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불교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눈부처학교 김응철선생 강연을 듣고
“종교는 안바뀝니다. 특히 제도종교는 바뀌지 않습니다. 망할 때까지 안바뀝니다.” 이 말은 눈부처학교에서 들은 말이다. 제도권 종교의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바뀌게 할 수 있을까?
정평불 제7회 눈부처학교
제7회 눈부처학교 3주차 강좌가 불교환경연대 교육장에서 열렸다. 중앙승가대 김응철선생이 ‘대만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눈부처학교는 정평불에서 주관하고 있다. 매년 한차례 또는 한차례 이상 열리는데 눈부처학교는 정평불창립이래 이번 학기로 일곱번째이다. 이번 학기 주제는 ‘참여불교’에 대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참여가 문제가 된다. 많이 모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홍보해도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놀고 즐기는 것은 좋아해도 공부하자고 하면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 학기 눈부처강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1주차 강연에는 21명, 2주차 강연에는 22명, 그리고 이번 3주차 강연에는 강사를 포함하여 모두 20명이 참가 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강연을 듣고 크게 공감하여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백명, 천명 앉아 있는 것 보다 낫다.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은 매우 열성적이었다. 파워포인트로 강연되는 내용을 필기하는가 하면 스마트폰에 담기도 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두 시간 강연을 한번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강연하는 김응철선생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유튜브로도 볼 수 있다
눈부처학교의 모든 강연은 촬영된다. 현재 인터넷매체 ‘운판’을 운영하는 김경호 선생이 카메라를 이용하여 전과정을 촬영하고 있다. 촬영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튜브에 영상자료가 올려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보게 된다. 시청자가 많아질수록 현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제7회 눈부처학교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이다. 이번 강연도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참고로 다음과 같다.
1) [눈부처학교] 3강 대만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1,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2) [눈부처학교] 3강 대만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2,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3) [눈부처학교] 3강 대만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3,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4) [눈부처학교] 3강 대만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4, 지식정보플랫폼 운판
대만은 성공했고 한국은 실패했다
강연을 들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왜 대만은 됐는데 우리는 되지 않았을까?”에 대한 것이다. 대만은 전체인구의 93%가 불교인이라고 한다. 물론 대만의 전통종교와 습합된 통계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불교국가나 공통적 현상이다. 한국도 일본도 그렇다. 대체로 대만인구의 약 50%는 불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서적 불자까지 포함한다면 93% 일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인 비율과 크게 차이가 난다.
한국의 불교인은 2015년 종교인구총조사에 따르면 761만명으로 전체인구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967만명으로 200만명이 더 많은데 전체인구의 18%에 달한다. 여기에다 천주교 389만명을 합하면 전체 기독교인구는 1356만명이 되는데 전체인구의 27%에 달한다. 기독교가 다수 종교이고 불교는 소수종교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응철선생은 “한국불교가 소수종교인 것을 이제는 받아 들여야합니다.”라고 말했다. 무사안일로 일관하고 있는 종단에 대한 따끔한 충고로 보인다.
대만은 성공했고 한국은 실패했다. 이 말은 왜색불교 청산에 대한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똑같이 일제강점기 과정이 있었다. 한국은 36년이었지만 대만은 무려 50년을 지배 받았다. 1945년 똑같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불교만큼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대만은 왜색불교를 말끔히 청산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체국민의 대다수가 불교인이 되는 불국토가 되었지만 이와 정반대로 한국은 왜색불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주도권을 내어주는 소수종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대만불교에 행운이 따랐는데
김응철선생 강연을 들어 보면 대만불교는 행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식육대처’에 대한 것이다. 식육대처는 왜색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인데 대만불교에서는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만불교는 한국과 달리 역사가 짧아 보잘것 없다. 대만에 불교가 들어 온 것은 17세기 때라고 한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역사가 짧은 대만불교는 불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일본지배를 50년 동안 받다 보니 식육하고 대처하는 일본불교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만불교에 어떤 행운이 따랐을까?
중국대륙은 1949년 공산화 되었다. 이후 중국대륙에서 수 많은 고승들이 들어 왔다. 그 중의 하나가 ‘백성스님’이다. 백성스님이 보기에 대만불교는 불교가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식육대처하는 왜색불교였다. 그래서 1953년‘칠조규정 (七條規定)'’을 만들었다. 칠조규정은 무엇일까? 인터넷검색을 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반드시 집과 속세를 떠나 승려의 위의를 갖추지 않으면 비구계를 수여하지 않는다.
2) 출가자는 속인 복장을 해서는 안된다.
3)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승보를 스승으로 모시는 자라야만 수계를 받을 수 있다.
4) 거사계를 받은 자는 신도나 무리를 거느려서는 안된다
5) 계를 타인에게 위탁하는 것을 금한다. 위탁한 계는 무효로 한다.
6) 과거 다른 종파의 계를 수지한 자는 반드시 삿됨을 개정하고 바른 도리로 돌아올 것을 선서한다.
7) 수계를 받은 날로부터 음주 흡연 육식을 절대 금한다.
칠조규정에서 가장 핵심은 일곱 번째 ‘음주 흡연 육식을 절대 금한다’라는 내용이다. 이중에서도 육식을 금한다는 것이 눈에 띈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예로부터 육식을 금하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처를 금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빠진 것이라고 본다.
승단추방죄 중에서 첫번째가 음행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불교인이리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만불교에서는 취처육식 하는 것에 대하여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일곱 가지 항목에 대하여 법률로 정하여 단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 일반식당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이 고기를 먹으면 스님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대륙에서 건너온 고승 백성스님은 취처육식을 금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칠조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총통이었던 장개석에게 법으로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기독교인이었던 장개석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몰랐고 더구나 고승이 넣어 달라고 하니까 법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취처육식을 금하는 문화가 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대만불교에 행운이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법제화되고 제도화된 불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만불교가 크게 발전한 것인지 모른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고?
기득권층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불교계에서도 들을 수 있다. 어느 원로의원 스님은 의식개혁을 강조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다. 원로의원 스님의 말에 일부는 동의하지만 전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의 체제를 합리화 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의식개혁이 먼저인가 제도개혁이 먼저인가? 대만불교의 역사를 보면 제도개혁이 먼저인 것 같다.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는 의식개혁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대만에서는 먼저 칠조규정을 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율장에 이미 실려 있는 내용이고 구족계를 받을 때 필수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이를 법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만불교에서는 취처육식을 금하고 있다. 처를 두고 고기를 먹는 일본식불교를 몰아 낸 것이다. 제도개혁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왜색불교가 퇴출된 것이다. 반면에 한국불교에서는 제도화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불교정화교시가 있긴 있었지만 법으로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오히려 분란만 일으켰다. 아직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조태분규가 이를 말한다.
김응철선생 강연을 듣다보니 대만불교는 행운의 불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처육식을 금하는 법을 만들어 제도개혁을 한 것이 첫번째 행운으로 본다. 두 번째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것이다. 불교전통이 없고 불교유산이 없는 것이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런 두 가지는 한국불교와 대조적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왜색불교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무리가 많았다. 일본식 가사를 불태우고 일본사찰을 파괴하기도 했다. 해방전에 500개에 달하는 일본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은 것은 군산에 있는 동국사 하나뿐이라고 한다. 일본식 가사를 불태우고 일본절을 파괴했다고 해서 왜색불교가 사라졌을까? 아직끼지 식육대처문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제도화에 실패했음을 말한다. 의식개혁이 먼저라고 하지만 제도개혁이 뒷받침 되지 않는 의식개혁은 사상누각이다.
시대의 흐름에 참여한 신흥사대종문
대만불교와 한국불교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거의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대만불교는 제도개혁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공의 길을 걸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새땅에서 새집을 지은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60년 중반 이후부터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흥 4대종문을 말한다. 전통불교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1966년 증엄스님의 자제정사와 1967년 성운스님의 불광산사의 창립을 시작으로 이후 87년에 중대선사가 창립되었고 97년에는 법고산사가 창립되었다.
대만불교는 전통불교와 현대불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치 각각 역할분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개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각 특징이 있는 것이다. 자제정사는 봉사를 위주로 포교했고 불광산사에서는 문화포교에 힘을 쏟았다.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을 탄 것이다. 봉사와 문화포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이번에는 수행과 교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수행과 관련하여 중대선사가 그 역할을 맡았고, 교학과 관련하여 법고산사가 역할을 맡았다. 시대의 흐름에 참여했기 때문에 참여불교라고도 볼 수 있다.
바꾸려하기 보다는 스스로 내역할을 찾아야
작년과 재작년 치열하게 적폐청산운동을 했다. 광화문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적폐청산을 천명했는데 불교계도 비켜 가지 못했다. 불교계에도 쌓이고 쌓인 적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뜻있는 불자들과 스님들은 2년동안 촛불법회를 하고, 삼보일배를 하고, 피켓팅을 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러나 바뀐 것이 없다.
종교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기득권층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망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망할 때까지 두고 보아야 할까? 이럴 때 한국의 뜻있는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김응철선생은 “스스로 내역할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불교단체나 뜻있는 불자들은 종단이나 스님들에 대하여 “바꾸어주세요.”라든가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가 좋은 기득권층에서 들어 줄리 만무하다. 종교는 보수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새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르다. 대만에서 소위 신흥4대 종문이 출현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응철선생은 새로운 씨앗을 뿌리자고 말했다. 기성종단을 바꾸려고 하거나 바꾸어달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가 하는 것이다. 뜻있는 불교인들이 힘을 모아서 시대가 요청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대만에서는 시대가 봉사를 요청했을 때 자제정사가 생겨났고, 문화를 요청했을 때 불광산사가 생겨났다. 요즘 대중들은 무엇을 요청할까?
시대마다 요청하는 사조가 있다. 시대의 흐름을 잘 타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힐링’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다. 힐링 바로 이전에는 행복을 말했다. 이제는 행복다음에 힐링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것도 명상을 겸한 것이다. 요즘 김응철선생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김응철선생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문화치유명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것을 스님이나 종단에 대하여 “해주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새로운 씨앗을 뿌려 놓으면 스님들이나 종단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종단을 바꾸려고 하는 것 보다는 더 쉬운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런 것이 요즘 시대가 요청하는 참여불교인지 모른다.
2019-07-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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