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는, 한국의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
눈부처학교 5주차 강연이 8월 9일 불교환경연대 교육실에서 열렸다. 김형남 선생이 ‘한국의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에 대하여 강연했다. 김형남선생은 지관 총무원장시절에 조계종 법률자문 변호사로 일한 바 있다.
김형남선생은 두툼한 자료를 준비했다. 무려 47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다. 자료를 30부 가량 복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토너가 바닥이 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강연을 진행하는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다.
분노로 가득 찬 자가
김형남선생은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교적폐청산과정에서 발생된 분노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점을 지적해 왔으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단이 바뀌지 않았다고 한들, 내가 바뀌었거나 올바른 불교 모습에 대한 목마름이 늘어난 이상, 내가 교단에 대한 폭력적인 생각을 하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참여를 하다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피켓팅, 삼보일배, 촛불법회, 기자회견 등을 해 보지만 요지부동일 때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가 내부로 향한다는 것이다. 희생양을 찾게 되고 분열의 요인이 된다. 실제로 작년과 재작년 적폐청산운동과정에서 목격된 것이다.
불교개혁운동이 실패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개인의 수행이 덜 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본다. 자신의 수행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노의 마음으로 개혁운동을 했을 때 잘 되면 다행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분노가 내부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가 될 수도 있고 조직이나 단체가 될 수도 있다.
분노는 폭력을 수반한다. 분노가 동력이 되어 운동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부처님은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A7.64)라고 말씀 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다. 분노에 가득 찬 자가 사회개혁 운동을 했을 때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불교개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탐, 진, 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람이 개혁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김형남선생은 참여불교 실천론에서 사무량심과 사섭법을 강조했다.
네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는데
사무량심과 사섭법은 자애를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자애는 분노와 정반대되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어느 정도 수행이 된 사람이 개혁운동을 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은둔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수행과 사회참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말한다.
네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지도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 수행도 하지 않고 참여도 하지 않는 타입을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안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과도 같은 존재라고 했다. 네 가지 타입 중에 최하위에 해당된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실천한다. 개인적 수행 없이 참여만 하는 사람이 해당될 것이다. 개인적 수행을 하지 않으니 탐, 진, 치로 살아간다. 사회의 모순에 분노하여 참여해 보지만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가 내부로 향하게 된다. 개인적 수행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네 가지 타입 중에서 3위에 해당된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 이익만을 실천한다. 개인적 수행은 열심히 하지만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다. 남에게 폐끼치 않고 사는 소극적 공리주의자들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심산유곡에 은둔하며 개인적 수행에 몰두하는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김형남선생은 불교와 명상을 동일시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명상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했다. 개인적 수행에만 몰두할 뿐 참여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소승중의 소승’이라는 것이다. 상구보리는 하지만 하화중생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타입이다. 이처럼 오로지 개인적 수행에만 몰두하는 타입은 네 가지 타입중에서 2위에 해당된다.
가장 이상적인 타입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고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타입이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동시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부처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든 네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다.”(A4.95)라고 말씀 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움직이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방관하는 경향이 있다.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한다면 이기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타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자리이타행이다.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는 삶이다. 부처님은 자리이타행에 대하여 최상의 삶이라고 했고 가장 훌륭한 삶이라고 했고 가장 탁월한 삶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삶 자체가 참여불교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김형남선생은 로까미뜨라 법사의 말을 인용하여 “부처님이 보살로 계실 때 중생을 돕는 삶을 사신 것이나, 깨달으신 후에도 45년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삶을 사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가장 강력한 사회참여
부처님 삶 자체가 참여불교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참여불교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탁발하는 것도 참여불교라고 볼 수 있다. 탁발행위가 밥을 빌어 먹는 것도 되지만 동시에 재가자들에게 공덕 짓는 기회도 주기 때문이다.
탁발을 하게 되면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하게 된다. 탁발로 인하여 서로 공덕을 쌓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강력한 사회참여라고 볼 수 있다. 심산유곡에서 은둔하며 개인적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소외받은 사람도 찾아 간다는 것이다. 테라가타에서 본 마하깟싸빠존자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게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처소에서 내려와서 나는,
시내로 탁발하러 들어왔다.
음식을 먹고 있는 나병환자를 보고
공손하게 그의 곁에 섰다.”(Thag.1060)
“문드러진 손으로 그는,
나에게 그의 음식의 일부를 건넸다.
음식의 일부를 발우에 던질 때에
그의 손가락도 그 곳에 떨어졌다.”(Thag.1061)
“담장의 아래에서 나는,
그 음식을 한주먹 먹었는데,
먹으면서도 먹고나서도
나에게 혐오가 일어나지 않았다.” (Thag.1062)
탁발은 차제걸이(次第乞已)라 하여 차례로 일곱집을 돌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집이 없다. 집이 없는 나병환자는 차제걸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마하깟싸빠존자는 나병환자에게도 공덕지을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병환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가야 한다.
집이 없는 나병환자도 음식을 얻어 먹고 살았다. 성자가 나병환자에 선 것은 얻어 먹는 자 앞에 얻어 먹기 위해서 서 있는 것과 같다. 마하깟싸빠존자는 아라한이었다. 아라한이라는 복전에게 복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그 과보는 어느 정도일까? 숫따니빠따 보배경에서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님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의 제자로서 공양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27)라고 했다. 사쌍팔배의 성자에게 보시하면 그 과보는 엄청나게 큼을 말한다.
나병환자는 성자에게 음식의 일부를 건네 주었다. 그런데 음식에 나병환자의 썩어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나병한자가 준 음식을 받아 먹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혐오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하깟싸빠존자의 게송을 보면 사회참여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가장 천대 받는나병환자를 찾아 간 것이다. 가장 소외받는 자에게 일부로 찾아가 보시공덕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회참여라고 볼 수 있다.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는
김형남선생은 ‘한국의 참여불교의 교리와 실천’라는 주제로 장문의 자료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자비정신은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른다. 나홀로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세상과 함께 살아야 함을 말한다.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의 행위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의 행위로 인하여 우주의 그물망이 다시 짜여 질 수 있다. 누군가 분노하면 그 분노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분노에 가득 찬 자가 사회참여하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회참여하려거든 분노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애의 마음을 길러야 할 것이다.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으로서 사무량심과 사섭법이 요청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는 자리이타행이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일 것이다.
2019-08-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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