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좀 그만 쓰라고 하는데
글 좀 그만 쓰라고 한다. 글 쓰는 횟수를 줄이라고도 한다. 좀더 고급스런 글을 쓰라고 한다. 종종 듣는 말이다. 어떤 이는 글이 너무 길다고 합니다. 요약해서 써 달라고 한다. 글이 짧으면 또 짧다고 할 것이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 법구경 게송 하나가 생각난다.
“아뚤라여, 이것은 오래된 것이니
지금 단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법구경 Dhp227)
여기서 아뚤라는 재가신도를 말한다. 재가신도 아뚤라가 오백명의 친구와 함께 레바따 장로의 설법을 듣고자 승원을 찾았다. 레바따 장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아뚤라는 장로가 아무것도 설해주지 않는다며 이번에는 사리뿟따 장로를 찾았다. 사리뿟따 장로는 매우 상세하게 설해 주었다. 그것도 가장 어렵다는 아비담마를 길게 설해 주었다. 그러자 아뚤라는 ‘난해한 아비담마를 유독 나에게만 유독 길게 설해 주었다’라고 생각하자 또 화가 났다. 이번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아난다 장로를 찾아 갔다. 아난다 장로는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설해주었다. 아뚤라는 너무 짧게 설해준 것에 또 화가 났다. 부처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아뚤라여,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침묵하는 자도 많이 말하는 자도 간략하게 설하는 자도 비난해왔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일방적으로 칭찬해서는 안된다. 왕들을 두고도 어떤 자는 비난하고 어떤 자는 칭찬한다. 위대한 땅, 태양이나 달, 사부대중 앞에서 앉아 말하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두고도 어떤 자는 비난하고 어떤 자는 칭찬한다. 어리석은 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현자나 지혜로운 자가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자는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아야 한다.”(DhpA.III.325-329)
이 세상에 비난 받지 않는 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비난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만 현명한 자의 비난은 받아 들여야 한다. 칭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이 길어서 못 읽겠다고 한다. 글이 너무 길어서 패스한다고 말한다. 제발 글 좀 줄이라고 말한다. 에스엔에스(SNS)시대에 너무 급한 것 같다. 남이 다섯 시간 걸려서 작성한 글을 오분도 안되어서 읽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을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종종 글을 잘 읽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맙다. 현명한 자에게 듣는 칭찬은 가치 있는 것이다.
긴글을 쓰고 있다. 지면에 제한이 없는 인터넷에서 긴글쓰기는 자연스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고 하면 한정될 수밖에 없다. 폰트사이즈 12로 하여 A4 한장을 채우기 힘들다.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무한대로 늘어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주옥 같은 가르침과 이를 해석한 주석을 근거로 했을 때 글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에스엔에스 시대의 글쓰기를 보면 거의 대부분 짧다. 아무 설명 없이 사진만 올려 놓는 경우도 많다. 사진에 대한 배경설명을 곁들이면 친절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페이스북에서는 굵은 글씨로 짧게 강조하는 문구를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것 같다. 단체 카톡방에서는 아예 침묵모드로 들어 가는 사람도 있다.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비난 받을 것이다.
글이 길어도 비난 받고 글이 짧아도 비난 받는다. 침묵해도 비난받는다. 왕도 예외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 먹는 사람이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던가! 부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처님에 대하여 칭찬하는 자도 있지만 비난하는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난 하는 자는 주로 어리석은 자이다. 아뚤라와 같은 사람이다. 말이 없으면 말이 없다고 비난하고, 말이 길면 말이 길다고 비난하고, 말이 짧으면 말이 짧다고 못마땅해 한다. 사람마다 특징이 있음에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잣대로 재어서 마음에 들면 칭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한다. 마치 게으른 자가 환경 탓 하는 것과 같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지 않는 게으른 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게으름에 대하여 주변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게으른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이르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부르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D31)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한다. 죽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나이들어 노화로 인하여 자연사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암과 같은 질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고,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자에게는 갖가지 핑계가 있다. 지각하는 자가 ‘교통이 막혀서 늦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날씨탓이나 환경탓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나 게으른 자는 모든 것을 자신 위주로 생각한다. 판단 기준은 자신인 것이다.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자신의 쾌불쾌에 따라 잣대를 들이댄다. 그래서 글이 길면 길다고 하고, 글이 짧다면 짧다고 할 것이다. 또 글이 난해하면 어렵다고 말하고, 글이 없으면 침묵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장단에 맞출 필요가 없다. 다만 현자들이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잘 새겨 들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불만에 대해서는 무시해도 된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그대 자신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것이 열반에 이른 것이니
격정은 그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Dhp134)
깨어진 놋쇠그릇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언저리가 잘리고 깨어져 땅위에 놓인 놋쇠그릇이 있다. 손이나 발이나 막대기로 차도 동요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을 것이다. 마치 깨진 종과 같다. 깨진 종이 땅바닥에 있을 때 막대기로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의 어떤 비난에도 일체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비난 받게 되어 있다. 모범생처럼 올바로 살면 잘난체한다고 비난받는다. 불량학생처럼 살면 나쁘다고 비난받는다. 유명인이어도 비난받고 무명인이어도 비난받는다. 비난하는 자에게 똑같이 대하면 똑같이 어리석은 자, 환경탓만 하는 게으른 자가 되어 버린다. 이럴 때는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글을 그만 쓰라고 한다. 글을 짧게 쓰라고 한다. 좀더 고급 글을 쓰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고 하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19-06-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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