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살아 있음을 느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1. 9. 09:50

살아 있음을 느낄 때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다. 오랜만에 손맛을 느낀다. 마우스소리가 경쾌하다. 두 눈은 모니터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두 개의 PC를 가동하여 한쪽에서는 검색을 하고, 또 한쪽에서는 부품작업을 한다. 네트리스트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부품배치에 앞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부품을 만드는 라이브러리 작업은 고도로 집중을 요한다. 잘못 그리면 그대로 손실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신용도 상실된다. 몇차례 학습효과로 인하여 작업할 때는 확인 또 확인한다.

 




부산에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은 스마트폰시대라 이름이 뜬다. 반가운 이름이다. “지금도 일 하나요? 요즘 시간 어때요? 요즘 일 많아요?”라고 묻는다. 일감을 주는 전화이다. 거의 일년만이다. 이 고객과는 오륙년 거래 하는 것 같다. 드문드문 일감을 주지만 잊지 않고 찾아 주는 것이 고맙다. 실수를 했음에도 내치지 않고 또 전화를 주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럴 때 전화한통은 불보살보다 더 반갑다. 귀인(貴人)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부장에서 이제 이사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이제까지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목소리와 이름이 매칭되어 그사람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귀인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경제가 좋지 않다고 한다. 늘 듣는 말이다. 10년전에도, 20년전에도, 30년전에도 경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소시민들에게는 늘 경제가 좋지 않다. 아무리 호황이라해도 서민들에게는 경제가 좋았던 때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일까 1년이 멀다하고 사무실 입주자가 바뀐다. 요즘은 6개월로 단축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곳 오피스텔에서는 터줏대감이 된것같다. 내리 13년동안 같은 층, 같은 호실에 있다. 수 많은 입주자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경제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전화를 주는 고객의 첫일성은 지금도 그 일 하세요?”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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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는 무대에 서야 힘이 난다. 한물간 흘러간 가수가 리사이틀하면 나는 살아있다.”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잡(Job)이 있을 때 활력이 넘친다. 잡이 없으면 힘도 없다. 일거리가 넘쳐나면 생기가 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고 가수가 무대에 서는 듯하다. 요즘 갑자기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온다. 그동안 너무 고요하여 이 일도 끝났나?”라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 이순이 다 되도록 마우스잡고 있는 것이 한계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두면 딱히 할 일도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인쇄회로기판(PCB)설계업이다. 30년동안 이 일을 했으니 이제 제2의 천성처럼 되었다.

 

일감만 있으면 모두 소화해 낼 정도로 숙련되었다. 그럼에도 전화한통 걸려 오지 않았을 때 나의 능력에 한계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번 실수하면 아무소리 없이 돌아서는 것이 이 업계의 특징이다. 좀 더 큰 곳이나 직원수가 많은 곳을 찾기도 한다. 머리가 허옅게 센 사람이 설계하는 것보다 젊은 아가씨가 설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고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잊지 않고 전화주는 고객들은 귀인들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불보살이 따로 없다.

 

요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다. 모니터를 앞에 두고 마우스를 클릭하면 세상일은 생각나지 않는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집중하면 모든 번뇌는 사라진다. 집중하면 할수록 정신은 맑아진다. 마침내 결과물이 나왔을 때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일은 본래 하기 싫은 것이긴 하지만 일단 몰입하면 세상만사를 잊어버린다. 일종의 일삼매라고 볼 수 있다. 일을 하면 무엇보다 수입으로 직결된다. 마치 가수나 배우가 무대에 서는 것과 같다.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일거리가 겹치기로 있으면 가장 행복하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력이 솟아난다. 일이 없으면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글을 쓴다. 그렇게 13년동안 쓰다보니 5천개가량 되었다. 한곳에서만 오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을 할 때나 글을 쓸 때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살아있다.’라는 사실이다.

 


 

2019-11-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