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의 정확한 의미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9. 9. 28. 12:30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의 정확한 의미는?

 

 

니까야강독모임이 열리는 날이다. 지난 7월 이후 두 달만이다. 어쩌면 2학기 개강의 날이라고 볼 수 있다. 매달 두 번 열리다가 두 달 공백이 생기니 매우 오래 된 것 같다. 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하여 삼송역으로 향했다.

 

나는 왜 이 먼길을

 

안양에서 고양까지는 매우 먼거리이다. 자동차로도 거의 50키로 가까운 아득한 거리이다. 서울에 있으면 나을 것이다.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꼬박 도보, 전철, 지하철, 환승, 버스를 이용하여 2시간 잡아야 한다. 특히 구파발에서 버스로 환승할 때 긴장된다. 잘못 타면 엉뚱한 길로 빠진다. 3년째이지만 버스로 환승할 때가 가장 어렵다. 나는 왜 이 먼길을 마다하지 는 것일까?

 




강독모임이 생겨난 이래 거의 개근하고 있다. 그리고 빠짐없이 후기를 남기고 있다. 이런 것도 어쩌면 집착일 것이다. 그러나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배움이다. 삼장을 꿰뚫고 있는 번역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놓칠 수 없다. 부지런히 노트해 둔다. 그리고 글로 남겨서 인터넷에 공유한다.

 

다음으로 도반들과의 만남이다. 3년째 다니다 보니 이제 눈에 익었다. 이런 말이 있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러한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됩니다.(S3.18)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라며 부정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이와 같이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청정한 삶의 전부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S3.18)라고 말했다.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와도 같다는 것이다.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지난 3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찬 사람들이고 동시에 후원자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을 보고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빠진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 되었을 때 멀어지기 쉽다.

 

습관을 들여야 한다. 모임에 자주 나오는 것도 습관이다. 한번 습관들면 빠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습관은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꾸려거든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래서 수행처에서는 수행이라는 말 보다는 수습(修習)’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수행이라는 용어와도 관련이 있다.

 

니까아강독모임에서 전재성선생은 수행이라는 말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바와(bhava)’를 번역한 것이라고 했다. 바와는 영어로 ‘becoming’의 뜻으로 되어감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한자어로 닦는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무언가로 되어 간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습관과 관련하여 최근 최진석 선생의 유튜브를 보았다. 최진석 선생은 서강대 교수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유튜브에서 새말새몸짓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함량키우기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함량은 어떻게 키우는 것일까? 최진석 선생에 따르면 먼저 포부를 가지라고 했다. 그 다음은 습관들이는 것이고, 또 그 다음은 지식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함량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떠 오르는 말은 함량미달이다. 한번 타고난 몸이나 마음을 바꾸기 힘들다는 것이다. 최진석 선생은 함량미달에서 함량채우기로 바꾸는데 있어서 습관을 들었다. 글쓰기를 예로 들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매일 원고지 10매를 쓴다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습관은 운동이 될 수도 있고 수행이 될 수도 있다.

 

만시간의 법칙이 있다. 어떤 일이든지 하루 서너시간씩 집중해서 십년을 하면 누구나 프로페셔널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먼저 참석하는 습관부터 들여야 한다. 참석하다 보면 계속 참석하게 되고 도반들과의 유대관계도 강화되고 무엇보다 배움이 증장된다는 사실이다. 함량키우기에 있어서 습관들이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사섭법의 원류는 니까야에

 

9월 첫 번째 강독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독송했다. 하나는 무엇을 어떻게 섭수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가진 섭수의 기초에 대한 경’(A4.32)이고, 또 하나는 삼매의 수행에는 일반적인 선정 이외에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에 대한 제목으로 삼매의 수행에 대한 경’(A4.41)이다. ‘섭수의 기초에 대한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섭수의 기초가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보시하는 것,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 동등한 배려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섭수의 기초가 있다.”(A4.32)

 

 

한자어 섭수(攝受)라는 말은 관대한 마음으로 남을 받아들임을 뜻한다. 네 가지 섭수가 있는데 사섭법이라 하여 한자어로 보시, 애어, 이행, 동사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섭법은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과 함께 주요한 실천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도 하다. 그런데 원류가 니까야에 실려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의 정확한 의미는?

 

사섭법은 오로지 앙굿따라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다. 두 번 나온다. 네 번째 모음에 있는 섭수의 기초에 대한 경’(A4.32)이고, 또 하나는 여덟 번째 모음에 있는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경에서 공통적으로 동사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해 놓았다.

 

사섭법에서 동사(同事)는 어떤 것일까? 인터넷백과사전에서 동사에 대한 설명을 보면 보살의 동체대비심에 근거를 둔 것으로 중생들에게 접근하여 함께 일하고 생활함으로써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일이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또 다른 사전에서는 동사(同事) 협력한다는 말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마음과 몸이 하나로 되어 같이 한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대체로 동사에 대하여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사마낫따(samānattā)’이다. 전재성 선생은 동등한 배려로 번역했다. 이런 번역은 기존 유통되고 있는 뜻풀이와는 다른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함께 함[同事]’로 번역했다.

 

전재성 선생도 처음에는 사마낫따(samānattā)’에 대하여함께 지내는 것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개정판을 보면 동등한 배려로 바뀌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각주에서 동사를 함께 함, 함께 지냄이라고 보통 번역하고 역자도 4권에서는 함께 지냄으로 번역했다가 앙굿따라니까야 8:24의 문맥에 따라서 동등한 배려로 번역한다.”(생활속의 명상수행, 325번 각주)라고 밝혀 놓았다.

 

동사가 왜 동등한 배려일까? 이에 대하여 빠알리어 사마낫따(samānattā)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마낫따에서 (sa)’함께를 의미하고, ‘마나(māna)’마음을 뜻하고 앗따(attā)’는 추상명사의 어미라고 했다. 따라서 함께 하는 마음이 된다.

 

사마낫따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영어로 ‘identity; equality’라고 설명되어 있다. 동질 또는 동등이라는 뜻이다. 빅쿠보디는 영역에서 impartiality’라고 번역했다. impartiality’는 인터넷영어사전에 따르면 1.공평무사, 2.불편부당, 3.공명정대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사를 뜻하는 사마낫따(samānattā)고락을 함께 함의 의미라기 보다는 동등한 배려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리더의 조건에 대하여

 

동사가 동등한 배려의 뜻이라는 것은 앙굿따라니까야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을 보면 동사에 대하여 저는 이 사람은 동등한 배려로 섭수해야 한다.’라고 알면, 그 사람을 동등한 배려로 섭수합니다.”(A8.24)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선생은 문맥에 따라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다고 각주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찾아 보니 세존이시여, 제가 이 사람은 함께 함[同事]으로써 섭수해야 한다.’라고 알게 되면 저는 함께 함으로써 그를 섭수합니다.”(A8.24)라고 번역했다. 한자어 동사(同事)를 그대로 풀어 쓴 것처럼 보인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영역했을까? 찾아 보니 When I know: ‘This one is to be sustained by impartiality’, I sustain him by impartiality.”라고 영역되어 있다. 우리말로 제가 알고 있기로 이 사람은 동등하게 떠받쳐주어야 한다.’라고 알게 되면 동등하게 떠받쳐줍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핫타까 알라바까와 섭수의 경’(A8.24)은 리더의 덕목에 대한 가르침이다. 경에서는 핫타까 알라바까가 재가신도 오백명을 섭수한다고 했다. 오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따르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여덟 가지 덕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종의 리더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그 여덟 가지는 ‘1)믿음이 있는 것, 2)계행을 지키는 것, 3)부끄러움을 아는 것, 4)창피함을 아는 것, 5)많이 배운 것, 6)관대한 것, 7)지혜를 갖춘 것, 8)겸손한 것을 말한다.

 

이런 정도의 덕목을 가졌다면 누구나 따를 것이다. 그리고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실천덕목으로서 사섭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보시, 애어, 이행, 동사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섭법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동사가 그렇다. 그래서 경에서는 동사를 뜻하는 사마낫따(samānattā)에 대하여 동등한 배려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음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

 

불교에서 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교조주의라는 말이 있다. 교주가 한 말을 맹신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 쓰여 있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해당된다. 반면 수정주의가 있다.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시대와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교조주의와 수정주의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쁠까?

 

어떤 이는 교조주의가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곧이곧대로 믿었을 때 근본주의자 또는 원리주의자 소리를 듣기 쉽다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신교 교리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원리주의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와는 다르다.

 

불교에도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교조주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경전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믿는 다면 근본주의자, 원리주의자, 교조주의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주의, 원리주의, 교조주의는 유일신교와는 다른 것이다. 부초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평화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평화와 행복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 어디에도 배타적 교리와 독단적 구원관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폭력적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륜왕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아소까대왕은 바위비문에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천명했다. 무력에 의한 세계정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담마에 의한 정복, 즉 담마위자야(Dhammavijaya)를 선언한 것이다.

 

본래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교조주의는 위험한 것이다. 특히 유일신교에서 그렇다. 그러나 불교에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교조주의를 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평화와 행복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정주의는 어떨까? 

 

불교에서 수정주의라면 가르침을 시대와 상황에 맞게 달리 해석한 것도 해당될 것이다. 만일 매 시대마다 매 상황마다 달리 해석한다면 본래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불교에서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교조주의를 표방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그에 맞게 정신문명이 따라가가지 않는다. 비록 수천년 전에 이루어진 정신문명일지라도 스마트폰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승되어 온 경전이 케케묵은 것이거나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놀라운 것으로 가득찬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원음대로 번역해야 한다. 동사섭에 대한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불자들은 사섭법에서 동사(同事)고락을 함께 함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한자어풀이 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동사를 뜻하는 빠알리어 사마낫따(samānattā)는 영어로 ‘identity; equality’의 뜻이다. 빅쿠보디는 영역에서 impartiality’라고 했다. 그 어디에도 고락을 함께 함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동등한 배려라고 번역했다.

 

요즘은 누구나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는 니까야번역본을 접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빠알리 원문이 소개 됨에 따라 번역용어도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번 강독모임에서 동사를 뜻하는 사마낫따(samānattā)동등한 배려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부처님 원음은 가급적 원문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

 

 

2019-09-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