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칼로 단번에
평화로운 아침이다. 설날을 보낸 다음 날은 평온해 보인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잠을 잘 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도 상황이다. 뉴스를 보면 이념이 서로 다른 집단간의 설전이 치열하다. 유튜브에서는 더 원색적이다. 아침에 이런 뉴스를 접한다면 세상은 결코 평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온해 보이는 것은 마음이 평온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대상에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엇을 쓸까나?
아침에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 왔다. 평일이나 주말, 명절이 따로 없다. 나와서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써야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이럴 경우 난감하다. “오늘은 무엇을 쓸까나?”라며 이리저리 생각해 보지만 마땅히 떠 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터넷뉴스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대상에 말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일이 생각났다.
설날 때가 되면 설날준비를 해야 한다. 차례준비를 하는 것이다. 먼저 집안청소를 했다. 비록 동생 한가족 밖에 오지 않지만 손님은 손님인 것이다. 낡고 작은 아파트 이곳저곳 물건 정리를 했다. 공간확보를 위한 것이다.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닦았다. 마지막으로 베란다 작은 창고에서 제기를 꺼냈다.
설날 이른 아침 동생가족이 도착하기 전에 준비작업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제기를 닦는 것이다. 제기는 커다란 박스에 담겨 있다. 끈으로 묶어 놓았는데 잘 풀려지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용을 써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제기박스를 풀면서 상윳따니까야 ‘매듭의 경’이 떠올랐다.
위대한 게송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말했다.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안으로 묶이고 밖으로 묶였네. 세상사람들은 매듭에 묶여 있네.”(S1.23) 말했다. 세상사람들은 안팍으로 묶였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꽁꽁 묶여서 살아 간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에 묶였다는 것일까?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주석에 따르면 세상사람들은 갈애(taṇhā)에 묶였다고 했다. 안팍의 갈애로 묶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말한다. 또는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을 말한다. 이렇게 갈애로 인하여 안팍으로 꽁꽁 묶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매듭을 풀 수 있을까?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고따마께 여쭈니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인가?”라며 물어본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한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이 게송은 한마디로 위대한 게송이라고 볼 수 있다.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다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게송으로 활용되고 있다. 청정도론은 이 게송에 대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생의 수행공덕으로
지혜로운 수행승이 매듭을 풀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것은 ‘지혜를 갖춘 자(naro sapañño)’를 말한다. 여기서 사빤냐(sapañña)는 한자어로 유지혜자(有智慧者)를 말한다. 지혜를 구족한 자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태어날 때 부터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한다. 한자어로 말한다면 ‘생이지자(生而知者)’이다. 학습에 의해 지혜가 생겨나는 학이지자(學而知者)와는 다른 것이다. 전생에서부터 수행을 한 사람을 말한다. 전생의 수행공덕을 타고 난 자가 사빤냐인 것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확인된다.
청정도론에서는 사빤냐에 대하여 “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이다.”(Vism.1.7)라고 정의해 놓았다. 이에 대하여 한역에서는 ‘업생삼인결생혜(業生三因結生慧)’라고 한다. 무탐, 무진, 무치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 선업의 과보로 생겨난 이숙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생에서 한수행하는 사람은 전생에서 한수행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혜를 타고난 자, 사빤냐는 전생의 수행공덕으로 이 생에서 지혜를 타고 난 자이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계행을 지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계행을 확립하고(sīla patiṭṭhāya)”라고 했다. 현생에서도 계행이 굳건히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계행은 선정과 지혜의 바탕이 된다. 현생에서 안팍으로 얼키고 설킨 매듭을 풀려면 계, 정, 혜 삼학의 바탕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가족이라는 속박
묶여 있으면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매우 강력한 묶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족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Dhp.345)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죄수에게 채워져 있는 족쇄는 언제든지 칼로 자를 수 있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자를 수 없다. 쇠붙이 보다 더 강한 족쇄가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또 이런 게송이 있다.
“어머니를 오두막이라 부르고
아내를 보금자리라 부르고
자식을 매듭이라고 부르고
갈애를 얽매임이라고 부르네.”(S1.19)
어머니, 아내, 자식은 가족의 구성원이다. 어머니를 오두막이라고 하고, 아내를 보금자리라하고, 자식을 매듭이라고 했다. 왜 이런 비유를 했을까? 빅쿠보디가 번역한 영역본에는 이를 설명한 각주가 있다. 영역각주를 우리말로 번역해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천신은 누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열 달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작은 오두막으로서의 누군가의 어머니를 언급하고 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친 남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작은 둥지와 같다. 마치 새들이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아 다닌 후에 둥지에서 밤을 보내는 것처럼 남자들은 동반자로서 여자들에게 의지한다. 아들들은 가문의 혈통을 연장하기 때문에 선을 연장하는 것(santanaka)으로 본다. 이와 같은 갈망은 속박하게 만든다. 부처님은 결코 어머니의 자궁이나 아내를 부양하는 것, 아들을 낳는 것 등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빅쿠보디 각주를 보면 오두막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고, 보금자리는 아내를 뜻하고, 매듭은 자식을 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속박은 자식이다. 자식을 매듭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매듭은 갈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속박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으로 내게는 오두막도 없고 참으로 아무런 보금자리도 없네. 참으로 나는 매듭도 없고 참으로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났네.”(S1.19)라고 게송으로 말했다
엉켜진 대나무 뿌리처럼
얽매여 있으면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사람이 살지 않는 심산유곡에서 홀로 살아 가야 할까? 홀로 산다고 해도 번뇌가 끊이지 않는다면 매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지혜로운 자는 이런 매듭을 풀어 버린다.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것처럼 갈애로 인하여 안팍으로 꽁꽁 묶인 것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을까? 부처님은 계학과 정학, 혜학 이렇게 삼학을 갖춘 슬기로운 수행승이 매듭을 풀 수 있다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사람이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가 엉킨 것을 잘라내듯, 수행승은 계행 위에 서서 집중의 돌로 잘 갈아진 통찰적 지혜라는 칼을 잡고, 정진의 힘에 의해 발휘된 실천적 지혜의 손으로, 갈애의 얽힘을 자르고 부수어버린다.”(Srp.I.50)라고 했다. 이와 같은 주석은 청정도론과 병행한다. 이는 붓다고사가 주석한 이유도 있다.
주석을 보면 대나무가 엉켜 있다고 했다. 숫따니빠따에서도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으니,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듯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Stn.38)라고 했다. 대나무는 땅위에서 보다 땅 밑에서 더 많이 엉켜 있다. 대지를 모태로 하는 식물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다. 땅위에서나 땅 밑에서나 엉켜 있는 것이다. 이는 대나무뿐만은 아닐 것이다. 인도나 미얀마 등 아열대 지방에 에서는 가지가 서로 엉킨 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갈애로 얽힌 것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혜의 칼로 단번에
매듭이 졌을 때 순리대로 하나씩 하나씩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얽히고 설켰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질 급한 사람은 한칼에 베어 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갈애에 따른 번뇌도 한칼에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밧줄과 가죽끈을 자르고 사악한 욕망과 탐욕을 부수고”(S1.29)라는 게송에서도 확인된다. 주석에 따르면 “밧줄은 과거의 분노나 미래의 원한을, 가죽끈은 남아 있는 번뇌를 말한다.”(Srp.I.53)라고 했다. 분노와 번뇌를 단칼에 베어 버린다는 것이다.
아무나 번뇌의 원인인 갈애를 베어 버릴 수 없다. 계행에 바탕을 두고 선정을 닦은 지혜로운 자만이 매듭을 벨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Vism.1.7)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지혜의 칼로 단번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수행자는 무사(武士)와도 같다. 무사가 무술수업을 할 때 우선 몸과 마음을 닦는다. 그리고 수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이끌어낸 사츠마번 무사들은 하루에 통나무치기를 만번했다고 전한다. 통나무에서 연기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내려베기를 특징으로 하는 사츠마 특유의 지겐류(示現流)검법을 말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입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사츠마무사들은 이와 같은 내려베기기술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승들 역시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경행을 할 때 한발 들고 옮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집중이 된다. 그래서 경행을 행선(行禪)이라고 한다. 집중되었을 때 지혜가 나온다. 수행승이 계행이라는 땅위에서 굳게 서서, 선정이라는 돌에 갈은 지혜의 칼을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자신의 안팍에 얽히고설켜 있는 매듭을 단칼에 베는 것이다. 매듭은 풀기보다는 베어 버리는 것이 빠를 때가 있다.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지혜로운 자가 매듭을 풀 수 있다. 그것도 단번에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유지혜자를 뜻하는 ‘나로 삼빤뇨’라는 말은 ‘자야망갈라가타’에도 서 들은 바 있다. 매일 듣는 이미우이음악이다.
자야망갈라가타에서 유통분이라고 볼 수 있는 아홉번째 게송을 보면 “이 부처님의 승리의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 옵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슬기로운 자는 ‘naro sapañño’를 번역한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를 보면 ‘매듭의 경’에 실려 있는 ‘나로 삼빤뇨’가 그대로 실려 있다. 슬기로운 자 또는 지혜로운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함께 하는 자를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했을 때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는 해탈과 지복을 얻을 것이다.(Hitvān a neka-vividhāni cupaddavāni Mokkhaṃ sukhaṃ adhigameyya naro sapañño)” 라고 했다.
“정신-신체적 과정과 감각적 저촉과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지각마저
남김없이 부서지는 곳에서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S1.23)
2020-01-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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