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熟成)되어야 맛이 나는 대봉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3년전 나주로 귀촌하여 살고 있는 법우님이 대봉 한박스를 보내 준 것이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대봉 한박스의 무게는 상당하다. 거의 20키로 이상 되는 것 같다. 박스 속에는 대봉이 오륙십개 들어 있는 것 같다. 법우님에 따르면 완전 무농약, 무공해, 친환경 먹거리라고 했다.
법우님은 대봉 한박스를 무상으로 보내 주었다. 택배비라도 부담하겠다고 말했지만 선불로 보내 준 것이다. 그런 법우님은 불교교양대학 동기님이다. 2004년 인연 맺었으니 올해로 14년 된다.
법우님은 작년에도 대봉 한박스를 보내 주었다. 올해로 두 번째 받고 있다. 법우님이 이렇게 매년 무상으로 보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글과 관련 있을 것이다. 법우님은 글을 꾸준히 읽고 있다고 했다. 아마 글을 읽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도 볼 수 있다.
대봉은 말랑말랑하여 익어야 맛이 있다. 이번에 받은 대봉은 딱딱하다. 작년 경험으로 짐작컨데 지금 먹으면 떫은 맛이 난다. 통풍이 잘되는 건조한 곳에서 이삼주 두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하면 숙성(熟成)시키는 것이다.
숙성해야 맛이 나는 음식이 있다. 자연의 힘에 의해서 익는 것이다. 곳감도 그렇고, 김치도 그렇고, 포도주도 그렇다. 내버려 두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저절로 익는 것이다. 대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날 때가 맛이 있다. 밥을 지은 다음 20분 이내에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식당에 가면 온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밥을 꺼내 온다. 뜨겁기만 할 뿐 맛이 나지 않는다. 익힌 음식은 그 자리에서 먹어야 맛이 있지 식으면 맛이 없다. 그러나 익히지 않은 음식은 숙성시키면 맛이 난다. 특히 발효식품이 그렇다.
숙성과 비슷한 말이 성숙이다. 성숙(成熟)이라는 말은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다는 뜻도 있지만 과실 등 생명체가 충분히 자람의 뜻도 있다. 영어로는 ‘maturity’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숙성(熟成)이라는 말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aging’이라 한다. 주로 과일이나 식품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숙성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식품 속의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따위가 효소나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부패하지 않고 알맞게 분해되어 특유한 맛과 향기를 생성하는 일”이라고 설명된다. 김치나 장아치와 같은 발효식품이 대표적이다. 곳감이 익는 것도 숙성이고 대봉이 익는 것도 숙성이다.
무엇이든지 기간을 필요로 한다. 한번에 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이라는 것이 모니터앞에 앉자마자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품는 기간이 필요하다. 주제를 정해 놓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 이상 품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 머리를 감다가 무심결에 떠 오른 경우가 많다. 그럴경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억해 둔다. 요즘 스마트폰 시대라 메모앱에 키워드를 쳐 놓는다. 이렇게 본다면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품는 것은 마치 김치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숙성의 의미가 있다.
법우님은 보시를 실천하는 분이다. 그것은 스승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법우님에따르면 젊었을 때 염불선으로 유명한 청화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칠순이 다 된 나이임에도 배우고 닦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는 삶이다.
놀랍게도 법우님은 십년 전에 절을 하나 인수했다. 남해가 보이는 통영 부근 바닷가라고 했다. 법당과 용왕전이 있는 작은 절이라고 했다. 연고지가 아닌 곳에 절을 인수한 것은 스님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는 서울에다 포교당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절에는 청화스님과 관련된 스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절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느 해인가 법우님에게 어떻게 유지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법우님은 “그냥 던져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스님에게 맡긴 것이다.
법우님은 귀촌하기 전에 서울에서 야채 도매상을 하거나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시흥사거리에서 식당을 할 때는 글을 하나 써 주었다. 이른바 맛집기행문 같은 것이다. 이런 인연이 있어서일까 대봉을 받은 것 같다. 늘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2019-11-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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