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 평온하다면 잘 산 것이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지금 괴롭다면 불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 괴로움은 결과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사성제에서는 ‘갈애’ 때문이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갈애로 인하여 궁극적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고 했다.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괴로움을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괴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라고 했다. 감각적 욕망도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감각적 욕망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수행녀의 경에서는 아난다가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A4.159)라고 했다.
남녀가 성교를 하면 아기가 태어난다. 동물들도 발정기가 되어 짝을 이루면 새끼가 태어난다. 성적본능은 종족보존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달리 발정기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가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항상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tn108라고 했다.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하더라도 자녀로 인한 행복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더 많다. 이는 “지금 이 수행자에게는 없네. 한 아들이나 두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거느린 과부가 없으니 이 수행자는 행복하네.”(S7.10)라고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과 존재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자손을 남기고자 한다. 그 결과는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돌고도는 물레방아에서는 시작점을 알 수 없다. 아무 곳이나 찍으면 그곳이 시작점이 될 것이다. 십이연기가 무명에서 시작되지만 연기가 회전하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갈애를 시작점으로 본다. 그래서 감각적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그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인하여 연기가 회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가 회전하면 그 결과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되어서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살다보면 즐거운 날 보다는 괴로운 날이 더 많다. 이는 극심한 통증과 같은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족도 해당된다. 설령 즐거운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 즐거운 느낌이 오래 유지되지 않아서 불만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즐거움은 결국 괴로운 것이 된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보아야 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의 과거생은 어떤 것일까?
지금 지옥고를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이와 같은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괴로움의 대상은 사람일수도 있고 병일 수도 있고 소송 중에 있는 사건일 수도 있다. 모두 싫어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연기가 회전하고 있는 한 이런 괴로움은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가 생겨나는 식이다. 윤회하고 있는 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괴로움과 윤회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의 삶에 대하여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지금 삶이 행복하다고 하여 내버려 둔다면 또다시 지옥과 같은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매생마다 반복하는 것이다. 과거 생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현생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미래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과거생은 어떤 것일까?
과거생은 알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비참한 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S15.13)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과거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지 않은 장면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도를 윤회하면서 악처에 있었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리고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소로만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소, 양, 염소, 사슴, 닮, 돼지로도 태어나 목이 무수하게 잘렸다는 것이다. 그 피를 모아 놓으면 수미산 주위에 있는 사대양의 물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선업공덕을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도리를 지켰기 때문에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으로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가 사로 잡혀 목이 베어 흘린 피도 사대양 보다 많을 것이다. 오계를 어겨서 목이 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목이 잘릴 때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눈물로 다짐했을 것이다. 오계를 지킨 과보로 인간이 된 것이다.
구역질 나도록 이 세상을
지옥고를 겪고 있는 자는 지옥과 같은 괴로움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지금 형편이 좋다고 하여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그 행위가 익으면 과보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괴로움이 닥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3)라고 말했다.
한 존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우주적 재난과 우주적 괴로움이다.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를 하면서 우주적 재난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무덤만 증대시켰다고 했다. 윤회하면서 쌓아 놓은 뼈무더기는 수미산 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제 끝내자고 했다. 어떻게 끝내는가? 가장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을 내라고 했다. 형성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염오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하여 눈꼽만큼도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괴로움과 윤회를 끝내려면 이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야 된다고 했다. 어떻게 싫어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을 구역질 나도록 싫어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고 하여 삼라만상 기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S22.59)라고 했다.
오온은 형성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싫어하여 떠남은 오온에서 떠나는 것을 뜻한다. 오온에 대하여 염오(nibbidā)하고 이욕(virāga)하는 것이다. 그러면 해탈(vimutti)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S22.59)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이다.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한 한발자국도 나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역질 나도록 세상에 염오하라고 했다.
토한 것을 다시 삼킬 수 없다. 염오하고 이욕하면 해탈에 이른다. 이에 대하여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고 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토한 것은 역겨운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토할 정도로 싫어하여 떠났을 때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 라훌라에게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라.”(Stn.339)라고 했고, 또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Stn.340)라고 했다.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지금 그 사람에게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테리가타를 보면 뭇따장로니는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Thig.11)라고 노래했다. 이는 일아스님 번역이다. 여기서 재가생활에서 벗어나 출가한 것을 노래 한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은 ‘khujjakena’를 번역한 말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곱사등이 남편’이라고 번역했다.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여성들은 선택권이 없었다. 부모가 짝을 맺어주는 대로 산 것이다. 가난한 바라문의 딸로 태어난 뭇따장로니는 성년이 되자 부모는 그녀를 곱사등이와 결혼시켰다. 그녀는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게송에서 언급된 것처럼 세 가지 굽은 것, 즉 절구와 절구공이와 굽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뭇따장로니는 부처님의 교단에 비구니승단이 생기자 출가했다. 출가의 기쁨에 대하여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절구로부터 공이로부터 그리고 곱사등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잘 해탈되었고 훌륭하게 해탈되었다.” (Thig.11)라고 했다. 이와 같은 출가의 기쁨은 해탈의 기쁨이기도 하다.
재가의 삶은 번거로운 것이다. 가족에게 속박되어 있는 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재가의 삶에서 떠나면 자유로울 것이다. 이번에는 쑤망갈라장로는 “잘 해탈했다. 아주 잘 해탈했다. 세 가지 굽은 것에서 잘 해탈했다. 낫에서 해탈하고, 쟁기에서 해탈하고, 괭이에서 나는 아주 잘 해탈했다.”(Thag.43)라고 했다.
낫, 쟁기, 괭이는 농기구로 남성이 일하는 도구이다. 재가의 힘겨운 삶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농기구는 공통적으로 굽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굽은 것은 해탈의 관점에서 보면 굽어진 신체적 행위, 굽어진 언어적 행위, 굽어진 정신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굽은 것에서 해탈되었다는 것은 신구의 삼업에서 해탈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재가의 삶으로 벗어나는 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재가에서 출가하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야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생사로부터 해탈되었으니 나에게 존재의 통로는 제거되었다.”(Thig.11)라고 했다. 해탈의 기쁨이다.
재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면, 오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대자유라고 볼 수 있다. 대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내것,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자유인은 걸림이 없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탐, 진, 치와 같은 번뇌에서도 자유롭다. 늘 깨어 있기 때문에 욕망이나 분노에서도 자유롭다.
대자유인은 모든 것을 자유의지대로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담배를 끊어야 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몸의 요구에 항복하여 무산되었을 때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마음먹은 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탐욕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할 뿐 의지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동물적 삶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본능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는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담배나 술이 해로운 줄 알아 즉시 끊는다면 그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진 자는 오온으로부터 해방된 자를 말한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의 진정한 자유는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자유에 해당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자신에게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오온이라는 세상을 염오하고 이욕하여 해탈하면 대자유인이 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한세상을 파괴했을 때 대자유인이 된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를 보면 부처님 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노래로 가득하다. 불교인들의 진정한 자유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바야여, 이 몸은 부서지기 쉬운데,
거기에 일반사람이 집착한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갖추어
이 몸을 나는 버릴 것이니라.”(Thig.36)
“많은 괴로운 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나는 방일하지 않았으니,
갈애의 부숨에 도달하여
깨달은 님의 교법이 성취되었다.”(Thig.36)
2020-01-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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