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1. 21:17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자주 다니면 길이 난다. 처음에는 작은 길이었으나 자주 다니면 큰 길이 된다. 한번 길이 나면 계속 다니게 되어 있다. 대로(大路)도 처음에는 한두사람이 다니는 작은 길이었을 것이다. 차츰 사람들이 왕래하고 우마차가 다님에 따라 점점 넓어진 것이다. 차선이 한 개에서 두개로, 그리고 여러 차선이 되었을 때 간선도로가 된다. 도시와 도시를 잇게 되었을 때 고속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이동하게 되었다. 사람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에도 길이 있다. 자주 보다 보면 계속 보게 된다. 자주 듣다 보면 계속 듣게 된다. 맛있는 것을 먹다 보면 맛에 길들여져 계속 먹게 된다. 보는 것도 길들여지고, 보는 것도 길들여진다. 쓰면 쓸수록 느는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과 만났을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찍고 있다고

 

2004년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함으로써 불교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때 원장스님이 늘 하던 말이 있다. 스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찍고 있습니다. 모두 저장됩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비디오로 찍고 있다는데 왜 찍고 있다고 하는지 잘 몰랐다. 전현수 선생의 유튜브강연을 듣고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와 닿는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것이다. 한번 기억된 것은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비디오를 찍으면 테이프에 보관된다. 요즘은 하드디스크나 유에스비에 보관될 것이다. 웹에도 보관할 수 있다. 그러나 용량의 한계가 있다. 고화질일수록 메모리 사이즈가 커진다. 컴퓨터에 보관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도중에 손실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하지 않다. 컴퓨터가 망가져서 못쓰게 될 수 있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불능이 될 수 있다. 추억이 날아 가는 것이다. 웹에 저장해 놓으면 안심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망각될 것이다. 언젠가는 폐기처분 될지 모른다. 그런데 다섯 감각기관으로 찍어 놓은 비디오는 망실 될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수퍼컴퓨터 보다 더 우수해서 한번 찍어 놓으면 영원히 손실되지 않는다.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지울 수도 없다. 한번 찍어 놓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비디오를 찍고 있다. 모두 마음의 메모리창고에 저장된다. 한번 저장된 것은 지울수도 없고 해커가 침입하여 없앨 수도 없다. 한번 찍으면 평생 가지고 간다. 이번생이 끝이 아니다. 세세생생 가져 가는 것이다.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나 초고성능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눈으로 귀로 계속 찍고 있다. 찍기 싫어도 찍어야 한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본 것이든 보여진 것이든 모두 찍힌다. 그리고 저장된다.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저 깊은 무의식의 창고에는 낱낱이 저장 되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용량을 가진 초수퍼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글은 지울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된다.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은 거두어들일 수 없다. 누군가 말을 하고 나서 없던 것으로 하자고 말하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한번 뱉은 말은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그렇다. 몸으로 지은 행위, 언어로 지은 행위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도 메모리창고에 저장된다. 지나가면서 포착된 것들은 설령 그것이 약한 것이라도 저장된다. 언젠가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결과로서 나타난다. 함부로 행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법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년기 때 강아지를 죽인 적이 있다고 했다. 모르고 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단히 잘못된 것 같아 참회했다고 한다. 참회의 글을 써서 강아지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도 있을 것이다. 말 못할 고민도 있고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다고 하여도 지울 수 없다. 한번 행위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있는데 한번 저장되면 지울 수 없는 메모리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엎질러진 물은 주어 담기 힘들다. 한번 뱉은 말은 거두어들이기 힘들다. 하다가 안되면 없던 일로 하자고 하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반드시 업으로 남는다. 언젠가 조건이 맞으면 업보를 받게 되어 있다.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마음에도 길이 난다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는다. 보고 듣는 것은 모조리 메모리창고에 저장된다고 했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럴 거라면 이왕이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들어야 한다. 나쁜 것을 보고 나쁜 것을 들을 필요가 없다. TV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는 안좋은 것도 있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드라마나 폭력영화 같은 것이다. 모조리 저장되고 지워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보면 손해일 것이다.

 

흑백TV시절 전설따라삼천리가 있었다. 주로 귀신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청소년 시절 저녁에 전설따라삼천리를 보면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흉측한 장면이 자꾸 연상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볼 필요가 없다. 조폭이 나오는 폭력영화도 그렇다. 야동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면 모두 저장되기 때문에 나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자주 하면 길이 나게 되어 있다. 악행도 그렇다. 살생을 자주 하면 살생이 일상화된다. 닭을 잡을 때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자주 잡다 보면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다. 살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인에 맛을 들여 놓으면 계속 살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도둑질도 처음에 어렵지만 자주 하게 되면 점점 대담해진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이다. 음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짓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주하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를 길이 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에도 길이 나는 것이다.

 

재가불자의 실천덕목 십복업사(十福業事)

 

이왕이면 좋은 길을 내야 한다.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 길이 날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큰 길이 난다. 십선행을 하면 길은 더욱 더 확장된다. 한번 길이 나면 다니기가 수월해진다. 비포장도로보다는 포장도로가 낫고, 일반도로보다는 고속도로가 훨씬 더 낫다.

 

십악행을 해도 길이 나고 십선행을 해도 길이 난다. 이왕이면 좋은 길을 내야 한다. 나도 좋고 남도 좋으면 좋은 길을 내는 것이다. 나도 이익이 되고 남도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면 좋은 길을 내는 것이다. 십복업사가 좋은 예이다.

 

재가불자의 실천덕목으로 십복업사(十福業事)가 있다. 열 가지 공덕이 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공덕은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이를 공덕행(puñña)이라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이다. 이런 공덕행에는 1)보시, 2)지계, 3)수행, 4)공경, 5)봉사, 6)공덕의 회향, 7)전수, 8)공덕의 성취에 대한 즐거운 회상, 9)가르침의 청취, 10)견해의 확립 이렇게 열 가지가 있다.

 

공덕행이 있다면 악행(pāpa)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고 타인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이익은 되지만 타인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악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악행은 십악행에서 언급되어 있는 1)살생, 2)투도, 3)사음, 4)망어, 5)양설, 6)기어, 7)악구, 8)탐욕, 9)진애, 10)사견 이렇게 열 가지를 말한다.

 

열 가지 공덕행, 즉 십복업사를 보면 세 번째 항에 수행이 있다. 재가불자라 하여 보시나 기도만 하지 않는다. 재가불자라도 성자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공덕, 지계공덕과 함께 수행공덕을 쌓아야 함을 말한다. 참고로 십복사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보시(dana)

보시하기 전에는 기뻐하고, 줄 때는 마음이 청정하며, 주고나서는 만족해야 함

 

2) (sila)

오계수지.

 

3) 수행(bhavana)

범부의 종성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기전까지 수행함.

 

4) 공경(apacayana)

나이가 많거나 덕이 있어 공양할 만한 사람, 혹은 스승의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명하고자 하는 의지.

 

5) 작무(봉사)(veyyavacca)

수행자나 성직자 혹은 연장자를 위해 여러가지 의무행을 하거나, 혹은 병자를 간호하고자 하는 의지.

 

6) 공덕의 시여(회향)(pattidana)

하나의 등불이 수 많은 등을 만들어 낼 수 있듯이, 다른 이에게 공덕을 주어도 자신의 복은 쇠퇴 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증대됨.

 

7) 공덕의 수희(pattanumodana)

질투하는 일 없이 함께 기뻐하는 의지.

 

8) 문법(聞法, dhammadavana)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청정한 마음에 의해 이익이 되는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의지.

 

9) 설법(dhammadesana)

이익이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숙지한 가르침이 해탈의 원인이 될 것을 목적으로 설법을 지속하는 자의 의지

 

10) 견정업(見正業, ditthijjukamma)

‘보시는 공덕이 있다’라는 등의 방식으로 발생한 정견에 의해 견해를 올바르게 하는 것.

 

 

길이 나면 그 길로 가게 되어 있다. 마음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쁜 생각을 자주 하면 길이 나서 계속 나쁜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한 것도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오솔길처럼 작은 길이지만 자주 행하다 보면 큰 길이 된다. 이왕이면 좋은 길을 내야 한다. 나도 이익이 되고 남도 이익이 되는 길이다. 십복업사가 좋은 예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은

 

나는 좋지만 남은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이는 좋지 않은 것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아야 좋은 것이다. 좋은 길을 내려면 좋지 않은 것을 보지도 말고 듣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몰라도 되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영화 삼사라를 보면 티벳승려가 환속하는 장면이 있다. 젊은 승려는 스승에게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영화속에서 승려는 한 여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삼년동안 동굴에서 명상수행을 했지만 대자유는 오지 않고 번뇌만 쌓인 것이다. 그래서 스승에게 포기하기 위하여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말한 간 것이다.

 

환속했던 승려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삶은 보통사람의 도덕적 수준에도 못미치는 것이었다. 결국 처자식을 버리고 재출가하게 된다.

 

영화속의 승려는 몰라도 될 것을 알고자 했다. 결혼생활을 하고 자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도 출가전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쩌면 따라 해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재출가 하게 되었다. 몰라도 될 것을 알고자 한 것이다.

 

깨달음에 길에 있어서 몰라도 되는 것은 알 필요가 없다. 포기하기 위하여 몰라도 되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가 감옥을 알기 위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남에게 좋지 않다면 좋지 않은 것이다. 최악은 나에게도 이익이 안되고 남에게도 이익이 안되는 것이다. 십악행을 하는 것이다. 최선은 나도 이익이 되고 남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십복업사가 대표적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것은 다 좋은 것이다.

 

 

2020-0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