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각자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각자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견해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각자 견해가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종교에도 견해가 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는 ‘견해상윳따(diṭṭhisaṃyutta, S24)’라고 하여 별도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 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십지경이 있다. 대승경전인 화엄경의 오리지널에 해당된다. 책을 열면 서시에 송출자는 “세상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체지자에 의해 열 단계 지평이 설해졌으니,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버려지고 티끌 없는 중도가 선설되었습니다.”라고 게송으로 노래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라는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으뜸 가는 가르침인지 모른다.
닷사나(正見)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라고 한다. 여기서 사사나(sāsana)라는 말은 ‘teaching; order; message; doctrine’의 뜻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명령(order) 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은 붓다의 명령과도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부처님의 명령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닷사나(dassana)라고도 한다. 이를 정견(正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닷사나가 바른 견해일까? 이는 닷사나는 ‘sight’의 뜻으로 ‘본다(見)’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 ‘insight’라고 한다. 내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닷사나라는 말은 본래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도 등장하는 이 말은 우리말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뜻한다. 한자어로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빠알리어 야타부따는 ‘있는 그대로’의 뜻이고, 냐나는 ‘knowledge’로 아는 것을 말하며 지(知)라고 한다. 또 닷사나는 ‘sight’로 보는 것을 말하며 견(見)이라고 한다. 이처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 如實知見)이라고 한다. 줄여서 야타부따닷사나(yathābhūtadassana: 如實見)이라고 하고, 더 줄이면 닷사나(dassana: 見)가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엄밀히 따지면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육사외도 등 외도의 견해와 다른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얻은 견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온의 생멸현상을 관찰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연기법적으로 관찰하여 얻은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야타부따냐나닷사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무상정등정각과도 관련이 있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라고 선언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無上正等正覺)’은 ‘있는 그대로 알고 봄(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하고 빠알리어로는 닷사나라고 한다.
딧티(邪見)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도 견해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닷사나 dassana: 見)라고 하고, 외도 스승의 가르침은 딧티(diṭṭhi: 見)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외도의 가르침이나 똑같이 견(見)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닷사나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 견해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정견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견을 가진 사람(diṭṭhisampanna)’에 대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형성된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안다.”(M115)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현상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아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태도이다. 그러나 외도와 일반사람들은 반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보통의 일반사람은 어떤 형성된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M115)라고 했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사견은 어떤 형성된 것에 대하여 영원하고, 즐거운 것이고,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사견을 가졌을 때 어떻게 될까?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다. 열번째항을 보면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라는 문구가 있다. “어리석어 지은 죄 지금 참회합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치암(癡暗)이라는 말은 어리석음과 어두움의 뜻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대강백이라 일컫는 스님의 천수경 해설을 보아도 단지 어리석음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검색해 보아도 치암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십악의 열번째 항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그 모두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이와 같이 안다면, 올바로 아는 것이다. 만약에 달리 안다면, 그는 잘못 아는 것이다.” (M136)
니까야에 실려 있는 열 가지 악행은 천수경 십악참회문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열 번째 항목을 보면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이라고 하여 치암중죄가 사견임을 알 수 있다.
잘못된 견해를 밋차딧티(micchādiṭṭhi)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wrong view’ 라고 한다. 또 다른 뜻으로 ‘heretical’라고 하는데 ‘이단’의 의미가 있다. 빠알리어 밋차는 ‘untruth; falsehood’의 뜻이다. 그래서 밋차딧티는‘잘못된 견해’ 또는 ‘삿된 견해’가 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때 잘못 보게 되기 때문에 모두 사견이 된다. 그런데 사견을 가지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M136)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와 같은 사견에 빠지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특히 허무주의에 대하여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M41)라고 했다.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열 가지 전도가 생김을 말한다.
사견을 가지면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은 모두 사견이 된다.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견을 가지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사람이 한번 견해에 빠지면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잘못된 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주욱 가다 보면 악처에 떨어지는데 니까야를 보면 놀랍게도 오역죄를 저지른 자들과 동급이 된다는 것이다.
오역죄가 있다. 부모를 살해하는 등 극악무도한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이를 오무간죄라고도 한다. 한우주기 동안 사이지옥에 갇혀서 어둠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역죄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니까야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맛지마니까야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이 바로 그것이다.
경에서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에 대하여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M115)라고 했다. 정견을 가진 자들은 부모를 살해하거나 아라한의 목숨을 빼앗거나,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거나, 승가를 분열시키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도나 일반사람들은 “보통의 일반 사람이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있을 수 있다.”라고 했다.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오역죄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 있다. 그것은“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와 같은 내용이다. 정견을 가진 자는 외도 스승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경에서는 사견에 대하여 오무간죄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역죄가 아니라 육역죄가 되고, 오무간업이 아니라 육무간업이 된다.
사상의 세탁
초기경전에서 부처님과 외도가 대화하는 장면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외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화되어서 구족계를 받고자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네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었다. 이는 “밧차여, 예전에 이교도였던 사람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 원하면, 그는 넉 달 동안 시험 삼아 머물러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나 수행승들이 그에게 만족하면, 그들은 그에게 출가를 허락하고 수행승임을 인정하는 구족계를 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서 개인간의 차별을 인정합니다.”(M7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일반사람들에게는 사계월의 유예기간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는 다름 아닌 견해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에게는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사계월이라는 유예기간을 거치지 않는다. 그러나 외도 스승의 견해에 물든 외도 수행자에게는 ‘사상의 세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상의 물이 빠질 때까지 사계월 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견해가 모두 비워졌을 때 구족계를 준 것이다.
눈 먼 자의 뒤를 따르는 것처럼
누구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대개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기 쉽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기의 발생과 소멸을 알면 견해는 무너진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것을 보면 허무주의는 무너지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을 보면 영원주의는 무너진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닷사나라고 하는데 정견이라고 한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딧티라고 하는데 사견이라고 한다.
사견에 빠지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보게 된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외도들의 견해는 장님들의 견해와 같다. 부분만 알고 전체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들은 전체를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정견이다. 외도의 가르침은 부분만보기 때문에 견해가 된다. 이렇게 부분만 보는 것에 대하여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현상을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는 시기에 본다.
이른바 종말론에 근거한 외도의 견해는 모두를 공멸로 이끌어 간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의 뒤를 역시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들이 따라 가는 것 같다. 사견에 빠져 있으면 눈 먼 자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다.
“바라드와자여,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바라드와자여, 모든 성직자들이 설한 것은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M95)
2020-02-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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