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 사회참여론에 대하여, 정평불 7월법회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가기를 바란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라.”(S4.5)라고 전도할 것을 명령했다. 삼계윤회하는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겨 한 말이다.
7월 정평법회가 열렸는데
정평불 7월법회가 우리함께빌딩 6층 법당에서 열렸다. 이번달 법회는 이희선 공동대표가 ‘재가불자의 사회참여론-유마경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정평불에서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불교사회교리 중의 하나인 ‘불자의 정의론’에 대한 것이다.
요즘은 유튜브시대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서 모든 정보는 유튜브에 공개되고 또한 공유된다. 정평법회의 법문 역시 유튜브에 공개된다. 약 1시간 분량의 법문을 동영상 촬영했다. 요즘은 스마트폰 성능이 좋아서 스마트폰으로도 고화질 촬영이 가능하다. 다이소 등에서 판매하는 3천원짜리 삼각대 하나만 있으면 된다.
이희선 선생은 배포된 유인물을 중심으로 법문했다. 유마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대승보살사상의 핵심이 되는 공과 불이사상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유마경의 핵심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동체대비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유마경 제3권 제5문장품에 실려 있는 “중생이 병들면 저도 따라서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저 역시 따라 나았습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중생이 아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중생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다
아픈 것은 괴로운 것이다. 중생이 아픈 것은 중생이 괴롭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괴로울까? 갖가지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몸이 아파 괴로운 사람도 있고, 돈이 없어서 괴로운 사람이 있고, 빚이 많아서 괴로운 사람이 있고, 소송을 당해서 괴로운 사람이 있고, 감옥에 있어서 괴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괴로움 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괴로움을 철저히 알아서 괴로움의 뿌리를 뽑아 낸 사람에게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괴로움이 없다면 그는 항상 행복한 상태일 것이다. 성인이 그렇다. 사성제의 진리를 통찰하여 성인이 된 사람에게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자비심이 넘쳐 날 것이다.
해외여행 가면 호사를 누린다. 사성급 호텔에서 머물고 황제식과 같은 음식을 즐긴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광경을 즐긴다.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 해외여행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이다. 가족들도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하는 것이다. 깨달은 성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했다. 중생의 고통을 모른 채, 못 본 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깨달은 자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연민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깨달음의 길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중생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다. 삼계윤회를 하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보살의 최상의 길은 사악도라는데
보살(菩薩)이라는 말이 있다. 보리살타의 준말로서 보디삿뜨봐(Bodhisattva)을 음역한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은 중생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지 않은 자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로 말하자면 11단계인 ‘상카루뻭카냐나 (Saṅkhārupekkhāñāṇa: 行舍智)’단계에 머무른 자를 말한다.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를 말한다.
상카루뻭카냐나 단계를 넘어서면 수다원 도와 과를 이루어 성인의 흐름에 들어간다. 그런데 한번 이 단계를 넘어서면 ‘원웨이티켓(One way ticket)’을 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일곱생 이내면 완전한 열반에 들어 삼계윤회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로서 서원을 세운 자는 상카루뻭카냐나 단계에서 멈춘다. 그래야 삼계를 윤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반을 미루고 중생구제를 위하여 원을 세우기 때문에 보살을 원(願生)으로 산다고 한다.
중생은 업생으로 살고 보살은 원생으로 산다고 한다. 원생으로 사는 보살은 중생이 고통 받으면 어디든 달려 간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마경 제8보리분품에 따르면 “만약 모든 보살이 악도로 간다면 불법에서 최상의 길에 도달합니다.”라고 했다.
니중연화(尼中蓮花)
보살이 악도로 간다는 것은 쇼킹한 말이다. 사악도는 피해야 할 곳이다. 그럼에도 사악도로 가서 모두 구제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서원은 입보리행론에서 산띠데바가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라고 발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사띠데바의 발원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희선 선생은 그 근거로서 ‘진흙탕속에서 온갖 연꽃이 생겨날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른바 니중연화(泥中蓮花)를 말한다. 상윳따니까야에 니중연화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부처님은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성장했다. 그런 세상은 온갖 오염원으로 거득한 세상이다. 그러나 오염되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혼탁한 오염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오염되지 않은 것은 불탑, 부진, 불치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중연화(尼中蓮花), 진흙속의 연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탐, 진, 치의 세상에서 중생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여기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불탐, 부진, 불치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정신일 것이다.
사악도는 현실에도 있다
사악도에는 부처님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보살은 사악도에 가기를 마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살이 서원을 세워서 사악도에 떨어졌을 때 정말 중생을 남김 없이 구원할 수 있을까?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지옥에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천상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너무 괴로우면 사띠가 흩어지기 쉽고 너무 즐거우면 사띠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줄거움과 괴로움이 적절히 섞여 있는 인간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기 가장 적합한 세계라고 한다.
유마경에서는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하여 사악도로 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고 했다.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 문제가 쉽게 풀린다. 현실에서도 사악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지옥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한 현실이 축생이나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악도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불이사상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유마경은 재가불자의 사회참여 근거의 경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는 가장 핵심사상이라 볼 수 있는 불이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분별하면 둘이 되지만 분별하지 않으면 모두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번뇌즉보리라 하여 번뇌가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또 생사가 열반이라 하여 생사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모든 것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사상에 따르면 사회참여 근거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도피수단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희선 선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한 것이라면 현 사회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선과 악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고 평화와 전쟁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업에 관여할 수 없지만
현실을 떠나 살 수 없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사는 자도 사람들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온갖 인연으로 그물망처럼 연결된 세상에서 나홀로만 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고 여유 있으면 옆도 보고 뒤도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마냥 불쌍한 마음만 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하여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면 된다. 이것이 공평하다. 이런 마음은 행복하고 부자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남의 업에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된다. 부처님도 남의 업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정답은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반조하는 것이다. 한량 없는 윤회를 하면서 분명히 그와 같은 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업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잘 못되어서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있다. 구조개혁을 통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모임이나 단체가 필요하다.
정평불의 현실참여
현실은 모순과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이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업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적 모순과 위선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현실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정평불에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회참여하고 있다. 종단의 적폐청산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참여하고 연대하고 있다. 그런 것 중에 최근 김용희 해고 노동자에 대한 것이다. 김용희 노동자는 현재 단식 50일에 43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삼성그룹 노동조합 설립 방해 공작에 따른 것이다.
정평불에서는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달 열리는 미대사관둘레돌기와 같은 평화통일 집회를 말한다. 이 밖에도 이슈가 생겨날 때마다 참여하고 연대하고 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자신의 수행이 되어 있지 않은 자가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면 어떻게 될까? 잘 되면 다행이지만 잘 되지 않으면 분노가 내부로 향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스스로 진흙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이 참으로 진흙에 빠진 다른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이 가능하다.”(M8)라고 말씀했다. 이어서 부처님은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지 않고 수련시키지 않고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쭌다여,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M8)라고 말씀했다.
재가불자의 현실참여는 상구보리하화중생에 따른다. 먼저 자신의 수행이 이루어지고 중생구제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수행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미루면 어느 세월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상구보리하화중생은 동시적으로 본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A4.95) ‘자리이타행’에 따른 것이다. 정평불이 추구하는 재가불자의 사회참여론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토론마당과 교류마당
법회가 끝나고 눈부처바라보기 시간을 가졌다. 둥그렇게 앉아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3분 스피치 하는 식이다. 그리고 토론의 마당을 가졌다. 이희선 선생이 법문에서 못다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법회가 끝나고 비공식적 모임을 가졌다. 장충동 부근 식당으로 이동하요 교류의 마당을 가진 것이다. 마침 정평불 최연 공동대표의 생일날이어서 축하해 주었다.
2019-07-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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