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수행처에 간다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8. 25. 10:58

 

수행처에 간다는 것은

 

 

2019 8 17일 저녁과 8 18일 아침, 정평불 12일 하계수련회 세 번째 이야기 식사

 

타종교인과 대화할 때가 있다. 한국의 경우 개신교와 천주교가 이에 해당된다. 언젠가 개신교인 사회친구와 대화한 적이 있다. 그는 일곱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그를 만나면 주로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신의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상대방의 종교에 대하여 몰랐던 점에 대하여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해 하는 것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음주에 대한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불교에 불음주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불음주계가 오계에 들어가 있어서 불자라면 누구나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자신들만이 불음주계를 지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도 불음주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사회친구는 놀라는 눈치였다.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사회친구에 따르면 불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출가자들이 술집을 드나들며 술을 마시는 등 엉망이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이런 말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불교인들이 계를 잘 지키지 않아서일 것이다. 특히 불음주계가 문제이다. 불음주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드물다고 본다.

 

비빔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정평불 하계수련회가 1 2일로 진행되었다.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수련원이나 템플스테이 시설이 있는 절이 아니라 노스님 수행처가 수련회장이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먹는 것도 불편했고 잠자리도 불편했다. 노스님 혼자 거처 하는 수행처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지 않다. 필요한 것은 각자 가져 와야 했다. 각자 담요 하나씩 가져 오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먹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첫날 저녁밥은 시켜먹었다. 밥 한끼 먹자고 아래에 있는 면으로 이동한다면 시간이 한시간 이상 깨질 것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아래 면에 있는 김밥집에서 그릇당 7천원에 배달하여 먹은 것이다. 처음에는 불고기가 들어간 것을 시켜 먹으려 했으나 스님 수행처이다 보니 육고기를 피하게 된 것이다.

 

저녁식사는 야외에서 했다. 초조대장경 복간본이 모셔져 있는 천년지장 건물앞이다. 2층 본관 건물과 천년지장 건물 사이에 너른 잔디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자리를 깐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종림스님과 대화의 시간도 마련 되어 있었다.

 




오후 6시 반에 비빔밥이 도착했다. 미리 가져온 반찬과 함께 식단이 마련되었다. 육고기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다. 김치, 나물, 장아찌, 부각, 전 등 순수한 채식식단이다. 함께 모여 식사했다. 서서 먹는 사람, 한켠 바위 위에 앉아서 먹는 사람도 있었다. 모여서 대화하며 유쾌화게 식사하다 보니 근사한 식당에서 황제식을 즐기는 것 보다 더 나았다.

 

야단법석(野壇法席)

 

식사가 끝나자 법석이 펼쳐졌다. 야단법석인 것이다. 고반재의 주인장이라고 볼 수 있는 종림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스님은 공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스님은 색즉시공공즉시색이라고 말할 때 공만 이야기해서는 안되고 색으로 나타난 것이야 의미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스님의 말을 들으니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공이라고 하여 없다고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스님은 집합 개념을 사용하여 공에 대하여 설명했으나 공에 대한 이해가 짧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수박을 사러 면으로 갔다. 더 이상 종림스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이런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밤이 무르익었다. 사방이 컴컴해지자 칠흑같이 어두워 졌다. 구름이 끼어서 보름달도 나타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밝기를 자랑하는 조명을 켜니 눈이 부실 정도로 주변이 훤해 졌다. 너무 밝아서 우산으로 가려야만 했다. 그러나 일부만 비출 뿐이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별과 달도 잘 보이지 않는 선선한 밤이었다.

 

시골에는 모기가 있다. 모기 퇴치를 위하여 불을 지폈다. 그렇다고 모닥불은 아니다. 쑥 말린 다발에 불을 붙이니 어두운 밤에 흰연기가 솟아 올랐다. 유년시절 시골 마당에서 본 것 그대로였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아 너무 어두워서 사람 얼굴도 분간하기 힘들정도였다. 이때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스마트폰전등을 만든 것이다. 스마트폰 손전등 앱을 활용한 것이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켠 상태에서 그 위에 작은 생수병을 올려 놓으니 마치 등불이 하나 켜진 것 같았다. 여러 개를 켜니 사람 얼굴이 잘 보일 정도가 되었다.

 

 



오랜만에 맞이 하는 시골밤이었다. 유년시절 시골에 살던 분위기가 살아났다.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취한 것 같다. 집에 돌아갈 걱정 없이 도반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결같이 이런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라며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자 하는 것 같았다.

 

지키기 힘든 불음주계

 

대화가 무르익자 술이 나왔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오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하면 손해인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선천적으로 약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술을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고도 했다. 한잔 들어가면 즐겁고 유쾌하고 기분 좋아 지는 것이 보통인데 술이 들어가면 불편하고 불쾌해져서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오계를 지킨다.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은 불음주계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술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음주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술이 빠지지 않는 것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술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술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집어 삼킬 수 있다.

 

술 끊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빠알리 불음주계를 보면 술 마시지 말라라고 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하지말라고 명령조로 말하는 것은 유일신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의 정언명령과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하지말라가 아니라 삼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음주계에 대하여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이다.

 

취하도록 술 마시지 않기?

 

빠알리 오계를 보면 공통적으로 삼가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삼가다(veramai)’는 것은 지키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어 베라마니(veramai)는 영어로‘Abstaining from’의 뜻으로 절제하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취하지 않게 마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16년 법보신문과 조계종단에서 불자신행지침이라 캠페인한 것이 있다.

 

조계종단에서 말하는 불자신행지침 중에 불음주계에 대한 것이 있다. 이에 대하여 법보신문에서는 7. 취하도록 마시지 않기(불음주)’(법보신문 2016-02-11)라고 했다. 설명을 보면 언제부턴가 수계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가 아닌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다’고 발원하는 불자들이 많아졌다.”라고 했다. 또한 부연 설명으로 그렇다고 이것을 술을 권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계를 수지해 부처님 진리를 좇겠다는 불자라면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다’는 말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깊이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지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과연 종단에서 공표한 불자신행지킴이 잘 지켜질 수 있을까? 한잔이 두잔이 되고, 두잔이 여러잔 되었을 때 결국 술이 사람을 삼켜 버릴 것이다. 술을 마시긴 마시되 취하지 마시지 않기는 일종의 개차법(開遮法)’이라고 볼 수 있다. 필요에 따라 계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논리라면 불살생계도 탄력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이미 그런 역사가 있다. 신라시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가 바로 그것이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하여 살생도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속오계는 후대 호국불교의 원류가 되었다.

 

왜 학습계율(sikkhāpada)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은 술을 마시지 말라라고 하기 보다는 삼가라고 말했다. 이를 개차법으로 받아 들이면 곤란하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간다는 말은 학습계율과 관계가 있다. 만일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했다면 이는 기독교의 정언명령과도 같은 것이 된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십계명(十戒命)’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했는데 했다면 계를 어긴 것이 되어 가책을 느낄 것이다. 이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두려워하고 무서하는 계율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하지말라가 아니라 삼가라고 했다.

 

불교에서 계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십계처럼 신의 명령이 아니다. 만일 오계에 대하여 정언명령식으로 한다면 오계명(五戒命)이 될 것이다. 왜 그럴까? 계율은 지키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계율은 학습계율이 된다.

 

학습계율은 빠알리어 식카빠다(sikkhāpada)’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공부지음이라고 번역했고, 빅쿠보디는 영역으로 training’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빠알리어 식카빠따다가 사전적 의미로 ‘steps of training’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둑질이나 음행을 학습하며 배운다는 뜻이 아니다. 오계를 어겼을 때 마다 참회하며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고 하며 배우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단계적으로 성취되듯이, 마찬가지로 계율도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불음주계를 어겼으면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녀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켜 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배우면서 성취된다고 하여 식카빠다라고 하는 것이다.

 

노래를 하면 악작죄(惡作罪)라 하는데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한다. 고기를 먹으면 술이 따르기도 한다. 술이 있는 곳에 가무도 있을 수 있다. 회식을 하면 기름진 음식에다 술과 노래가 따르기 쉽다. 노래방 문화가 생겨나기 이전에 특히 그랬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람들은 풍류적이라고 한다. 삽시간에 노래방이 보급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회식이 끝나면 노래방 가서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아니 못 부른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최근 몇년동안 노래를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듣는 것은 잘한다. 특히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음악이다.

 

이미우이음악은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 티벳어로 되어 있다. 경과 게송을 현대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특히 잘 듣는 것은 라따나숫따(Ratanasutta: 寶石經)와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gāthā)이다.

 

라따나숫따(Sn2.1)는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경으로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삼보예찬에 대한 것이다. 자야망갈라타는 9개의 게송으로 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와 행운에 대한 것이다.

 

두 개의 음악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듣는다. 벌써 십년이 넘었다. 출근할 때는 라따나숫따를 듣고, 퇴근할 때는 자야망갈라가타를 듣는다. 이렇게 매일 듣다보니 귀에 매우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음악을 모아서 씨디를 만들어 아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음악을 즐겨 듣지만 노래를 못한다. 한번도 노래를 배워 본 적도 없고 무엇보다 고음불가이다. 그러다 보니 노래부르는 자리가 무척 괴롭다. 무엇보다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고 수행처에서 있다 보니 더욱더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노래의 장점도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기분을 전환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면 감정적으로 되기 쉽다.

 

율장에 따르면 노래를 부르면 악작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출가수행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재가수행자도 선원이나 수행처에 들어 가면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수행처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하여 잘못이라 했을까? 이에 대한 인연담이 율장소품에 실려 있다. 승단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이른바 육군비구(六群比丘)에 대한 것이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한때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부처님 가르침을 노래했다. 이에 대하여 율장을 보면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Vin.II.108)라고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어찌 그 어리석은 자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 할 수 있단 말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Vin.II.108)라고 말씀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노래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위험이 있음을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이여,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하는 자에게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위험이 있다. 1) 자기가 그 음성에 집착하고, 2) 다른 사람이 그 음성에 집착하고, 3) 재가자들이 비난하고, 4) 음조를 추구하여 삼매를 방해하고, 5) 후인들이 사견의 길에 떨어지는 것이다.” (Vin.II.108)

 

 

부처님은 수행자가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하여 다섯 가지 잘못이 있다고 했다. 이를 한역으로는 오재(五災)’라고 한다. 노래를 부르면 자기가 그 음성에 집착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자아도취이다. 자기가 자신의 음성의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도 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취하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음주행위를 하면 비난 받기 쉽다. 오계를 어기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설명한다. 그러나 남방불교권에서는 달리 해석한다. 음주를 하면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는 삼매에 들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아도취 되었을 때 사띠(sati)를 놓칠 수 있다. 그래서 네 번째 항목을 보면 음조를 추구하여 삼매를 방해하고라고 했다. 음조에 매혹되어 삼매를 잃어 버리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띠를 잃어 버리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항상 사띠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심지어는 대화하는 것 조차 삼간다. 하물며 노래 부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피치 못하게 노래방에 따라 갈 수 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이지만 반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괴로운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음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은 때로 필요하다. 재가자로 살면서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다. 그러나 수행처라면 곤란하다. 왜 그럴까? 재가자들이 선원이나 수행처에 들어가면 오계뿐만 아니라 팔계(八戒)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처나 선원에서는 팔계(八戒)

 

불자들은 평소에는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절에 가면 팔계를 지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선원에 가면 알 수 있다. 선원에 집중수행하러 가면 매일 새벽에 계를 받아지니는데 이는 오계가 아니라 팔계이다.

 

팔계에 대한 것을 보면 오계에다 세 가지가 더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6)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7)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즐기는 장소에 가거나, 꽃이나 향수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 8)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담마와나 선원 팔계이다.

 

팔계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이 여섯 번째 항 오후불식에 대한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생업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하루 세 끼 먹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간식도 먹고 야식도 먹는다. 그러나 보름에 한번 있는 포살일에는 출가자처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저녁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다만 주스나 우유, 꿀과 같은 액체로 된 것은 허용된다.

 

팔계는 부처님 당시부터 지켜 온 것이다. 한국적 상황이라면 일주일에 한번 절에 가는 것으로 지킬 수 있다. 또는 각종 재일날에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세 가지 항목을 보면 하루출가자로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오후에 먹지 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삼가고, 높은 침상을 쓰지 않는 것이다.

 

팔계를 지킨다는 것은 어쩌면 자발적 가난을 자처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보름에 하루만큼은 수행자처럼 살아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팔계에 대하여 하루계라고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경에 따르면 앙굿따라니까야 “나도 바로 오늘 낮 오늘 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A3.70)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늘 낮 오늘 밤’이라는 말이 바로 ‘하루계’라는 뜻이다.

 

고반재에서 하루밤 잤다. 고반재가 수행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8계를 받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떠나 수행처나 선원에 가면 하루 만큼은 출가수행저처럼 살아야 한다. 팔계라는 것이 일상에서는 지키기 어렵지만 수행처나 선원에서는 지킬 수 있다.

 

고반재에서 하루밤은 안락한 것이 아니다. 노스님 한분이 거처 하는 수행처에 이부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각자 담요를 가져와야 했다. 요도 필요 했다. 마침 야외 메트가 있어서 가져 갔다. 바람을 넣어 사용하는 야외베개도 있어서 챙겼다.

 

잠자리가 문제가 되었다. 여자들은 방이 두 개 배정되어서 독립된 공간에서 잤다. 남자들은 대청마루에서 잤다. 각자 알아서 빈 공간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서가 사이에서 속된말로 짱박혀자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팔계 중에서 여덟 번째 항목인 “8) 넓고 높은 침상 위에서 잠자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받아 지키겠습니다.”라는 계를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낯선 곳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보낸 것 같다. 장거리 운전하려면 잘 자 두어야 하는데 잠시 눈을 붙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편하고자 수련회에 온 것은 아니다. 잘 먹고자 온 것도 아니다. 어쩌면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하고 온 것이다. 또 어쩌면 가난체험을 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도 없이 이불도 없이 마루바닥에 누워 잔다는 것은 어쩌면 노숙자 체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팔계를 지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 보았자 하루뿐이다. 그래서 팔계를 하루낮 하루밤 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침식사시간에

 

아침이 되었다. 일곱시가 기상시간이다. 일찍 잠에서 깨어 고반재 주변을 돌아 보았다. 내륙 오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고반재의 아침은 무척 평화로웠다. 어제 밤의 들뜬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이 평온하고 차분했다. 숲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반재 주변은 원시의 내음이 물씬하다. 대나무가 담처럼 둘러 쳐져 있다. 붉은 베롱나무 꽃도 있고 흰 베롱나무 꽃도 보인다.

 

 


















 

아침식사시간이 되었다. 두 종류의 식사가 준비 되었다. 국수와 밥이다. 음식재료는 대부분 가져 온 것들이다. 가급적 고반재에 폐를 끼치지 않고자 노력했다. 용기도 일회용을 사용했다. 국수는 최원녕 선생이 서울에서 특별히 준비해 온 것이다. 국수에 사용될 재료까지 완벽하게 갖고 왔다. 사찰음식전문가 유병화 선생은 장아치, 부각 등 집에 있는 식재료를 가지고 와서 풍성한 식탁이 되었다.

 




차담(茶啖)을 하면

 

아침 식사를 시작으로 수련회 두번째 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김진태 선생 수행법문을 앞두고 잠시 차담을 가졌다. 모임에 차담 만한 것이 없다. 커피도 있지만 일회성이라고 볼 수 있다. 커피를 마시고 나면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한리필이라 하여 커피를 계속 마실 수는 있지만 짧게 대화하는 것에 그친다. 이에 반하여 차는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

 

커피 마시면서 30분 이야기할 것을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3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차가 대화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작은 찻잔에 차를 계속 채워 주는 것을 말한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차담의 매력은 주고 받는 것이다. 팽주는 계속 차를 따라 주며 대화를 이어나가게 한다. 이렇게 대화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술을 마시면서 대화하며 취기로 인하여 점점 거칠어 지지만, 차를 마시며 대화하면 점점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일까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차담을 했다. 이른 아침 아침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2019-08-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