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단계가 있듯이 수행에도
2019년 8월 18일 오전, 정평불 1박2일 하계수련회 네 번째 이야기 수행법문
늘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기록으로 나타난다.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에 대하여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다. 모임, 순례, 강연 같은 것이다. 특히 강연은 쓸 것이 많다. 강사가 심혈을 기울여 하는 말을 그대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강연을 들으면 편안하게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노트를 해야 한다.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번 정평불 고반재 1박2일 수련회에서 김진태 선생의 수행법문이 그랬다.
“저는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함양에 있는 고반재의 아침이 밝았다. 수련회 이틀째 일정이다. 아침밥을 지어먹고 다음 일정을 기다렸다. 오전 8시부터 9시 반까지 김진태선생의 수행법문과 수행방법에 대한 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진태 선생은 작년 8월 서산 ‘참사람의 향기 도량’에서 수련회 했을 때도 법사로 모셨다. 올해도 법사로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다. 김진태 선생에게 알렸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김선생은 대구에서 마산을 거쳐서 합류했다.
김진태 선생은 실참수행을 알려 주기 전에 수행법문을 했다. 먼저 가부좌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좌수행을 잘 하려면 앉는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평좌(平坐)를 권했다. 다리가 짧은 한국인 체형에는 평좌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평좌를 하면 3-4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김진태 선생은 미얀마를 16번 다녀 왔다고 했다. 해마다 겨울 건기철이 되면 미얀마로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수행센터에만 있으면 매몰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김진태 선생은 “저는 스승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지도하는 스승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교학교정과 수행원리를 사유하다 보니 남보다 4-5배 노력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하면
감진태 선생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했다. 한마디로 사성제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고와 고소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고와 고의 소멸은 연기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는 결과의 구조로 되어 있다. 괴로움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 다만 관찰할 뿐이다. 또 도성제가 원인이고 멸성제가 결과의 구조로 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라는 이지(二枝)연기에 대한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팔만대장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하라면 사성제라고 했다. 사성제는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이기도 하고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마지막 제자 수밧다에게 팔정도를 설했다. 그런데 팔정도는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에 해당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도 사성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와 고소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삼법인의 지혜
고와 고소멸은 쾌락주의나 고행주의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김진태 선생은 ‘반야’를 말했다. 그것도 수혜(修慧)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문, 사, 수 삼혜 중에서 닦아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듣거나 사유해서 지혜가 생겨 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수행의 결과로서 생겨났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이 남달랐던 것은 사띠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지혜(般若)가 생겨났다. 이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위빠사나에 대하여 한 찰나 자기의 오온, 즉 내면을 보는 수행이라고 했다. 또 까시나와 같은 사마타 수행은 내면의 표상을 만드는 수행이라고 했다. 의 대상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온을 관찰했다.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여 실재하는 성품을 본 것이다. 그런데 실재성품(Paramattha)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실재성품은 항상 있는 자성이나 실체가 아니다.
김진태선생은 실재성품에 대하여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지혜로 보자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삼법인의 지혜라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의 지혜, 고의 지혜, 무아의 지혜를 말한다.
삼법인의 지혜가 법구경에 실려있다. 제행무상에 대해서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이다. 이렇게 일체에 대하여 괴로움으로 본다면 고의 지혜가 생겨나고, 일체에 대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면 무아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gotrabhuñāṇa)
고의 소멸을 위해서는 삼법인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삼법인의 지혜는 듣거나 사유해서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수행을 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만 고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세 가지 해탈을 들었다. 그것은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에 대한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믿음, 집중력, 지혜의 성향에 따라 삼법인중에 하나를 작의하여 삼해탈 중에 하나의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상, 고, 무아 이 세 가지 지혜 중에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범부로서는 최고의 지혜라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11단계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行舍智)’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상카루뻭카냐나에 대하여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디빵까라부처님(燃燈佛) 당시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 윤회를 끝낼 수 있었으나 멈춘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범부로서는 최고의 단계인 상카루뻭카냐나단계에서 멈춘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고소멸을 목표로 한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수 있다. 이처럼 상카루뻭카냐나단계에서 성자의 흐름의 단계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라고 했다. 여기서 ‘혈통전환의 앎’을 ‘고뜨라부냐나(gotrabhuñāṇa)’라고 한다. 혈통전환이라는 것은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한번 혈통이 바뀌면 다시는 범부로 돌아갈 수 없다. 최대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서 고의 소멸이 실현되는 것이다.
반야심경 조견(照見)에 대하여
고와 고의 소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반야심경에도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항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에서 ‘조견(照見)’이라는 말이라고 했다.
김진태선생에 따르면 한국의 불자들이 조견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고 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따른 것이다. 원전에 따르면 조견에서 끝난다고 했다. 조견오온개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계종 표준반야심경에 따르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照見五蘊皆空)”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찾아 보았다. 조견과 관련하여 찾아 보니 정말 조견에서 멈추어 있다. 원전을 보면 “gambhiram prajna-paramita-caryam caramano vy-avalokayati sma.”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심 반야바라밀다시 행 행시 조견(深 般若波羅蜜多時 行 行時 照見)”의 뜻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반야바라밀다의 행을 하시면서 깊이 살펴보셨나니”가 된다. 이어지는 문구는 “panca-skandhastams-ca sva-bhava- sunyan-pasyati sma.”가 되는데, 이는 “오온피자성공현(五蘊彼自性空現)”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다섯 가지가 있어서 그들의 고유성질이 공함을 보시었다.”가 된다.
조계종 표준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이라 하여 조견과 오온개공을 붙여서 읽는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원전에서는 분명히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의미도 다르다. 이에 대하여 김진태 선생은 동아시아불교에서 조견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조견은 산스크리트어 ‘위야로까야띠(vy-avalokayati)’라고 했다. 여기서 위야(vy-a)는 ‘잘 가려서’라는 뜻이고, 아와(ava)는 ‘떨어져서’라는 뜻으로 객관적이라는 의미이고, 록(lok)은 본다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관찰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관찰하는가? 이는 로까(loka)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로까는 세상 또는 세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오온을 말한다. 그래서 조견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한다는 의미가 된다.
김진태 선생은 조견에 대하여 “자기오온을 수행주제로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오온을 잘 가려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사띠빳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말한다. 사띠를 기반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신, 수, 심, 법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실재성품에 대하여 대하여 자기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단무지 수행
오온을 관찰하면 실재하는 성품을 볼 수 있다. 실재성품은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탐욕이라면 거머쥐는 성품이 있고, 성냄이라면 밀쳐 내는 성품이 있다. 그런데 이런 성품은 공통적으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중에서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하여 ‘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반야심경에서는 “오온피자성공현(五蘊彼自性空現)”이라고 한 것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실재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실재성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띠(sati)를 말한다. 사띠하는 방법으로 신, 수, 심, 법 네 가지 관찰이 있는데,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오온 중에 상온은 법념처에 속한다고 했다.
실재성품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좌선과 행선이다. 김진태 선생은 좌선에 대하여 ‘앉아서 하는 수행’이라고 했고, 행선에 대해서는 ‘걸으면서 하는 수행’이라고 했다. 굳이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좌수행(座修行)과 보수행(步修行)이라 할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좌수행에 대하여 시범을 보여 주었다. 평좌하는 방법이다. 항문으로 앉지 말라고 했다. 항문과 사타구니 중간에 있는 회음부로 앉으라고 했다. 그래야 백회와 일직선이 되어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허리가 펴진 상태로 몇 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단무지’ 수행이라는 말도 했다. 단무지는 ‘단지 무심하게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사마타수행을 말한다.
보수행(步修行) 할 때는
김진태 선생은 보수행도 시범 보였다. 두 손은 차수 한 상태에서 눈은 전방 1미터 60내지 80센티를 보라고 했다. 좌수행후에 곧바로 보수행한다면 다리를 푸는 의미에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보수행 할 때는 마음이 항상 발바닥에 가 있으라고 했다. 발을 들을 때는 복숭아뼈 높이로 하고 수평으로 이동하여 수평으로 놓으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여서 ‘듦, 나감, 놓음’하면 좋다고 했다.
수행은 행주좌와 중에 하는 것이다. 보수행을 하다가 서면 주수행(住修行)이 된다. 어떤 이는 주수행하면서 한시간 동안 서 있는다고 한다. 와수행(臥修行)은 잠 잘 때 잠들기 전까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늘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수행이다.
보수행하다 멈추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자루를 덮어 쓰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발에서 머리로, 그리고 머리에서 발로 세 번 스캔하라고 했다.
돌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돌려는 의도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돌고자 함, 돎, 놓음’이렇게 삼단계로 하라고 했다. 차수한 손을 바꾸고자 할 때도 의도를 보라고 했다.
방향전환하여 눈을 뜰 때는 ‘보임’하라고 했다. 이렇게 수동태로 명칭 붙이는 것에 대하여 에고가 덜 작동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히야의 경에 따르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Ud.6)라고 되어 있는데 수동태로 되어 있다. 만일 ‘내가 본다’라고 하면 ‘봄’이 된다. 능동태가 되면 에고가 강화 되기 때문에 수동태로 하여 ‘보임’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 갈 때는 의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함, 듦, 나감, 놓음’이 되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있는가?
수행에 대한 이야기는 늘 들어도 새롭다. 그것은 아직까지 숙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수행과 관련하여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했다. 업력으로 살아가는 중생에게는 자유의지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 같지만 자기 마음대로 콘트롤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수행을 통해서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했다.
수행은 절부터 시작하여 절로 끝난다
수행은 크게 두 가지이다. 좌수행과 보수행이다. 그런데 김진태 선생에 따르면 좌수행이든 보수행이든 시작하기 전에 절부터 하라고 했다. 그리고 끝난 다음에도 절을 하라고 했다. 수행은 절부터 시작하여 절로 끝난다는 것이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를 말한다.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김진태 선생은 시범을 보였다. 먼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이때 두 발은 포개지 않는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야 한다. 두 손은 합장하여 서서히 이마까지 올려서 붙인다. 앞으로 숙일 때는 두 손을 떼고 그대로 기울이며 내려간다. 이때 가벼운지 무거운지 느낌을 관찰한다. 손바닥과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도 느낌을 관찰한다. 대체로 올리면 가볍고 내리면 무거운 느낌이다. 이는 중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절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스승은 절하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수행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우 꾼달라 사야도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스승은 수행자가 절하는 것을 보면 알아차림이 있는지 아닌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승은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지속적인지 아닌지를 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강한지 아닌지를 안다.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알아차리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뻐한다.”(119쪽)라고 쓰여 있다.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김진태 선생 법문을 들으면서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 조견에 대한 것이다. 조견은 사띠빳타나 위빠사나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온에 대하여 심, 수, 심, 법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단지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혜에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열반을 추구해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무상, 고, 무아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해탈의 문으로 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열어 보았다.
청정도론에서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열반으로 대상으로 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오염원을 끊어 버리고 열반에 뛰어 드는 것이다.”(Vism.21.18)라고 했는데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순간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때 일체의 인상과 생성의 대상이 장애로써 나타날 때 수순단계의 앎이 있는 자에게는 수습의 뒤에 인상을 여의고, 생성을 여의고, 형성을 떠난, 소멸인 열반을 대상으로 삼아 범부의 혈통-범부의 호칭-범부의 지평을 뛰어넘어, 성자의 혈통-성자의 호칭-성자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열반을 대상으로 삼는 최초의 전향-최초의 사려-최초의 전념을 하는, 길에 대한 무간조건-등무간조건-수습조건-친의조건-부존조건-이거조건의 여섯 가지 유형으로 조건을 성취하면서 정점에 도달하여 통찰의 정상이 되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혈통전환의 앎이 생겨난다.”(Vism.22.5)
이와 같이 혈통의 전환이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다. 범부에서 성자로 삶을 사는 것이다. 보살로 살고자 한다면 범부의 최고 지혜라는 상카루뻭카냐나단계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의 길로 가라고 했다. 성자의 길로 가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성자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해탈의 문이 있다. 인상을 여읜 해탈(無相解脫), 바램을 여읜 해탈(無願解脫), 있음을 여읜 해탈(空解脫)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상해탈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는 확신이 강해져서 믿음의 능력이 생기는데,”(Vism.21.75)라고 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원해탈에 대해서는 “괴로운 것이라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는 안온이 강해져서 삼매의 능력을 얻게 되는데,”(Vism.21.75)라 하여 삼매를 강조하고 있다. 공해탈에 대해서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는 영지가 강해져서 지혜의 능력을 얻게 되는데,”(Vism.21.75)라며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수행에도 단계가 있다
김진태 선생의 수행법문이 모두 끝났다. 수행에 대한 법문은 언제 들어도 새롭다. 그것은 아직까지 그 경지까지 가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수행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없던 것이 생겨나듯이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수행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마침내 길(道)에 이르렀을 때 “실로 나는 이 길로 왔다.”(Vism.22.20)라고 할 것이다. 경지(果)에 이르렀다면 “나는 이러한 공덕을 얻었다.”(Vism.22.20)라고 할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나에게 이러한 오염원이 남아 있다.”(Vism.22.20)라고 하여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의 길과 경지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나는 이 진리를 대상으로 꿰뚫었다.”(Vism.22.20)라고 불사의 경지, 즉 아라한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선언할 것이다.
“모가라자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텅 빈 것으로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는 님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합니다.”(Stn.1119)
하나라도 알려 주려고
김진태 수행법문이 끝나고 고반재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 기록도 남는다. 애써 기록해 놓으면 누가 어떤 이야기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기록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김진태 선생이 하나라도 알려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받아 적을 것이 많았다. 다음 행선지는 용추사이다. 해방후에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2109-08-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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