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붙이기로 명상을 생활화 하기
약속은 지켜야 한다. 하다못해 점심식사 약속이라도 지켜야 한다. 참여불교재가연대 허태곤 상임대표에게 한 말이 있다. 김도이선생의 위빠사나 모임에 한번 가겠다고 했다. 재작년 가을 3개월 가량 김도이선생으로부터 위빠사나 지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공부나 수행이 그렇듯이 끊임 없는 반복이다. 반복하여 숙달 해야만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기회만 되는 참석하는 것이 좋다.
동국대 대각전
2019년 6월 13일 목요일 오후 늦게 장충동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우리함께빌딩 2층에 있는 문화살롱 기룬이지만, 그 이전에 동국대 대각전에 들러야 했다. 6월 17일(월)과 18일(화) 양일간 미얀마 담마마마까 국제선원장 ‘우 에인다까’ 사야도 초청 서울특별법회가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대각전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답사 형식으로 둘러 보았다.
동국대 정각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각전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대각전이라는 큰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각전은 ‘이해랑예술극장’ 안에 있다. 1층은 공연장이고 2층이 대각전인 것이다. 그래서 이해랑예술극장을 찾아야 한다. 지하철 3호선 6번출구로 나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바로 앞에 있다.
어쩌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답사도중에 김도이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2번출구 편의점 앞으로 오라고 했다. 갔더니 음료수를 사 주었다.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태극당에서 빵을 하나 샀다. 편의점 앞에 있는 옥외 테이블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나누었다.
심하게 냄새가 났다. 똥냄새처럼 구린내가 난 것이다. 바로 옆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이다. 바로 옆에는 노숙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도 없이 마신 것이다. 취기가 올랐는지 멍해 보였다. 냄새가 나고 불결해 보였다.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있었다.
그 사람은 대낮부터 왜 막걸리를 마시면서 자포자기의 삶을 사는 것일까?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경전의 한구절이 떠 올랐다. 상윳따니까야에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6)이 있는데 ‘불행의 경’(S15.11)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1)라고 말씀했다.
어쩌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윤회하면서 한번쯤, 아니 수 도 없이 저와 같은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공평하다. 그럼에도 측은지심으로 불쌍히 여긴다면 ‘우월적 자만’이 개입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 대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바라는 연민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하여 단지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근심하고 걱정하게 될지 모른다.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면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며 “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이것이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로서 부처님 가르침이다.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행복의 경’(S12.12)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2.12)라고 말씀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공평하다.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 대하여 ‘열등적 자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 나도 한번쯤, 아니 수도 없이 저와 같은 사람이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우월적 자만이나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게 열등적 자만을 내려 놓을 것을 말씀 했다. 이 세상에 이런 가르침은 없다.
복부움직임과 관련하여
위빠사나 모임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됐다. 한시간 법문에, 한시간 좌선, 그리고 나머지 한시간은 경행과 인터뷰하는 것으로 진행 되었다. 좌선시간이 끝난 다음에 다음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있을 우 에인다까 사야도 특별법회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참석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인터뷰시간에 복부움직임과 관련하여 질문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런데 이날 일어남과 꺼짐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가만 있다보면 저절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한시간동안 좌선 했는데, 저녁시간이라 흥분이 가라 앉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기계장치의 소음도 가끔 들려 오는 등 잡음도 있어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대상에 집중하지 못하니 망상만 생겨났다. 끊임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렇게 망상이 많을 줄 몰랐다. 평소에도 수 없이 알게 모르게 생멸할 것이다.
김도이선생은 숨을 한번 크게 들어 마시라고 했다. 복부의 움직임을 잘 잡을 수 없을 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들어 마시고 내쉬고를 몇 번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라고 했다. 어쩌면 인위적이라고 볼 수 있으나 복부관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부터는 ‘불러움’ ‘꺼짐’ 하며 명칭을 붙이고 관찰하면 되는 것이다.
고요함도 관찰대상이다!
선원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이 잘 관찰 되지 않을 때에는 엉덩이에 닿는 느낌으로 가라고 한다. 물론 통증과 같은 강한 대상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야 한다. 그래도 복부의 움직임이 관찰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도이선생에 따르면 집중이 깊어지면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힘들다고 했다.그럴경우 고요함을 관찰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고요함도 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당히 높은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심념처에 대하여 ‘마음 보는 수행’이라고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빳딧짜스님은 “수행을 얼마만큼 하여 집중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한 마음을 보고 있는데 그 마음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면 사라져 없는 그 자리에 관찰하는 마음을 놓고 가만히 있어 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어떤 생각이 하나 일어납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어떤 구멍에서 머리가 쏙 나왔다가 도로 쏙 들어가는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토대를 느끼는 것입니다.”(11일간의 특별한 수업, 389-390p)라고 책에서 말했다.
명칭붙이기
위빠사나 모임은 저녁 7시에 시작하여 10시에 끝났다.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 김도이선생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미얀마 마하시선원에 다닌지 10년 가량 되는데 아직도 명칭붙이기 하는 것에 대하여 물어 보니 지금도 명칭 붙인다고 했다. 명칭붙이면 번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초심자가 명칭을 붙이지 않고 좌선이나 경행에 임한다면 치고 들어 오는 번뇌 때문에 사띠가 유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부의 움직임이나 발을 이동할 때 명칭을 붙인다면 사띠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번뇌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를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하는 않는 한 가급적 행위를 천천히 하면서 명칭 붙여 보는 것이다. 보는 것에 대해서는 ‘봄, 봄’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단지 눈앞에 대상을 볼 뿐이다. 사람으로만 보일뿐 ‘여자다’ ‘남자다’ ‘예쁘다’라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상에서도 사띠가 가능한 것이다.
김도이선생은 명칭을 붙여 지도한다. 경행 할때도 명칭 붙이기를 한다. 처음에는 왼발, 오른발 하며 몸풀기 식으로 한다. 다음에는 ‘듦, 놓음’라며 2단계를 하며 몇 바퀴 돈다. 그 다음에는 ‘듦, 나감, 놓음’ 3단계로 하고, 이어서 ‘듦, 나감, 내림, 놓음’ 4단계로 진행한다. 경행 5단계는 ‘듦, 밂, 내림, 닿음, 누름’이고, 경행 6단계는 ‘듦, 올림, 밂, 내림, 닿음, 누름’이다. 각 단계별로 의도를 알아차린다면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명상의 생활화
김도이선생은 집에서도 명상을 한다고 했다. 새벽 2시 정도에 일어나는데 일어나자 앉아서 두세 시간 좌선한다고 했다. 명상이 생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명상을 하고 나면 개운하다고 했다. 몸이 찌뿌둥하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명칭 붙여 관찰하면 번뇌망상이 발붙이지 못함을 말한다.
명상은 선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앉으나 서나 일상에서도 가능한 것이 명상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띠하는 것이다. 자기가 제3자가 되어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다. 결국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대상을 잘 관찰하여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마음을 아는 것이다.
정신-육체적으로 생멸을 관찰했을 때 이 세상에는, 아니 이 우주에는 오로지 정신적-물질적 과정만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오로지 정신-육체적 과정만 있을 뿐 사람, 존재, 나, 너와 같은 개념은 발 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했다.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을 극복하는 것이 수행임을 알 수 있다.
2019-06-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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