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면 그대로 비추는 담마다사(法鏡)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서명한다. 연월일이 기입된 날짜와 함께 사인하는 것이다. 2006년부터 글을 쓴 이래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때당시 교계신문에서 어느 스님의 칼럼을 보고 나서부터 습관이다. 스님은 칼럼을 마칠 때 날짜와 함께 서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보기 좋아서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다. 이렇게 서명하는 것은 무엇보다 글에 대한 책임이다.
과거에 개발자로 살았다. 셋톱박스를 20년동안 개발했다. 회로설계에서 부터 양산지원에 이르기까지 하드웨어 담당이었다. 지위가 있었어도 직접개발에 참여 했다. 이렇게 끝까지 개발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습득한 기술로 먹고 살고 있다. 지금은 기능에 지나지 않지만 개발의 주요한 파트중의 하나인 인쇄회로기판설계업(PCB)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개발은 도제식이다. 선배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처음에는 개발보조원부터 시작한다. 선배가 작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가 하면 청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때 선배로부터 들은 것이 있다. “개발자는 개발제품에 대하여 무한책임이 있다.”라는 것이다. 한번 개발 된 것은 끝까지 책임 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있으면 수정보완해야 한다. 개발제품은 마치 새끼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개발제품은 개발자의 얼굴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면 즉시 바로잡아야 함을 말한다.
글을 쓸 때도 무한책임의 자세로 쓰고 있다. 오래전에 쓴 글이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즉각 수정에 들어간다. 글은 자신의 얼굴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글을 쓰고 나면 날짜와 함께 반드시 서명한다.
서명을 하면 글을 함부로 쓸 수 없다. 거친표현이나 욕설 등 정어(正語)에 어긋나는 구업을 지을 수 없다. 또한 가르침을 왜곡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경전문구와 함께 주석을 인용하는 이유이다. 마치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쓰는 것이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얼굴에 잡티가 있다면 액면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경전문구를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유포한다면 이는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담마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것이 되어 버된다. 담마가 왜곡되고 외도사상에 오염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 담마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치 성형하여 본모습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법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해석한다. 경전을 해석해 보니 이제까지 전승된 주석이나 논장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2차 결집이 일어나기 이전, 즉 부처님 사후 백년가량의 제1차 결집본만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논장은 재3차 결집때 정리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주석도 논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 만을 유포한다. 그 결과 나마루빠(nāmarūpa: 名色)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우파니샤드방식늬 해석이다. 그러다보니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해석한 것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경전적 근거가 있음에도 부인한다. 후대에 조작되고 삽입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될까?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보일 것이다.
거울은 얼굴을 액면 그대로 보여준다. 가르침의 거울 또는 담마의 거울, 법의 거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마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알 수 있다.
법명은 담마다사(Dhammadasa)이다. 빠알리 법명이다. 2018년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삼장법사에게 받은 것이다. 법사는 ‘법의 거울로 비추어 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했다. 2004년 도심포교당에서 ‘성인을 공양하라’는 뜻을 가진 ‘성공(聖供)’이라는 법명을 받은 이래 14년만의 일이다.
글을 쓸 때는 빠알리법명과 함께 실명으로 서명한다. 글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담마다사라는 말을 맛지마니까야에서 발견했다. 경에서는 “그렇다면 아난다여, 이 법문을 ‘다양한 종류의 세계’라고 새겨라. 또한 ‘네 번 굴림’이라고 새겨라. 또한 ‘가르침의 거울’이라고 새겨라. 또한 ‘불사의 북’이라고 새겨라. 또한 ‘전장에서 위없는 승리’라고 새겨라.”(M115) 라고 되어 있다.
경의 제목은 ‘다양한 종류의 세계의 경’(M115)’이다. 빠알리어로는 바후다뚜까숫따(Bahudhātukasutta)이다. 경의 말미에는 경의 제목을 이렇게 지어라고 알려 주고 있다. 또 네 가지 부제목을 이렇게 지어라고 알려 주고 있다. 그 네 가지 부제는 ‘네 번 굴림(catuparivaṭṭa)’, ‘가르침의 거울(dhammadasa)’, ‘불사의 북(amatadundubhi)’, ‘전장에서 위없는 승리(anuttaro saṃgāmavijayo)’이다.
부제 중의 첫 번째인 ‘네 번 굴림’은 경에서 설한 네 가지 키워드, 즉 세계(dhatu: 界), 영역(āyatana: 處), 연기(paṭiccasamuppāda: 緣起), 가능과 불가능(ṭhānāṭṭhāna: 處非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래서 첫번째 부제로서 ‘네번 굴림(catuparivaṭṭa)’이라고 한 것이다.
네 가지 키워드인 법의 거울은 마치 삼법인처럼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거울을 쳐다볼 때 얼굴모습이 액면 그대로 드러나듯이, 이 법문을 볼 때 세계 등 네 가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부제로서 ‘법의 거울(dhammadasa)’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 등 네 가지를 알면 불사가 될 것이다. 불사이면 불생이 된다. 불생불사가 되는 것이다. 마치 군인들이 전승을 알리는 북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악하고 불건전한 오염원과 싸우는 수행자가 마침내 오염원들을 물리쳤을 때 “불사의 북을 두드리라.”(M26)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 번째 부제로서 ‘불사의 북(amatadundubhi)’라고 했을 것이다.
불사의 경지에 이르면 승리자가 된다. 마치 전장에서 군인들이 적의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하듯이, 수행자는 자신의 오염원들과 싸워서 마침내 승리했을 때 위없는 승리자가 된다. 위없는 승리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서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M26)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네 번째 부제로서 ‘전장에서 위없는 승리(anuttaro saṃgāmavijayo)’라고 했을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담마다사를 발견했을 때 쾌재를 불렀다.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살았다. 무엇보다 법명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법의 거울이다. 삼법인이 불교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법의 도장이라면, 담마다사는 법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법의 거울인 것이다. 왜곡된 것에 대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 연기 등과 같은 근본가르침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비추면 보인다. 그것도 액면 그대로 보인다. 어떻게 왜곡되고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보인다. 담마다사라는 법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20-02-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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