸다. 더 큰 비난과 모욕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래서 힘이 있는 자만이 인내할 수 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4)
가르침을 요약하면
힘이 없는 자들은 참을성이 없다. 조금만 욕해도 조금만 비난해도 참지 못한다. 힘이 없는 자들은 남의 잘못이나 단점, 허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이 없는데서 비겁하게 남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은 남의 단점이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이나 허물을 드러낸다. 반면에 장점은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말로 하면 잘난체 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드러낸다면 이는 자만이 되기 쉽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이 생겨나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 그래서 참사람은 자신의 장점은 감추고 단점을 드러내 보인다. 반대로 참사람이 아닌 일반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이나 허물은 감추고 장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의 경(Asappurisasutta)’(A4.73)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리석은자의 태도
“남의 단점에 대해 밝힌다.
남의 장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단점을 밝히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을 과시한다.”
2) 현명한자의 태도
“남의 단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남의 장점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단점을 밝힌다.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단점이나 허물을 이야기하면 화가 난다.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인내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인내할 힘이 없는 것과 같다. 힘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참고 견디어 낸다.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힘 있는 사람이고 참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019-11-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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