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방법을 모르면 고생한다,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2

담마다사 이병욱 2019. 7. 9. 20:42

 

방법을 모르면 고생한다, 직지사 위빠사나 집중수행2

 

 

1일차 2019 7 2일 오후, 오리엔테이션

 

수행자들이 만덕전에 모였다. 모두 상의와 하의 수행복으로 갈아 입었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오티(오리엔테이션)가 있기 때문이다. 첫날 모인 인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삼십명 정도 예상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예상을 빗나간다. 지난 6 17일과 18일 동국대 대각전 특별법회때도 그랬다. 법회 첫날 육칠십명가량 예상했으나 두배가 넘는 150명 가량 왔다. 이날 오티에 참석한 수행자들 숫자는 육칠명에 달했다.

 





 

오티는 오후 3시부터 시작하여 5시 반까지 2시간 반 동안 쉼 없이 계속 되었다. 5 6일 동안 집중수행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좌선하는 방법 행선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혜송스님이 교재를 중심으로 알려 주었다.

 

늘 들어도 질리지 않는

 

담마마마까 법요집이 있다. 법요집과 수행지침서가 함께 있는 책이다. 70여페이지 되는데 선원에서 수행자로 살면서 알아야 할 것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수행방법에 대하여 요점이 잘 정리 되어 있다. 이 책 하나만 잘 숙지 해도 위빠사나 수행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주 열어 보고 가능하면 외울 정도가 되면 더 좋을 것 같다.

 




혜송스님이 오티한 것을 기록해 두었다. 항상 노트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늘 받아 적을 준비는 되어 있다. 사실 이번 오티는 세 번째 듣는 것이다. 지난 1월 미얀마에 있을 때 두 번 들었다. 그런데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늘 새롭기 때문이다. 아직 해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매번 들어도 새롭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런데 잘 듣기만 해도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방법을 모르면 헤매기 쉽다. 방법을 모르고 앉아 있으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종칠 때까지 앉아 있어 보지만 고행이 되기 쉽다. 행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혜송스님은 지도 받아서 방법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수행의 반입니다.”라고 했다.

 

방법을 알고 수행에 임하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지도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끌어 줄 때 진도가 빨리 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가능한 기억해 두어야 한다. 기억해 둔 것을 사유하고 숙지 해야 한다. 모든 학문이 외는 것부터 시작하듯이, 수행방법을 숙지해 놓으면 헤매지 않는다. 그래서 혜송스님은 방법을 모르면 고생합니다.”라고 말했다.

 

혜송스님이 오티한 것을 받아 적었다. 2시간 반 동안 말한 것을 받아 적다 보니 노트에 기록한 것이 28페이가 되었다. 이전에 다 들었던 것이지만 반복해서 적는 것이다.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이 있듯이, 수행법에 대한 교육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좌선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좌선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앉는 방법부터 알려 주었다. 평좌(平坐)가 가장 좋다고 한다. 어디를 주 관찰대상으로 해야 할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라고 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관찰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코끝의 닿는 느낌을 관찰하는 아나빠나사띠와는 다른 것이다. 복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법을 보기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혜송스님은 복부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호흡이라는 말을 했다. 원칙적으로 호흡이라는 말은 아나빠나사띠를 의미하는 것이긴 하지만, 호흡에 따른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호흡이라고 말한다. 반면 아나빠나사띠에 대해서는 들숨날숨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복부호흡관찰에 대하여 마음을 배에 집중하여 관찰하되, 숨을 들이쉴 때 배가 점점 불러짐을 일어남이라고 합니다. 이때 일어남의 시작에서 일어남의 끝까지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마음을 밀착하여 꿰뚫어 보듯이 일어나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사라짐의 시작에서 끝까지 마음이 어디에도 달아나지 않도록 오롯이 밀착하여 사라지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법요집 11)라고 말한다.

 

좌선에서 주관찰대상은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호흡에 따라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데 이를 따라 가며 관찰하는 것이다. 이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면밀하게 관찰하라고 말한다. 만일 움직임을 놓치게 된다면 망상이 치고 들어 올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계속 끈질기게 관찰했을 때 점점 집중이 된다. 마치 몸이 사라진듯하고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되었을 때 성성(惺惺)하다고 말한다.

 

복부관찰 할 때 복부의 겉모양은 무시된다. 복부의 움직임을 따라 관찰하다 보면 자기만이 아는 느낌을 관찰하게 된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실제성품이라고 한다. 지수화풍 사대 중에 풍대를 관찰하는 것이다.

 




복부관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관찰대상이 바뀐다. 좌선 중에 다리저림 현상이 나타나면 통증관찰을 해야 한다. 통증이 복부의 움직임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한다고 말한다. 사념처 중에서 수념처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관찰하는 것일까?

 

강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실제하는 성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실제성품은 사대나 느낌, 마음부수 같은 것이다. 그래서 네 가지 방법으로 관찰한다. 이를 사념처라고 한다. 즉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실제하는 성품이 생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S56.11)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성품도 관찰하다 보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복부의 움직임도 그렇고 통증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움직임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결과로서 아는 것이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원인이 아니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을 어찌 해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객관적으로 관찰 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사라진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성품대로 모두 사라져 갈 뿐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무아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무상의 지혜, 고의 지혜, 무아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법요집 14)라고 말한다.

 




행선의 이익에 대하여

 

혜송스님은 행선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실제로 시범을 보여 주면서 알려 주었다. 행선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1단계 행선은 왼발’ ‘오른발하며 걷는 것을 말한다. 이때 다리의 겉모양은 무시하고 발바닥의 느낌만을 관찰해야 한다. 2단계 행선은 ’ ‘놓음에 대한 것이다.  들었을 때 가벼운 느낌을 관찰하고 놓았을 때 무거운 느낌을 관찰한다. 3단계 행선은 ’ ‘나감’ ‘놓음이다. 나갈 때는 지수화풍 사대 중에 풍대라는 바람의 성품과 만나게 된다. 4단계 행선은 ’ ‘나감’ ‘놓음’ ‘누름이다. 누를 때는 몸무게가 실리는데 이때 바닥에 닿는 느낌을 관찰한다. 부드럽거나 딱딱한 지대라는 땅의 성품과 만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6단계 행선이 있다. 6단계 행선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 ‘올림’ ‘나감’ ‘내림’ ‘닿음’ ‘누름순으로 한다. 각 단계마다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6단계에서는 의도를 관찰하기도 한다. 발을 들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이라고 알아차린다. 이런 식으로 각 단계별로 의도를 알아차린다.

 

행선은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 1단계부터 2단계, 3단계, 4단계로 차츰 높여 가다가 최종적으로 6단계를 한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명칭을 붙이면 효과적이다.

 

행선을 하면 이익이 많다. 혜송스님에 따르면 행선에 집중하고 난 다음에 좌선을 하면 좌선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좌선한 다음에 행선해도 성공적이다. 이와 같은 행선에서 얻는 이익은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체력이 건강하고 정신력이 강해지고, 여러 가지 병이 낫고, 소화가 잘 되는 것이다. 또한 행선에서 얻는 집중력은 오래 가고, 행선을 하면 강한 집중력과 에너지로 인하여 다음 수행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마마마까에서는 경행이라 하지 않고 행선(行禪)이라고 말한다. 움직이는 명상이라는 뜻이다. 행선이 단지 몸풀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주요한 수행방법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전통에서는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좌선을 하면 좌선한 시간만큼 행선하라는 것이다. 보통 좌선 한시간에 행선 한시간 한다. 이렇게 번갈아 가며 한시간씩 하는 것이다.

 

행선을 하면 좌선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의도이다. 좌선에서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의도를 살필 수가 없다. 가끔 자세를 바꾸면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행선의 경우 매번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의도를 알아차리기 쉽다. 서 있을 때도 서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방향 전환 할 때도 방향 전환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다. 이렇게 움직일 때마다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 의도가 원인이 되고 움직임은 결과가 된다. 또 움직임을 관찰하면 움직임은 원인이 되고 알아차리는 마음은 결과가 된다.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두 가지 지혜가 일어날 수 있다. 움직임과 이를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오로지 정신-물질의 작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든가 사람, 중생 같은 언어로 된 개념이 발 붙이지 못한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것이 단지 정신-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위빠사나 지혜이다. 이를 정신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하여 위빠사나 1단계 지혜라고 한다.

 

물질과 정신작용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다. 움직임이 원인이고 이를 관찰하는 마음이 결과이다. 움직이려는 의도가 원인이고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과이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를 위빠사나 2단계 지혜라고 한다. 그런데 행선을 하면 위빠사나 1단계 지혜와 2단계 지혜를 용이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을 모르면 고생한다

 

혜송스님은 방법을 모르면 고생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2시간 반 동안 좌선과 행선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쓸 수 없다. 법요집을 늘 가까이에 두고 틈나면 열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킨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배우는 것처럼 따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기 가장 좋은 나이가 7세부터 25세까지라고 한다. 순발력이 좋기 때문이다. 알아차리는 순발력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순발력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서 수행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순발력은 떨어지지만 시키는 대로 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순발력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이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sotavante pamuñcantu saddha)”(M26)라고 말씀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려거든 예전의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야 한다. 이는 선가에서 말하는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은 이 문에 들어 오거든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라는 뜻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거든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한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이나 견해를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가장 지도하기 쉬운 사람이 젊은 사람이고,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이라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런 저항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 배우는 것과 같다.

 

후기를 쓰면서 노트를 읽어 보았다. 기억해 두고 싶은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새겨 들어야 한다.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오리엔테이션은 언제 들어도 새롭다.

 

 

2019-07-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