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늘 점심은 군고구마 두 개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 15:07

 

오늘 점심은 군고구마 두 개로

 

 

차분한 일요일이다. 뉴스를 보지 않으니 세상이 조용한 것 같다. 인터넷으로 제목만 보아도 대충 돌아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일에 너무 가까이해서도 안되고 너무 멀리 해서도 안된다. 세상사에도 불가원불가근(不可遠不可近) 원칙이 적용된다.

 

일요일임에도

 

일요일임에도 사무실에 나왔다. 사무실은 일하는 공간이자 글 쓰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명상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작은 오피스텔이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임대료와 관리비, 인터넷 등을 합하면 하루 2만원 꼴이다.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 밤낮으로 주말없이 풀가동하는 것이다.

 

요즘 주오일제라 하지만 자영업자들은 주오일제는 없는 것과 같다. 일이 있으면 주말을 가리지 않는다. 일감이 있으면 토요일과 일요일을 활용한다. 평일과 달리 차분하다.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조금씩 시간내서 해 놓으면 어느 순간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본다.

 

일요일 오전 밀린 작업을 했다.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았으나 잠시 쉬었더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난이도가 매우 높은 작업이어서 처음에는 못할 것 같았다. 담당자에게 난감을 표시했지만 잘못 대응한 것임을 알았다. 관련분야의 프로페셔널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해내야 한다. 마침내 해법을 찾아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군고구마 두개로 점심을

 

점심시간이다. 일감이 있는 날은 힘을 써야 되기 때문에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이 없는 날에는 오천원이하 점심원칙을 지킨다. 일이 상쾌하게 마무리됐지만 점심을 소박하게 하기로 했다. 며칠전 봐 둔 편의점의 군고구마가 생각났다.

 

대로 건너편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이라고 해서 모두 찐빵이나 군고구마를 파는 곳이 아니다. 파는 곳만 판다. 길 건너 대로에 있는 편의점에서는 찐빵도 팔고 군고구마도 팔았다. 점심을 군고구마로 해결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두 개를 샀다. 한 개에 1700원이니 두 개이면 3400원이다.

 




군고구마 두개로 점심을 때웠다. 달달하고 고소한 것이 꿀고구마를 군 것 같다. 꿀고구마 맛을 알고 있다. 해남으로 귀촌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로부터 매년 한박스 사다 먹기 때문에 맛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맨입에 먹으려 하니 입이 심심했다. 김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곁들일 것이 없다. 군고구마 자체는 달달하고 고소하고 맛이 있지만 무언가 심심하고 허전했다. 각종 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로

 

사람들은 맛에 대한 갈애로 사는 것 같다. 식사를 하면 이것저것 반찬이 많은데 집어먹을 것이 많다는 것은 맛에 대한 갈애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겨 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에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agaññasutta)’(D27)이 있다. 경에 따르면 성겁기(成劫期)에 한 존재가 있었다. 텅 빈 세상에 홀로 발생한 그 존재는 어느 날 땅조각 맛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D27.7)라고 되어 있다. 처음으로 맛 본 것에 대하여 갈애가 엄습했다고 표현 했는데 주석에 따르면 혀 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났다.”(Smv.865)라고 설명해 놓았다.

 

혀에는 칠천개의 미각세포가 있다고 했다. 이는 칠천개에 대한 맛에 대한 갈애가 있음을 말한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맛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한번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나면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가 집착이 되어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을 보면 이와 같은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 났다고 설명해 놓았다.

 

한존재가 땅조각을 맛보자 스스로 빛나던 광명은 사라지고 해와 달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를 하면 할수록 몸은 점점 추해져 갔다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아름답던 몸은 점점 거칠어지고 용모도 추해져 간 것이다. 그래서 잘 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이 맛! , 이 맛!”

 

먹방채널을 보면 맛에 대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드는 것은 기본이다.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눈으로만 볼 뿐 먹어 보지 않아서 그 맛을 알 수 없다. 방송에서는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최고의 맛임을 알게 해 준다.

 

맛을 본 자들은 바로 이 맛이야!”라며 과도한 액션을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기경전을 보면 이런 상황이 그대로 나와 있다는 사실이다. 경에 따르면 지금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아주 맛있는 것을 얻으면 , 이 맛! , 이 맛!’이라고 말한다.”(D27.8)라고 했다. 이는 그 땅조각 맛을 못잊어서 맛에 대한 갈애로 하는 말이다. 누군가 바로 이 맛이야!”라며 엄지척을 한다면 그는 맛에 대한 갈애에 속박된 자라고 볼 수 있다.

 

맛에 대한 갈애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는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남자와 여자의 성이 구별되었다고 한다. 땅조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쌀에 맛을 들이자 사람들은 점점 더 추해졌고 마침내 남자와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 성이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쌀로 인하여 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쌀을 훔쳐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를 법으로 다스릴 사람을 뽑은 것이다. 무사계급이 출현한 것이다. 이렇게 쌀로 인하여 사성계급의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출현하고, 남자와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네 가지 계급이 생겨난 것은 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겁기에 최초로 나타난 자가 땅조각을 맛보면서 오늘날 온갖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치 바이블에서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 맛에 대한 갈애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다르다.


 

기쁨(pīti)을 음식으로

 

맛에 대한 갈애로 세상이 생겨나고 남녀가 생겨나고 계급이 생겨났다. 맛에 대한 갈애가 없다면 세상도 생겨나지 않고 남녀도 생겨나지 않고 계급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경에 따르면 선정의 세계와 같다. 선정을 닦은 과보로 색계에 태어나는데, 색계에서는 몸이 깃털차럼 가벼워 날아 다닌다. 몸에서는 빛이 난다. 몸이 가벼우니 거친 몸이 아니다. 내장도 없고 소화기관도 없다.

 

색계존재는 무엇을 먹고 살까? 경에 따르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D27.5)라고 했다. 이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ābhassara)’에 사는 신이라고 했다. 한역으로 극광천 또는 광음천을 말하며 수명은 8겁이고 색계 2선천에 사는 존재들이다.

 

색계에 사는 존재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당연히 음식에 대한 갈애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음식 대신에 기쁨(pīti)을 먹고 산다고 했다. 기쁨도 음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선정을 구성하는 한요소이다. 흔히 심, , , , 정이라고 말하는데 희를 말한다. 기쁨은 두 번째 선정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요소이다. 그래서 색계 2선천에서는 기쁨을 먹고 산다고 하는 것이다.

 

기쁘면 배고픈 줄 모른다. 색계의 존재가 그렇다. 그들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빛나고 소화기관도 없다. 당연히 생식기도 없다. 그래서 색계존재는 남녀 구분이 없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갈애가 없으니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리는 것도 없다. 맛에 대한 갈애가 없다는 것은 오로지 선정의 기쁨만 있는 것과 같다.

 

위빠사나로 먹기

 

군고구마 두 개로 점심을 때웠다. 고구마 자체는 맛이 있지만 일체 다른 먹거리가 없어서 입이 허전했다. 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갖가지 먹거리가 있다. 수천수만가지 재료에 수천수만가지 레시피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다름 아닌 맛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천수만가지 요리법이 있다. TV에서는 먹방을 경쟁적으로 방영한다. 사람들은 맛에 대하여 , 이맛! , 이맛!”하며 엄지척하거나 과도한 액션을 한다. 시청자들은 남이 먹는 것을 즐겨본다.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맛에 대한 갈애를 하면 할수록 몸은 점점 거칠어지며 점점 추해질 것이라고 했다. 또 맛에 대한 갈애는 잘생긴자와 못생긴자로 점차 구별되어서 서로 차별한다고 했고 남녀가 서로 끌리는 요인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맛에 대한 갈애는 계급이 생겨나는 요인이 된다고 했다.

 

한번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칠천개의 미각세포를 자극한다고 했다. 반찬가지수가 많으면 집어먹을 것도 많고 먹는 즐거움도 주지만 맛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갈애가 강화되어 집착이 되고, 집착은 업으로서 태어남을 유발한다. 십이연기가 회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선원에서는 알아차림 하면서 먹으라고 했다. 이른바 위빠사나로 먹기에 해당된다. 맛에 대한 갈애는 연기를 회전시켜 윤회하는 동력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점심시간에 아무 반찬 없이 군고구마 두 개를 먹었다. 고구마 자체는 맛이 있었지만 반찬이 없어서 심심하고 허전했다. 그동안 이런 저런 맛에 길들여져 있어서 맛에 대한 강한 갈애를 느꼈다.

 

 

2020-02-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