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3. 15:17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블로그명이 이 고뇌의 강을 건너였던 때가 있다. 지금은 진흙속의연꽃으로 정착되었지만 블로그 초기 때는 대승의 바다라고 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꾸었다. 블로그를 만들고 나서부터 14년이 된 현재까지 대문의 명칭이 세 번 바뀌었다.

 

대승의 바다

 

대문명칭을 대승의 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꾼 것에 대하여 글을 올린 바 있다. 2009629일자의 글이다. 글에서 블로그명을 ‘대승의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꾼 이유는 좀더 초기 불교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입니다.”라고 써 놓았다.

 

2009년 시점이면 본격적으로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졌을 때이다. 지금은 한국명상원으로 바뀌었지만 그때 당시는 한국위빠사나선원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공부하러 다녔을 때이다. 초기경전과 논서를 접하면서 대승불교의 이름이 풍기는 대승의 바다라는 명칭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르다가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꾸었다. 2005년에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4년만에 바꾼 것이다.

 

블로그명 ‘이 고뇌의 강을 건너’도 오래 가지 않았다. 20129월 어느 법우님법우부터 대문명칭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댓글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법우님은 블로그의 상호는 이 고뇌의 강을 건너이지만 사실 누구나 진흙속의연꽃 블로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상호를 진흙속의연꽃으로 바꾸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전해 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법우님의 글을 보고서 숙고했다. 대승의 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꾸어 3년동안 사용해 왔는데 필명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필명을 대문으로 바꿀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타당했다. 기업에서 상표가 회사이름으로 바뀐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대문명칭이 염세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블로그명을 대승의 바다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꾼 시점은 초기불교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고뇌의 시기이기도 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고뇌를 유발한 것이다. 분명히 불교에 답이 있다고 보았다. 초기불교에서 해법을 찾고자 했다. 초기경전보다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집중적으로 보았다.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을 때 법우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것이다.

 

블로그명을 이 고뇌의 강을 건너로 바꾸게 된 것은 석지현스님이 번역한 법구경 게송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의 한 게송을 보면욕망의 숲을 헤치고 수행자여, 이 거센 물결을 건너가라.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Dhp.383)라고 되어 있다. 법구경 제26품 바라문품에 있는 첫번째 게송이다. 게송에서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말이 좋아 보였다. 그때 당시 심정과도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너무 염세적이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는 문구를 부제로 달았다.

 

석지현스님이 번역한 383번 게송을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한 것과 비교해 보았다. 전재성선생은 정진하여 흐름을 끊어라. 바라문이여,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라.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 바라문이여, 그대는 무위를 아는 님이다.” (Dhp.383)라고 번역했다. 비교적 빠알리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고뇌의 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되는 말은 형성들의 부서짐을 알면(Sakhārāna khaya ñatvā)”이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존재의 다발[五蘊]의 부서짐을 안다.”(DhpA.IV.139)라고 되어 있다. 석지현스님은 오온이 부서짐이 고뇌의 강을 건너는 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석지현스님의 번역은 영역을 중역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의역함에 따라 빠알리원문에서 빗겨나간 것이 많다. 첫번째 구절 정진하여 흐름을 끊어라. (Chinda sota parakkamma)”라는 문구에 대해서도이 거센 물결을 건너가라.”라고 번역했다. 바라문이여(brāhmaa)”에 대하여 수행자여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브라흐마나는 번뇌를 부순 자인 거룩한 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법구경 26품에서 말하는 바라문은 부처님이 새롭게 재해석한 것으로 아라한과 동격임을 말한다.

 

석지현스님은 과도하게 의역했다. 빠알리원문에서 벗어난 것이 많다. 그러나 아름다운 우리말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 놓았다. 그런 문구 중의 하나가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는 말이다.

 

진흙속의연꽃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했다. 고통만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자 한 열망이 블로그대문 명칭으로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부제로서 니르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라고 했다. 참으로 가슴 설레고 멋 있는 문구이다. 이 명칭과 문구를 약 3년가량 사용했다. 그러나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고뇌의 강이라는 말이 생각하면 할수록 염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블로그명을 바꾼 것은 자만도 작용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강을 건넜다고 본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보고 사야도법문집을 보니 이제 염세적인 블로그명은 그만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느 법우님이 필명 진흙속의연꽃을 그대로 블로그 명칭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지금까지 블로그명칭은 진흙속의연꽃이다. 이는 필명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필명이 진흙속의 연꽃이 아니라 붙여서 진흙속의연꽃이다. 이름을 띄어 쓰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그 명칭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승의 바다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가량 사용했고, 그 다음에 이 고뇌의 강을 건너2009년부터 2012년까지 약 3년을 사용했다. 2012년 이후 지금까지 8년 동안 진흙속의연꽃을 블로그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종 블로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대승의 바다이야기를 한다. 블로그 초창기때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사오년전에 명진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스님은 이 고뇌의 강을 건너를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블로그 명칭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블로그명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가량 짧게 존속했음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봉은사 주지했던 시절에 본 것 같다. 짧지 않은 블로그 역사에서 명칭이 세 번 바뀐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면

 

최근 유튜브에서 최진석선생의 반야심경을 듣고 있다. 최진석선생에 따르면 어느 종교이든지 건너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를 불교에서는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한다. 파라미타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과정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완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전자의 경우 바라밀행이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건너가야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거세게 흐르는 강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피안(彼岸)이라고 한다. 숫따니빠따에서는 피안으로 가는 길(pārāyana)’이라고 하여 별도로 피안의 품이 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인들은 이 거센 물살을 어떻게 해야 건널 수 있는 것인지 학인들은 부처님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 중에 학인 우빠씨바는 싸끼야시여,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저는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Stn.1069)라고 말했다.

 

여기 생사기로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이때 누군가 도움을 준다면 목숨을 건질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학인은 부처님에게 도저히 이 거센 물살을 건널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거센 물결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윤회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Prj.II.34)이라고 했다.

 

매번 반복되는 윤회의 바다를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안전한 섬으로 피신해야 할 것이다. 안전한 섬과 같은 것이 열반이다. 열반의 섬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센 흐름(ogha: 暴流)’을 건너야 한다. 물살이 너무 세서 저 언덕에 도달하기 전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이다. 이와 같은 폭류를 건너 해안가에 도달해야 안전한 것이다. 윤회가 끝나 파도가 미치지 않는 해안가를 말한다.

 

윤회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뗏목

 

인도 갠지스강은 우기가 되어 불어 나면 바다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강에 대하여 바다와 같다고 말한다. 더구나 소용돌이 치는 거센 흐름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학인 우빠씨바는 부처님에게 제가 의지해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Stn.1069)라고 간청했다. 이에 부처님은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알려 주었다. 이런 가르침은 뗏목과 같은 것이다. 윤회의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뗏목이다.

 




피안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 뗏목은 필요 없을 것이다.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내 뗏목은 이미 잘 엮어져 있고 거센 흐름을 이기고 건너 피안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더 뗏목이 소용없으니, 신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Stn.21)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넜다고 하여 뗏목을 버려서는 안된다.

 

깨달음의 길에 가는데 있어서 비법은 당연히 버려야 한다. 누군가 깨달았다고 하여 가르침마저 버려야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갔다고 하여 더 이상 필요 없는 뗏목을 불살라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곳으로 가면 어떨까?”(M22)라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뗏목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뗏목을 버려라거나 불살라 버려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뗏목은 이 언덕에서 만든 것이다. 세속에서 만든 것이다. 이는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S35.23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거센 흐름은 자신이 건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건너 가야 한다. 그것도 뗏목을 집어 삼킬 수 있는 거센 흐름을 뚫고 가야 한다.

 

대승보살사상의 근거가 되는

 

마침내 저 언덕에 도착했을 때 뗏목은 아무 짝에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방치하거나 불살라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물에 침수시켜 놓고 가라고 했다. 뗏목을 왜 침수시켜 놓고 가라고 했을까? 이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는다.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다음 사람을 위하여 침수시켜 놓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사용할까? 아마 보살정신을 가진 자가 다시 사용할 것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갔지만 이 언덕에 있는 사람들을 태워 주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숫따니빠따 나룻배의 경’(Sn.2.8)을 근거로 한다.

 

나룻배의 경은 대승사상의 근거가 되는 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에 따르면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 줄 수 있는 것과 같이,”(Stn.321)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저 언덕으로 갈 때는 홀로 뗏목을 타고 갔으나 이 언덕에 다시 와서는 노와 키를 장착하고 더 많이 태울수록 크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대승보살사상이다. 그래서 이 나룻배의 경이 대승보살사상의 모티브가 되는 경으로 보기도 한다.

 

왜 뗏목을 침수시켜 놓으라고 했을까?

 

초기경전에서 뗏목은 팔정도를 상징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S35.238)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수행자는 팔정도라는 뗏목을 타고 저 언덕으로 건넌다. 뗏목이 이 언덕에서 나무와 풀 등으로 엮여져 있듯이, 팔정도 역시 이 언덕의 언어와 사유를 수단으로 엮여진 것이다.

 

뗏목을 타고 저 언덕으로 건너 갔을 때 이 언덕에서 만들었던 뗏목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세속의 언어와 사유로 엮여진 팔정도 역시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언덕으로 건너는 순간 뗏목은 버려지고 팔정도 역시 버려진다. 그렇다고 불살라 버려서는 안된다. 다음 사람을 위하여 물에 침수시켜 놓아야 한다. 팔정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처님은 왜 뗏목의 비유를 설했을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M22)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키워드는 집착이다. 부처님은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단지 그것을 외우거나 교조적으로 거기에 집착한다거나 개념적으로 확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392번각주)라고 했다. 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냐나난다 빅쿠의 견해를 참조하여 설명한 것이다.

 

뗏목의 비유는 가르침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 것이다. 저 언덕에 이르렀으면 세속적인 언어와 사유로 설한 가르침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뗏목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M22)라고 했다. 이 말은 금강경에 실려있는 법상응사하황비법(法尙應捨 何況非法)’과 유사하다. 금강경에 실려 있는 문구의 원조가 니까야에 있는 것이다.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비법은 당연히 버려진다. 그렇다고 정법까지 버려서는 곤란하다. 설령 저 언덕으로 건너간 아라한이라도 오계는 지켜야 한다. 이는 올바로 지혜로써 해탈한 자라면, 다섯 가지 일에 대하여 어길 수가 없습니다.”(M7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승가에서는 포살일에 번뇌다한 아라한이라도 모두 함께 모여 포살계목을 합송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버리라고 한 것은 법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그럼에도 저 언덕으로 갔다고 하여 정법마저 버렸을 때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살 것이다. 그래서일까 뗏목을 불살라 버리지 말고 물에 침수시켜 놓으라고 했을 것이다.

 

반야심경 주문(呪文)은 아라한찬가

 

요즘 정치권에서는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야권에서 어느 정치지도자가 합당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탄핵의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살아 가면서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있다. 얕은 개울일 수도 있고 작은 하천일 수도 있다. 우기가 되어 바다처럼 넓은 강폭을 가진 강이라면 어떻게 건너야 할까? 더구나 소용돌이 치는 거센 흐름이라면 도저히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르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교인들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 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이번 생에서 다음 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어떤 발판인가? 청정도론에서 장로와 젊은 수행승과의 대화에서 확인된다. 장로가 벗이여, 그대는 이 교법에 정립되어 있는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젊은 수행승은 존자여, 그렇습니다. 저는 흐름에 든 자입니다.”(Vism.13.84)라고 대답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돌이킬 수 없이 일곱생이내에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어떤 자인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간 자를 아라한이라고 한다. 경에서는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oti)’이라고 했다. 여기서 피안으로 건너 간 자를 빠라가또(pāragato)’라고 했다. 마치 산스크리트어 반야심경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gate bodhi svāhā)”에서 빠라가떼를 연상케 한다.

 

반야심경에서 빠라가떼(pāragate)라는 말은 피안으로 가시분이여.”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반야심경 주문은 가신 분이여, 가신분이여,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심경 주문(呪文)아라한찬가라고 볼 수 있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건너감을 이야기한다. 건너감에 대하여 초월(超越)이라고 말 할수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십바라밀에서 바라밀에 해당되는 빠알리어 빠라미(paramī)에 대하여 초월로 번역했다. 궁극적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건너 가자고 했다. 강을 건너 가자는 것이다. 그 강은 어떤 강인가? 소용돌이 치는 거센 흐름이 있는 강이다. 마치 바다처럼 넓은 강이다. 또 욕망의 강이다. 또 슬픔과 비탄의 강이다. 그 강은 고뇌의 강이기도 하다.

 

이 고뇌의 강을 건너고자 했다. 한때 블로그 명칭을 이 고뇌의 강을 건너라고 지었다. 그 강은 너무나 건너기 힘든 강이다. 욕망의 강이고, 슬픔의 강이고, 비탄의 강이다. 소용돌이 치는 강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다. 무언가 의지해서 건너야 한다. 팔정도라는 뗏목이다. 과연 나는 이 고뇌의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저 언덕에 도달한 사람들,

사람들 가운데 매우 적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언덕에서 매우 분주하네.

 

진실로 바르게 설해진 가르침을

원리에 맞게 따른다면,

저 언덕에 도달하리.

뛰어넘기 힘든 죽움의 왕국을 건너.(S45.34)

 

 

2020-01-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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