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담마다사 이병욱 2019. 5. 15. 10:12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평범한 일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사람들은 평온한 삶을 살아 간다. 이런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이런 평온과 행복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호수에 돌맹이를 던진 것처럼 파란이 일어난다. 평탄한 길이 거칠고 굽은 길로 바뀌는 가 하면 단절이 생길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파란곡절(波瀾曲折)은 늘상 있는 것이다.

 




거울을 보았을 때

 

후회의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 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지금과 그때와는 조건이 다른 것이다. 조건이 다름에도 그렇게 했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자이다.

 

그때와 지금이 조건이 같을 수 없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럼에도 그때와 지금을 동일시해서 후회한다면 악작(惡作: kukkuca)이 된다. 악작은 불선업에 해당된다.

 

후회는 불선법이다. 행위에 대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괴로운 느낌이라면 불선업을 지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모습을 거울로 보면 어떨까? 성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후회는 성냄을 뿌리로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러나 애만 탈 뿐이다.

 

애타는 것은 후회뿐만 아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역시 애타기는 마찬가지이다. 후회와 근심의 나날로 보낸다면 점차 시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갈대처럼.”(S1.10)라고 했다.

 

낫에 잘린 갈대는 금방 시들어 버린다. 후회와 근심은 사람을 시들게 만든다. 시든 모습은 어떤 것일까?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숙적인 것은 거울의 표면에 비추어진 얼굴처럼 수동적이고, 착하고 건전한 것은 얼굴처럼 능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Vism.14.100)라고 했다.

 

결과로서 나타난 과보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거울을 보았을 때 표정이 밝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kusala)를 했을 때 표정은 밝고 생기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akusala)를 했을 때 표정은 어둡고 죽어 있는 모습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표정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잘 보면 보인다.

 

난다의 어머니처럼

 

사람들은 일이 터졌을 때 당황해 한다. 그리고 잘못 되었을 때 낙담한다. 그래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허둥지둥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면목이 드러난다. 그러나 생멸의 이치를 아는 자라면 평상심을 유지한다. 난다의 어머니처럼.

 

재가불교단체에서 회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선생의 누이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생은 전화를 받고나서도 평상심을 유지했다. 회의에 끝까지 참석하여 의견도 제시하는 등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에 함께 참석한 어느 선생이 깨달은 사람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난다의 어머니도 그랬다.

 

난다의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원인인지 몰라도 왕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난다의 어머니는 이런 소식을 듣고서도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난다의 어머니는 아나함의 경지에 이른 성자였다. 탐욕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난다의 어머니는 부처님의 재가 여제자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웃따라 난다마따(uttarā nandamātā) 에 대하여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jhāyīna agga)’이라 한다.

 

바람 부는 대로 사는 사람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늘 평상심을 유지한다면 그는 성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했을 것이다. 평상시 생활할 때 그 마음이 항상 유지 된다면 그는 도인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파란곡절이 일어났을 때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와 근심, 슬픔, 괴로움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평상심시도는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11번째 단계의 지혜에 해당되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khārupekkhāñāa: 行舍智)’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지혜를 말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성자가 되는데, 그때가 되면 항상 평상심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흔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여덟 가지로 요약된다.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 이와 같은 여덟 가지는 속세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고 하여 세속팔풍(世俗八風)이라 한다.

 

이익이 나면 좋아하고, 불이익이 발생하면 싫어 한다. 칭찬하면 우쭐하고 비난하면 화를 낸다. 명예는 좋은 것이고 불명예는 치욕이라 생각한다.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더욱더 지속되기를 바라고, 불행한 자는 이 괴로움이 하루 빨리 끝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살면 바람 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바람 부는 대로 살면 평온한 삶을 살아도 언제 이 행복이 깨질지 모른다. 일시적 평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멸의 원리를 아는 자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익, 칭찬, 명예, 행복만을 추구하지도 않고 불이익, 비난, 불명예, 불행에도 개의치 않는다. 왜 그럴까? 세속팔풍은 모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득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어떠한 이유로 이득이 생겨나면 생겨날 때 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이득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의 번뇌가 생겨나고 이득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극복하면 곤혹과 고뇌의 번뇌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A8.7)

 

 



이익이 생겨 났을 때 좋아할 필요 없다. 이익을 즐긴 다면 손해가 났을 때 크게 낙담할 것이다. 그래서 이익이 생기면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극복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라는 번뇌가 생겨날 것이라 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 모두 극복 대상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생노병사 등 팔고를 제기는 것에 그쳤다면 염세주의자로 내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팔정도이다. 여덟 가지를 닦으면 확실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세속팔풍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이득이 생겨나면, 그는 그는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한다. (A8.6)와 같은 가르침이다. 이하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에도 단어만 바꾸어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나에게 불이익이 발생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억울한 것일 수도 있다. 전화 한통화 받고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마음속으로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 파문을 어떻게든 잠재워야 한다.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 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이러한 불이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있다. 이럴 때 발끈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난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낙담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불행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알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나를 칭찬하면 우쭐할 것이 아니라이러한 칭찬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나에게 명예가 생겨났다면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명예가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지금 행복한 상태라면 이 행복은 천년만년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행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결국 나의 문제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안다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 상태가 되려면 먼저 생멸을 보아야 한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득, 칭찬, 명예, 행복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 마음이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불이익, 비난, 불명예,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곤혹과 고뇌의 번뇌가 생겨날 것이라 했다. 낫에 잘린 갈대처럼 시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 살다보면 이익이 있는 곳에 불이익이 있기 마련이고, 칭찬이 있으면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은 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에 마음을 둔다면 후회와 근심과 걱정으로 불선업만 짓게 된다.

 

이또한 지나가리라바이블 구절이다. 그러나 생멸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적 가르침에 가깝다.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생멸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생멸의 지혜를 넘어서 범부가 올라 갈 수 있는 최고의 지혜가 상카루뻭카냐나이다. 이 지혜에 대하여 찬먜사야도는 마음이 대상에 매우 깊게 집중되어지기 때문에 꿰뚫어보는 지혜는 모든 것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일어났다가 사라짐으로써 고요하고 집중되고 평온하게 봅니다.”(위빳사나수행 28, 430p)라고 말했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려면 생멸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이다. 그 순간 마음일 뿐이다. 이전 마음과 현재의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집착한다면 번뇌만 일어날 뿐이다. 그결과 평정이 깨진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혼한 남자가 전처를 보는 것처럼 현상을 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중립의 마음이 되어 라든가 나의 것을 붙잡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라는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무상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임에도 붙잡고 있는 것은 자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에 대하여 그는 일체의 형성에서 벗어나고자 성찰적 관찰로 형성을 파악하여 라든가 나의 것이라고 붙잡아야 할 만한 것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환희를 버리고 일체의 형성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중립적이 된다.”(Vism.21.62)라고 했다.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늘 그날이 그날 같다. 오늘이 어제같고, 오늘은 내일 같고, 내일이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물론 이런 말은 문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변함 없는 일상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똑 같은 일상은 아니다. 미세한 변화는 있다. 그래서 살만한 것이다. 만일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싫증 날 것이다.

 

변함 없는 일상은 어쩌면 행복일지 모른다. 큰 사고 없이 늘 이런 일상이 지속된다면 이것이 행복이다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큰 변화가 올 때 깨진다. 여덟 가지 바람이 불 때이다. 여기서 일반범부와 가르침을 배운 자가 갈린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왠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이 행복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 역시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중립의 마음을 갖게 된다.

 

평정의 마음, 중립의 마음은 마치 이혼한 남자가 전처를 바라 보는 것과 같다. 현상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도 평상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 도인이고 깨달은 자일 것이다.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없이 티끌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8-269)

 

 

2019-05-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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