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그래서 어쨌다고?” 잡담의 한계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0. 30. 14:49

 

그래서 어쨌다고?” 잡담의 한계

 

 

 

언젠가 친구하고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불교라는 종교에 대하여 한참 이야기했더니 다 듣고 난 다음 그래서 어쨌다고?”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말을 종종 듣는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사람도 그런 말을 했다. 한참 직업관에 대하여 이야기했더니 다 듣고 난 다음에 그래서 어쨌다고?”라고 말했다.

 

대화중에 누군가그래서 어쨌다고?(so what)라고 말하면 맥 빠진다.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 가지 못할 정도가 된다. 대화는 단절되고 침묵만 흐른다.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며 장단까지 맞추어 주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자비의 마음의 경청해 준다면 그는 배려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배려는 리더의 큰 덕목 중의 하나이다.

 




형이상학적 이야기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 다음이 없이 이야기하다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대개 잡담이 그렇다. 가십성 이야기를 풀어 놓았을 때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이야기하다 보면 험담으로 흐르기 쉬운데 상대방을 안주 삼아 이야기했을 때 항상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형이상학적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등에 대한 열 가지 철학적 주제를 말한다. 누군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세상은 영원한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말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견해는 나머지 주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했을 때 더 이상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했을 때 나머지 것들 것 거짓이 되어 버린다. 공개토론장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어 대지만 공허한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믿고 있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아무리 답을 해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답을 한다고 해도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럴 경우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뽓따빠다여,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않고,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곧바로 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열반에 들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D9)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을 한다면 헛소리가 되어 버린다.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닌 이야기는 희론(戱論: papañca)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하여 무기(無記: avyākata)라 하여 침묵했다고 말하지만 경을 보면 침묵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않고,..” 등으로 설명했다. 한마디로 헛소리 하자 말라!”는 말과 같다. 다만 점잖게 표현했을 뿐이다.

 

그 다음이 없으면

 

부처님은 세상이 유한한가등의 사변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변적인 이야기는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거든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고 했다. 망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사유에 사로잡혀, 참모임의 화합을 파괴할 정도로 사유 속에서 사려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S35.235)리고 말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그 다음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이 없이 이야기하다 보면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소리 듣기 쉽다. 그 다음이 없으면 공허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열 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설하지 않습니다. 뽓따빠다여,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했고, 뽓따빠다여, 나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했고, 뽓따빠다여, 나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했고, 뽓따빠다여, 나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합니다.”(D9)

 

 

부처님은 열 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침묵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설하지 않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기라고 한다. 열 가지 사변적 견해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한다면 쓸데 없는 말, 즉 헛소리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않고,..” 등으로 설명했다.

 

사변적 견해가 유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리와 이타에 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사변적 견해가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四向四果와 涅槃)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변적 견해는 아무리 이야기 해 보았자 잡설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우물가에서 잡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잡담하면 남는 것이 없다. 그 다음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말을 듣기 쉽다.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부처님은 이것은 괴로움이다.’로 시작 되는 사성제를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을 때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는 사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다. 사성제를 들으면 누구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와 팔고에 대하여 설했을 때, 이 말을 듣고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사고와 팔고를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 보았을 때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르침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만 설한 것이 아니다. 괴로움만 설했다면 염세주의자로 간주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과 더불어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기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방법까지 제시했다.

 

부처님의 괴로움에 대한 해법은 실질적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그 다음이 있다. 말을 다 듣고 난 다음에 그래서 어쨋다고?”라는 말이 나올 수 없다. 부처님은 가르침은 유익한 것이고, 원리에 맞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신중해야

 

사람들은 모이면 잡담을 한다. 잡담을 하면 말하는 즐거움이 있다. 수다를 떨면 시간도 잘 가고 스트레스도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잡담을 하면 가십성 이야기에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주변사람들에 대한 인물평을 하기 쉽다.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좋지 않은 것들이다. 험담을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매우 비열한 것이다.

 

묻지 않았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특정인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없는데서 남말 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이 아닌 사람은 남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가 캐어묻거나 질문을 제기하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상세히 남의 단점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알아야 한다.(A4.73)라고 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특히 없는데서 말하면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기 때문에 발설하는 순간 그 사람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말하거려든 장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차피 그 사람 귀에 들어갈 것이라면 들어서 기분 좋은 장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남에게 장점이 있다면 빠짐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완전히 남의 장점을 말한다.”(A4.73)라고 했다.

 

그 다음이 있는 이야기

 

부처님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바른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질문의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누구(who)’가 아니라 어떻게(how)’에 대한 것이다.

 

말을 할 때는 가급적 누구 또는 누가가 라고 말 할 것 아니라 어떻게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단지 말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질 것이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익한 말을 말한다. 몰리야 팍구나가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S12.2)

 

 

부처님인 누가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누가라고 말하면 존재론에 빠질 수 있다. ‘나는 존재하는가’ ‘우주는 유한한가등 철학적 사변이 되기 쉬움을 말한다. 그 대신 어떻게라는 말을 하면 연기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화를 할 때는 연기법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2019-10-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