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는 사람들 무지개를 쫓는 사람들
한때 행복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방송에서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어떤 방송인은 ‘행복전도사’라고 했다. 그런데 행복바이러스를 전파하고자 했던 방송인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이후 행복이라는 말이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대신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방송에서는 힐링전도사들이 출현했다. 불교계에서도 힐링으로 유명해진 스님들이 등장했다. 힐링 다음은 무엇일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 행복의 스펙트럼은 넓다. 오욕락에서부터 선정의 행복, 그리고 궁극적으로 열반의 행복에 이르기까지 폭이 매우 넓다. 우리는 이중에 어떤 행복을 추구할까? 대부분 오욕락의 행복이기 쉽다.
부자가 되는 것을 행복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학문을 이루어 명예를 얻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출마를 해서 권력을 거머 쥐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수행자라면 깨달음을 행복이라 여길 것이다. 각자 나름대로 바라는 것이 있다.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느낌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언가를 성취하여 행복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일시적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행복한 상태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마치 파랑새를 찾아 가듯이, 마치 무지개를 쫓아 가듯이 영원히 변치 않는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없다. 단지 행복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일시적인 행복이다. 그래서 불만이다. 불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념의 노예가 되었을 때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이런 말이 들어간 노래가 있다.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한 조건임을 말한다. 추상명사에 불과한 말을 목적으로 삼았을 때 파랑새를 쫓는 것과 같고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이상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올인하는 삶을 살았을 때 이념에 갇힐 수 있다. 실체도 없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이상으로 삼았을 때 양극화로 인하여 자유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삼았을 때 독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평등한 세상이 될 수 없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을 때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스트레스 받을 것이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잠을 자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잠은 달아나 버린다. 행복도 그렇고 자유, 평등, 평화, 정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이데올로기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면 그는 망상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음지상주의자가 되었을 때 망상속에서 사는 것이 될 수 있다. 실체가 없는 허상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W스님의 아바타송
유튜브에서 W스님의 출가이야기를 보았다. 불교TV(BTN)에서 제작한 것이다. 스님은 본마음과 참나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던 때가 2004년도이다. 그때 불교방송을 열심히 들었다. 매일 아침 W스님의 불교이야기도 열심히 들었다. 게시판에 글을 올렸을 때 ‘달빛산호’라는 필명으로 답신을 해 주기도 했다. 이후 스님은 승승장구했다. 스타스님이 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서 선원을 만들고 절을 지었다.
이번에 새롭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바타’에 대한 것이다. 스님에 따르면, 우리는 본마음과 참나의 아바타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본마음과 참나로 간다고 했다. 법문도 세월에 따라 진화하는 것 같다. 본마음참나에서 아바타까지 온 것이다. 이를 요약하여 게송을 만들었는데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중의 진리는 사성제,
도중의 도는 팔정도,
팔정도 핵심은 내비도,
내비도 비결은 바라봐,
바라보고 바라봐,
아바타로 바라봐,
몸도 아바타,
마음도 아바타,
나도 아바타,
너도 아바타,
우린 모두 아바타, 야!”
게송을 보면 먼저 사성제와 팔정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아바타를 말하기 위하여 전제하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아바타를 주장하더라도 불교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바타는 브라만교와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이 떠오른다.
부처님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우리모두가 창조주이자 절대신이고 세상의 근원이고 모든 것을 있게 한 것을 브라흐마(Brahma: 梵天)라고 했다. 이런 브라흐마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브라만교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브라흐마의 분신이라고 했다. 이를 아뜨만(atman)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뜨만은 개별적 자아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교와 브라만교에서 환골탈태한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브라흐마의 분신이기 때문에 합일하면 브라흐마가 된다고 한다. 범아일여는 인도우파니샤드 철학이다. 우주의 근본인 브라흐마와 개인의 중심인 아트만이 궁극적으로 같다는 사상을 말한다.
W스님은 본마음참나를 넘어서 이제 우리가 아바타라고 한다. 그래서 “몸도 아바타, 마음도 아바타, 나도 아바타, 너도 아바타, 우린 모두 아바타, 야!”라고 했다. 이 가사를 마치 힙합 노래하는 것처럼 박수치며 간단한 율동과 함께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를 ‘아바타송’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본래불의 아바타라는데
W스님은 우리가 본래부처임을 강조했다. 본래 부처인데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이를 달에 비유했다. 달은 본래 보름달이지만 가려져서 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데 이를 망각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본래 부처인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선종에서 하는 말이다.
선종에서는 우리는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부처인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인데 깨달은 존재임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이 깨달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선종에서 말하는 본래불은 파격적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런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국불교화 되면서 나온 것이다. W스님은 여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여 우리는 아바타라고 했다.
W스님은 방송에서 본마음참나를 입에 달고 다녔다. 십수년만에 본 스님은 이제 아바타를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은 아바타를 부처님의 분신 또는 화신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분신이거나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브라흐마와 아뜨만과의 관계와 매우 비슷하다.
스님에 따르면 아바타(avatar)라는 말은 본래 불교용어라고 했다. 스님은 금강경에서 계속하고 있는 소리가 이소리라고 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래불의 아바타라는 것이다.
아바타라는 말은 영화 아바타를 연상케한다. 그러나 아바타라는 말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비쉬누의 열 가지 화신(avata)을 연상케 한다. 열 가지 화신은 ①물고기(Matsya), ②거북이(Kurma), ③멧돼지(Varāha), ④인사자(人獅子:Narasiṁha) ⑤난쟁이(Vamana), ⑥영웅 빠라슈라마(Parashurama), ⑦라마(Ramā;Ramāchandra), ⑧ 목동의 신 끄리슈나(Kṛṣṇa), ⑨붓다(Buddha), ⑩ 예언자적인 구제자 깔낀(Kalkin)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비쉬누의 아홉 번째 아바타로 들어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를 진화론적으로 보면
유튜브에서 ‘이단의 뿌리’라는 동영상을 보았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도 이단에 속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조금이라도 원칙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하여 단죄하려 하는 것이다. 가장 심한 것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종말론이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어쩌면 이단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이단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의 이단에도 생각해 보았다. 불교에도 이단은 없을까? 기독교 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난 것도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볼 수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유아론’이다. 이는 다름아닌 아뜨만 사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본마음참나를 말하는 것도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본래 본래불사상은 초기경전에 보이지 않는다. 아뜨만을 연상케 하는 아바타론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본마음, 참나, 본래불, 아바타라는 말이 방송을 타는 것은 관대하기 때문이다. 이를 불교진화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불교는 부처님 열반 이후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불교를 진화론적으로 보면 큰 문제가 발생된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불완전한 것이고 미완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본래불사상이 나왔고 마침내 아바타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불교진화론적으로 본다면 경전은 계속 편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는 경전이 계속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 적합한 경전이 나와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되었을 때
W스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마음참나의 아바타라고 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줄 모르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깨달음을 강조한다.
어떤 이는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불교의 목적을 깨달음으로 보면 많은 문제가 발생된다.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는데 아무리 해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될까? 아마 좌절하고 실망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선방에서 10년을 보냈지만 깨닫지 못해서 방황했다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과 말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목적으로 삼는다면 마치 파랑새를 찾고 무지개를 찾는 것과 같다. 구호에 지나지 않은 개념에 집착했을 때 이념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수행한다면 실망하기 쉬울 것이다. 마치 행복을 목적으로 사는 것과 같다. 행복은 삶에 있어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수단에 불과한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 때 괴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불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여 목적으로 삼았을 때 괴로운 삶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깨달음은 마치 자유, 평등, 평화, 행복과 같은 개념이어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구호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시된다. 행복하려거든 행복한 삶을 살면된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거든 정의로운 삶을 살면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이루려거든 청정한 삶을 살면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초기경전 어디를 보아도 깨달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 직전에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D16.124)라고 하여,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라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또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수밧다에게는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없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없습니다.”(D16.12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어디에도 ‘본래불을 깨닫는’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깨달음을 불교의 목적으로 할 수 없다. 깨달음을 불교의 목적으로 한다면 이는 이념을 구호로 하는 것과 같다. 실체도 없는 구호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야기한 것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다. 본래불을 깨닫는 것과는 다르다. 이를 빠알리어로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라고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다. 청정한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마치 행복한 삶을 살면 행복이 따라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팔정도의 삶이다. 그래서 수밧다에게 첫 번째도 팔정도이고, 두 번째도 팔정도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도 팔정도라고 했다. 여기서 첫번째 팔정도는 수다원을 말하고, 두번째 팔정도는 사다함을, 세번째는 아나함을, 네 번째는 아라한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은 한번에 성취되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성취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라고 말씀했다.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는 것이다. 처음 견도의 단계가 있다. 이를 수다원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로 표현된다. 이를 수다원의 오도송이라고 한다.
최후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이는 아라한선언으로 알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살아 오염원이 모두 소멸된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S56.11)라고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청정한 삶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S56.11)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최후로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124)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파랑새를 찾는 사람들 무지개를 쫓는 사람들
행복은 행복한 삶을 살면 이루어진된다. 정의로운 세상은 정의로운 삶을 살면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은 청정한 삶을 살면 이루어진다. 거룩한 삶을 살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이치와 같다.
구호에 불과한 이념에 매몰되어 산다면 파랑새를 찾는 것과 같고 무지개를 쫓는 것과 같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있는 것이다.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이다.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되는 오염원을 하나씩 제거하는 삶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청정한 삶(Brahmacariya)’이 되어야 한다.
“싸끼야 족에서 태어난
조건에 불과한 말을 인생의 목표
견줄 수 없는 깨달은 님,
그는 삿된 견해를 뛰어넘는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Thig.192)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지멸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Thig.193)
“나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에 기뻐하며 지냈다.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ig.194)
“모든 곳에서 환락은 파괴되고
어둠의 다발은 부수어졌으니,
악마여, 이와 같이 알라.
사신(死神)이여, 그대는 패배했다.”(Thig.195)
2020-03-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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