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 27. 13:10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설날 연휴가 너무 긴 것 같다. 삼일을 쉬는데 일요일이 끼여 있기 때문에 밀려서 월요일도 쉰다. 월요일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길거리는 한산하다. 모두 집에서 늦게까지 자는 것 같다. 전국민이 모두 쉬는 것처럼 보인다. 월급생활자들은 쉬워서 좋을지 모르지만 그때그때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타격이 크다.

 

아침에 학의천을 가로질로 굴다리 방향으로 향했다. 동화약품자리에 거대한 아파트형공장이 건설중에 있다. 주변 아파트단지에서는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다. 이에 게의치 않는듯 타워크레인은 자꾸만 높아져 간다. 앞으로 일년 정도 지나면 거대한 지식센터빌딩이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

 

보이는 대상에 따라 세상이 열린다. 들리는 대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신을 포함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따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눈을 감으면, 귀를 감으면 세상도 닫혀 질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했다. 소리와 관련해서는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청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했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있어야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으면 세상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소멸에 대하여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이것이 세상의 소멸이다.”(S35.107)라고 했다. 세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마음이 생겨남을 말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왜 그런가? 연기가 회전되기 때문이다.


삼사화합으로 인하여 접촉이 생겨나는데, 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한다. 이 느낌은 크게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다. 느낌을 따라 갔을 때 이는 갈애가 되고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되어서 집착이 된다. 집착은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새로운 태어남을 야기한다. 한번 태어난 것은 죽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겪게 된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눈을 감으면 세상도 소멸할 것이다. 동시에 괴로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귀를 닫아 버리고, 코와 혀도, 몸도 감각접촉을 하지 않게 하면 괴로움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 없고 듣지 않을 수 없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S35.107)가 되어 연기가 거꾸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했을 때 이를 세상의 소멸이라고 했다.

 

꿈깨라고 하는데

 

세상의 발생과 소멸은 오온에서 발생한다. 오온을 떠나서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논하는 것은 희론(papañca)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꿈깨라는 소리를 한다. 사람의 일생은 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 나듯이 깨어 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꿈속에서는 살인자가 될 수도 있다. 꿈속에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꿈속에서는 오계를 어기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생을 꿈과 같은 것이라 한다면 오계를 어기는 등 악행을 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인생은 꿈과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 대신 이 세상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이 만들어 낸 세상이라고 했다.

 

행위를 하면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부정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일 뿐이다.”(S35.23)라고 말했다. 말장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체라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세상을 말하는 것이 일체인데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떠나서 달리 일체가 없음을 말한다.

 

이 몸과 마음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체를 찾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공간이 먼저 있어서 그것으로 시각현상을 설명하려 한다면 말뿐인 것이지 어떠한 본성도 밝혀내지 못함을 말한다. 청각도 마찬가지이고 후각도 마찬가지이고 여섯 가지 감각능력의 세계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꿈깨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고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은 불고 있지 않다고

 

시공간은 여섯가지 감역의 바다에서 조건지어져서 파생된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시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감각의 장이 있다고 보는 것은 거꾸로 된 생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의 영역을 떠나 달리 시공간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그런 공간이 정말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못해서 곤혹스러워 하며 쩔쩔맬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S35.23)라고 했다. 자신의 감각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인식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식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희론이라고 한다. 머리속에서만 생각하는 망상인 것이다. 바람이 불고 있는데 누군가 바람은 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 강물이 흐르지 않다고 보는 사람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있을 때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에 탐착하면, 이와 같이 바람은 불지않고, 강물은 흐르지 않고, 임산부는 출산하지 않고, 해와 달은 뜨고 지지 않고, 모든 것이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다.’라는 견해가 생겨나는가?”(S24.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바람은 부는 것이고, 강물은 흐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람은 불지 않고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왜 이런 견해를 가졌을까? 주석에 따르면 나뭇가지 등을 부러뜨리고 바람이 불지만 실제로 부는 것은 바람이 아니고 소위 바람의 원자이다. 실제로 바람은 기둥이나 산처럼 고정되어 있다.”(SRP.II.337)라고 설명해 놓았다. 바람은 그대로 있는데 단지 원소들이 이동한 것이라고 한다.

 

초기불전연구원 주석을 보면 원소대신에 복사로 설명하고 있다. 바람이 분 것은 복사된 바람이 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모든 것은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이다. 원자나 원소가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본은 따로 있고 복사본이 움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강물이 흘러도 실제로 흐르는 것은 물의 원자 내지 물의 복사가 흐르는 것이 된다. 임산부가 출산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임산부는 임신하지도 않았고 아기를 출산한 적도 없다. 아기의 원자가 출산되었거나 아기의 복사판이 출산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태양과 달도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원자나 복사판이 뜨고 지는 것이 된다.

 

외도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은 본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변화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변화는 꿈과 같다는 말과 같다. 누군가 인생을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꿈을 깨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상윳따니까야 바람의 경’(S24.1)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견해를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칼의 원소가 통과한 것일 뿐

 

매일 꿈을 꾸고 있다. 예전에는 꿈을 꾸고 나면 꿈의 의미를 분석하려고 했다. 융의 분석심리학 책을 읽은 것이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만 두었다. 꿈이 아무리 생생하여도 무의식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선잠을 잘 때 꾸는 꿈은 대부분 악몽이다. 그래서 잠을 자다 눈을 뜨면 곧바로 일어난다. 잠 자기 전에 사띠하고 잠을 잘 때는 송장처럼 뒤척이지 말고 자라고 했다. 잠에서 깰 때는 사띠하며 깨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꿈을 꿀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잠잘 때를 제외하고 늘 깨어 있으라고 말한 것은 꿈에 끄달리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인생을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꿈속에서는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살인을 하고 음행을 하는 등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이 표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을 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생에서 저지를 악업은 정당화될 것이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단지 칼의 원소가 통과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 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다.”(S24.8)라고 말한 외도의 칠요소설에 대한 것이다.

 

진아(眞我)의 불괴성과 불변성

 

칠요소설은 외도의 스승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로서 진아(眞我)의 불괴성과 불변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영원주의적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이 일곱 요소는 만들어진 것이나 만든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고,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고,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방해받지 않는다.”(S24.8)라고 했다.

 

어떤이는 진짜 나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생각하는 나는 가짜나라고 한다. 진짜 나를 만날려면 꿈에서 깨어나듯이 현실이 꿈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꿈을 깨고 나면 모두 꿈속의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을 짓거나 업을 짓게 만들어도,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어도, 학대하거나 학대하게 만들어도, 슬픔을 주거나 슬픔을 주게 만들어도,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해도, 협박하거나 협박하도록 해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집에 침입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강도질하고, 노상에서 강도질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고, 거짓말을 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니다.”(S24.6)라는 견해를 갖는다고 했다.

 

꿈속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 꿈을 깨면 그만이다. 현실을 꿈으로 본다면 오계를 어겨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이 깨달음에 대하여 꿈의 비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사람들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 하여 이 세상을 꿈처럼 보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생을 꿈처럼 보라고 한적이 없다. 다만 오온에 대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라고 했을 뿐이다. 오온에는 실체가 없다고 분석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실체도 없는 오온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체가 바로 우주이다. 우주라는 시공간이 따로 있어서 우주가 아니라 이 작은 몸에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세계가 일체인 것이다.

 

망원경으로 보는 우주는 평생 달려도 갈 수 없지만 여섯 감역으로 지각되는 일체는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런 세계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이다. 그 세계는 다름 아닌 괴로움의 세계이다. 세상의 발생은 괴로움의 발생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생이 있으면 소멸도 있기 마련이다. 연기를 거꾸로 회전시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군가 나의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해법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과 마음 안에 해결방법이 있다. 그래서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말한 것이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임산부는 출산하고 해와 달은 뜨고 진다.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한다. 불변하고 무너지지 않는 원형은 있을 수 없다.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의존적이고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연기적 흐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실이 꿈과 같기 때문에 꿈을 깨라고 말한다면 공허한 말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른다.

 

 

2020-0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